프레임과 중간층 2부: 중산층

2014년 09월 11일 21시 01분

 

프레임과 중간층 1부 : 프레임

 

중도처럼 보이는 유권자들은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가치를 둘 다 가지고 있으며 사안에 따라 입장을 달리 하는 이중개념주의자일 뿐이다.

인지언어심리학자 조지 레이코프에 따르면 소위 ‘이념적 중도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중개념주의자로서 사형제엔 찬성하는 보수성을 보이는 동시에 낙태엔 찬성하는 진보성을 보이는 식이다. 사실 이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반만 사형하고 반만 낙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운데 생각’이란 건 그런 면에서 일종의 환상인 셈으로 실체는 없으나 숫자로는 존재하는 ‘평균의 함정’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념’이란 프레임을 벗어나 생각해 보면 사회적으로 ‘중간층’이 존재하지 않는 건 결코 아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회적 중간층이 다름 아닌 ‘중산층’이다. 중산층은 경제적 수준이나 사회문화적 수준이 중간 정도 되면서 스스로 중산층 의식이 있는 사회 집단이다. OECD 기준으로 보면 중위소득의 50∼150%에 해당하는 소득을 얻는 ‘중간소득 계층’을 의미한다.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는 흔히 안정적인(사회통합적인) 사회로 여겨진다. 고소층과 저소득층이 적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정 정도 수준의 삶을 비슷하게 영위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는 불평등이 적고 당연히 갈등도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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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산층이 무조건 ‘선’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이들은 일종의 ‘낀 계층’으로 상위 계층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과, 하위 계층으로 추락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동시에 지녔기 때문이다. 사회적 여건이나 상황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중적 속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60년대 중산층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다. 이후 고속성장을 거듭하며 중산층이 꾸준히 증가하다 1980년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중산층이 두터워진 바로 이 시기에 상당수의 중산층이 87년 6월29일 민주화 선언에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중산층에 편입되면서 안정적 경제력를 확보하게 되고 바로 이 점이 사회변화를 열망할 ‘여유’를 주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중산층의 규모와 민주주의의 발전이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우리나라 중산층의 수는 급감하게 된다.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1997년 74.1%를 유지하던 중산층이 IMF 외환위기 이후 급감하여 다음해인 1998년엔 65%로 추락한다. 2000년대 초반 경기회복과 함께 잠시 동안 회복하는 듯 했으나(2003년 70.1%) 세계금융위기를 겪으며 다시 외환위기 수준으로 추락하고 만다.(2009년 다시 66.7%)

언뜻 숫자만 보면 그렇게 크게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이는 통계청의 중산층 산출 방식 때문이다. 통계청의 산출 방식은 소득수준만을 가지고 집계하기 때문에 부동산이나 금융자산이 포함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부채와 지출해야 하는 이자가 부동산이나 금융자산에 몰려있다는 점에서 ‘빚’이 반영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더해 1인 가구가 제외된 수치라는 점, 고소득층의 소득집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통계치가 현실보다 과장될 수밖에 없는 이유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중산층 귀속의식(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에 대한 응답을 보면 중산층 붕괴가 대단히 심각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는 응답자 비중이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에 겨우 34.6%에 불과했으며, 심지어 외환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언론에서 떠들던 2006년에는 오히려 더 떨어져 20.1%에 그치고 만다.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는 소위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로 알려져 있으니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리라 예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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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중산층을 더욱 위기로 내모는 게 집값 하락으로 양산된 ‘하우스 푸어’다. 한 때 중산층 진입의 상징이자 평범한 이들에게 최고의 자산증식 수단이었던 집은 대출 이자를 감당하느라 중산층의 허리를 휘게 만드는 최대 골칫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실제로 하우스 푸어의 상당수가 중산층과 겹치는데 통계청이 2010년 실시한 가계금융조사에 따르면 상위 20~80%의 소득을 올리는 가구에 하우스푸어의 약 72.5%가 몰려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양극화와 집값 하락이 겹치면서 중산층은 그야말로 최대 위기를 맡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지난 대선에서 이러한 중산층의 위기의식은 중요한 화두가 된다. 특히 박근혜 대선 후보는 중산층과 하우스푸어 공략에 공세적 전략을 취했는데 첫 공약 발표부터가 '집 걱정 덜기 정책'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는 선거 막판 구호 역시 ‘중산층 70% 복원’으로 설정하여 ‘흔들리는 중산층’의 표심을 잡으려 애를 썼다.

그 뿐만이 아니다. 박근혜 후보는 ‘중산층’이란 개념을 이명박 정권과의 차별화 및 문재인 후보를 (양극화의 주범으로) 공격하는 데까지 사용한다. 이는 대단히 전략적인 것으로 박근혜 후보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의도를 눈치 챌 수 있다.

“노무현 정권 때 붕괴된 중산층을 재건하겠다.”

"(노무현 정부) 당시에 대학등록금은 역대 최고로 높아졌고, 부동산도 폭등했는데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수도권 주민이 최대 피해자가 됐다"

"정말 최악의 양극화 정권...(중략)...이런 후보에게 여러분의 삶을 맡길 수 있느냐"

사실 ‘양극화’는 이명박 정권이 비판받는 주요 의제였다. 이명박 정권과의 차별화를 노렸던 박근혜 후보는 당연히 양극화에 대해 ‘심판자’로 나서야만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보수세력 내부의 싸움으로 비출 위험이 있다. 따라서 양극화의 주범을 참여정부로 설정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지지난 정권까지 가져와 비판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는 전략이다. 일반적이라면 양극화 의제 자체를 회피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무리를 했다는 건 양극화 극복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임을 간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피할 수 없으니 아예 공세적인 자세를 취한 것으로 비슷한 의제였던 경제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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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민주진보세력은 선거 막판까지 후보 단일화 문제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박근혜 후보의 이러한 공세에 적절하게 대응을 못하고 만다. 의제를 완전히 내어줬다고는 할 수 없으나 애초에 민주진보세력이 점유하고 있던 의제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박근혜 후보에게 그 책임을 확실하게 물어야 했던 의제였다는 점에서 민주진보세력에겐 매우 뼈아픈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거 패배 후 만들어진 새정치연합은 이 ‘뼈아픈 대목’에 대해 어떠한 처방을 내놓았을까? 의아하게도 새정치민주연합 발기취지문의 주요 방향은 이와는 전혀 결이 다른 ‘脫이념’에 방점이 찍혀 있다. 소위 ‘이념’으로서 ‘중도층’에 소구하겠다는 게 그 이유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념으로서의 중도층이란 신기루와 같은 존재여서 그 층을 동일한 표심을 지닌 하나의 ‘집단’으로 상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脫이념’을 해야겠다면 실체가 애매한 중도층에 소구하기 보다는 이미 ‘시대적 요구 사항’으로 판명 난 동시에, 지난 대선에서 상대 후보에게 내주었던 경제적 불평등이나 계층 불평등 해소로 설정하는 ‘프레임 전환’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김한길과 안철수 공동대표는 脫이념을 주요 방향으로 설정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오히려 이념 프레임에 갇히게 되는 역설의 함정에까지 빠지고 만다. 다음은 두 대표가 한 말이다.

진보가 성장과 안보, 법치와 안전을 고민하는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김한길 공동대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과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다 -안철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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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성장, 안보, 자유민주주의, 위협... 하나같이 다 ‘이념’을 연상시키는 말들이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오히려 새정치민주연합을 ‘이념’으로 바라보게 된다. 조지 레이코프 표현에 따르면 ‘코끼리(이념)를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는 순간 모두가 다 코끼리(이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프레임 이론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실제로 새정치연합은 과거 ‘뉴 민주당 플랜’을 발표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념 논쟁’ 즉, ‘우클릭’ 논란에 휩싸이게 되고 이후 당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만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경우 뉴민주당플랜으로부터 시작된 실수(?)이기에 그렇다 치고 안철수 의원은 왜 이러한 방향성을 공유하게 된 것일까? 그에 대해서는 안철수 의원 본인 외에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안철수란 한 인물이 어떠한 이유로 인해 ‘안철수 현상’이라는 것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복기해 볼 수 있고, 그 점이 이념 프레임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점차 희석되어져 가는 ‘시대정신’을 다시 명료하게 하는데 있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눈에 띄는 기사가 하나 있다. 2011년 안철수 후보가 박원순 후보에게 서울시장 후보직을 양보하면서 정치 전면에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던 시기에 작성된 뉴욕타임즈의 기사가 그것이다. 해외 언론이면서도 한국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아는 미국 대표 언론 중 하나이기에, 그리고 안철수 신드롬이 처음 등장할 때의 기사이기에 국내적 이해관계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도 비교적 객관적이고 정확한 시각을 지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뉴욕타임즈는 안철수 현상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직역이 아닌 전체 요약 내용)

한국의 안철수 열풍은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정부의 기득권 옹호에 대한 분노가 커진 상황에서 그가 강조한 참여와 원칙, 상식 등이 젊은 층의 공감을 얻은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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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적 불평등...정부의 기득권 옹호에 대한 분노. 쉽게 말해 경제적 계층 혹은 계급으로서의 불평등을 안철수 현상의 주요 배경으로 본 것이다. 당연히 이는 이념 프레임과는 거리가 멀고 이념으로서의 ‘중도층’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과도 거리가 멀다.

물론 뉴욕타임즈 기사 하나로 안철수 현상의 모든 걸 다 설명할 수 없다. 뉴욕타임즈가 무조건 옳다고 할 수만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안철수 현상으로 상징되는 ‘시대정신’을 떠올릴 때 ‘이념’ 혹은 ‘탈이념’을 떠올리는 건 굉장히 어색하다는 걸 기사는 말해주고 있다.

영상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안철수 의원이 재보궐 선거에 임했을 때 가장 강조했던 언어가 아이러니하게도 ‘중산층’과 ‘서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성에 대해 사람들은 별 이견이 없었다. 굳이 비판이 있었다면 중산층과 서민을 구제할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실하다는 정도였다. 그러던 안철수 의원이 이념 논란과 정체성 논란에 빠져들게 된 건 그 자신의 정치적 성패를 떠나 그로 상징되어지는 시대정신이 희석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아쉬운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시대정신 희석의 가장 큰 책임이 안철수 의원에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의원에게 더 큰 책임이 있고, 크게 봐서는 새정치민주연합 전체에 있으며 무엇보다 궁극적으로는 현재 집권여당인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영상에서 안철수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에 집중했던 건 책임을 누구에게 지우기 위한 게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짚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현 야당이 차후 집권을 하기 위한 전략이나 전술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는 대한민국 정치 자체에 대해 모두가 진지하게 고민해 봤으면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찌됐든 현 집권세력의 잘못을 견제하고 감시할 주체는 야당들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의석수를 지닌 현재의 새정치민주연합일 수밖에 없다. 부디 우리나라 정치가 올바르고 합리적인 역할을 수행해내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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