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으면 되풀이된다] 신영철 파문

2015년 06월 09일 16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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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정부 출범 첫해인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정부는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했고 연행자가 속출했다. 연행된 사람들 가운데 재판에 넘겨지는 사람도 잇따랐다.

신영철 당시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은 사건배당 원칙을 어기고 촛불집회 사건을 보수적 성향의 재판부에 몰아줬다. 또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한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조항에 대해 위헌 제청이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빨리 진행하라고 판사들을 다그쳤다. 그는 판사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여러 차례 이메일을 보내 재판 진행을 독촉했다. 헌법재판소가 현행 집시법에 대해 위헌 여부를 심의 중인데도 그 법을 적용해 빨리 재판을 하라는 것은 사실상 ‘유죄 판결’을 강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메일에서 ‘대법원장님 말씀’이라며 ‘현행법에 의해 통상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요구한 부분은 신영철 법원장 자신의 생각을 ‘대법원장 말씀’으로 왜곡한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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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2009년 3월 진상조사를 벌여 “신영철 전 법원장이 사법행정권을 남용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파문이 일어난 2009년 3월은 그가 대법관에 오른 뒤였다)

신영철 대법관은 처음엔 모든 사실을 부인했다. “판사들에게 전화도, 이메일도 보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일부 판사가 신영철 법원장으로부터 받은 이메일을 공개함으로써 재판 개입 사실과 거짓 해명이 드러났다. 그러나 신 대법관은 적반하장으로 판사들을 나무랐다.

판사가 그 정도를 압력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죠. 자기 소신에 따라서 해야 되고. 그건 판사로서 자격없는 얘기죠. -2009.3.5 KBS뉴스 인터뷰

대법관 사퇴 요구가 봇물처럼 일어났다.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전국 17개 법원에서 5백여 명의 판사가 판사회의를 개최해 그의 대법관 사퇴를 요구했다. 급기야 그를 임명 제청한 이용훈 대법원장마저 우회적으로 그의 사퇴를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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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완강히 사퇴를 거부했다. 그리고 6년을 버틴 끝에 올해 초 대법관 임기를 마쳤다. 대법관 퇴임을 앞두고 신문과 인터뷰를 가졌다. ‘촛불 재판' 사건에 대해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할 것"이라고 말했다(2015.2.3 조선일보 인터뷰). 그리고 지난 5월8일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임기 마치고 훈장까지 … 그러나 결코 명예롭지 않다

겉보기에는 임기를 마친 성공한 대법관이다. 그러나 결코 명예롭지는 않다. 퇴임식 날, 대법원 앞에서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1인 시위를 벌였다. 임 교수가 든 팻말에는 ‘당신의 과거를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대법관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퇴임 후에는 단국대학교 법학과 석좌교수에 임용됐다. 그러나 학생들은 총장실 점거농성까지 벌이며 거세게 반발했다.

그런 분이 과연 법대에 와서 저희에게 어떤 것을 가르칠 수 있는지, 정의로움을 가르칠 수 있는지 공정함을 가르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어 반대운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김한미르 / 단국대 법학과 4년

사태가 악화되던 4월 하순, 그가 석좌교수직 사의를 표명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뉴스타파 확인 결과,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사퇴서가 제출된 사실은 없었다. 교수로 전혀 활동하지 않고 있지만, 급여는 계속 지급되고 있다. 단국대 교직원들의 급여일은 15일이다. 3월 초 임용된 이후 5월15일까지 세차례 급여가 지급됐다.

‘제2의 신영철’은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수 있다

‘신영철 파문’은 우리 사회에 두 가지 숙제를 남겼다.

먼저, 법관의 독립성이 언제라도 침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헌법에 독립성이 보장된 판사들은 왜 당시에 그의 부당한 간섭을 뿌리치지 못했을까? 법원장이 매기는 근무평정에 따라 승진을 비롯해 인사가 좌우됐기 때문이다. 근무평정 제도의 악용 가능성은 3년 뒤 ‘재임용 파동’으로 다시 확인됐다. 판사들은 10년마다 재임용 심사를 받고 있는데, 소신발언과 SNS 댓글 등으로 이른바 ‘튀는 판사’였던 서기호 판사가 2012년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판사를) 쫓아낼 수 있는 권한을 누가 갖고 있느냐? 근무평정을 매기는 법원장입니다. 그럼 그 눈치를 안 볼 수 없겠죠. (서기호 판사 재임용 탈락을 지켜본) 판사들은 “아! 이렇게 하면 인사 승진 보직은 둘째치고 밥줄이 날아가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정렬 / 전 판사

신영철 파문이 남긴 또 하나의 폐해는 공직 후보자들 사이에 나타난 ‘버티면 된다’는 풍조이다. 신영철 대법관의 후임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수사검사였던 박상옥 전 검사장이다. 고문치사 축소, 은폐에 개입 내지는 묵인ㆍ방조 의혹이 제기된 박상옥 후보자에 대해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현직 판사들까지 부정적인 의사를 밝히는 등 반대 여론이 거셌다. 그러나 박상옥 후보자도 신 전 대법관처럼 버텼다. 그 결과 대법관으로는 처음으로 임명동의안이 직권상정돼 여당 단독표결로 국회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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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청문회 때 자질검증하면서 이런 저런 문제 있다 나오잖아요? 그때마다 항상 얘기되는 게 신영철 대법관 얘기거든요. 버티면 된다. 신영철 때도 그랬잖아. 버티면 대법관되고 훈장까지 받고… 김지미 / 민변 사무차장(변호사)

우리 사회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요. 그렇지만 그렇지 못한 사례가 신영철 대법관 임명입니다. 박상옥 대법관 사례도 마찬가지고요. 이상원 / 공무원노조 법원본부장

법관의 독립성이 침해될 수 있는 인사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또 아무리 하자가 많아도 끝내 버티면 임명될 수 있다는 그릇된 풍조가 만연해 있다. 지금 황교안 국무총리 후보자도 비슷하게 가고 있다. 2009년의 ‘신영철 파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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