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변상욱칼럼_우리의 깃발은 푸르다

2012년 06월 11일 06시 06분

며칠 전 YTN 노조 파업현장에 들러 노조원들과 시간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리스어에는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가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라는 시간인데 이것은 우리가 흔히 시계와 달력으로 표시하는 시간이죠. 해가 뜨고 지면서 결정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막거나 뒤로 돌리거나 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시간은 ‘카이로스’라고 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빨리 갔다, 느리게 갔다, 멈췄다, 거꾸로 가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꿈과 목표가 무르익어 가는 시간을 말합니다. 아직 우리의 때가 이르지 아니했다, 라고 하면 바로 이런 카이로스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카이로스적 시간은 우리의 갈망과 우리의 흘린 피, 우리가 흘린 땀만큼만 시계 바늘이 돌아갑니다. 대한민국의 꿈이 사람이 사라답게 사는 정의로운 세상이라면 대한민국의 카이로스의 시계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정의롭게 행한 만큼만 시계바늘이 돌아갑니다.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그 시계바늘은 더 빨리 돌아갈 수 있겠죠.

이렇게 시간이 두 가지이니까 역사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달력을 넘기면서 죽 적어내려가는 역사인데, 이것을 독일어로 ‘히스토리에’라고 부릅니다. 또 하나는 ‘개쉬크테’라고 하는 역사인데, 이것은 우리의 꿈과 목표가 무르익어 가면서 함께 익어가는 역사를 ‘개쉬크테’라고 부릅니다. 일찍이 함석환 선생께서 ‘뜻으로 풀이한 한국역사’, 민족의 수난과 좌절, 꿈과 극복을 풀이해 가면서 적은 역사가 바로 이런 개쉬크테적인 역사이겠죠.

그런데 오늘 21세기 한국 사회에는 민족의 꿈과 해방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을 꾸짖고 가로 막아야 할 언론마저도 그 사람들의 힘에 굴복해서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론사의 노동자들은 파업이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진정 누가 파업을 하는 것입니까. 굴종의 역사를 떨치고 밖으로 뛰쳐나온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리사욕에 눈멀어 자기의 본분을 내팽개치고 민족의 꿈과 해방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사람들이 파업을 하는 것입니까.

아마 노동부나 경찰, 검찰의 업무일지에는 우리가 파업자로 기록돼 있겠죠. 그러나 민족의 꿈과 해방을 따라 적어 내려가는 역사에는 우리에게 침묵과 굴종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파업자입니다. 한쪽에서는 우리들을 징계 당한 노동자, 해고 당한 노동자, 고소 고발 당한 사람들이라고 적을지 모르겠지만 진정한 역사는 우리에게 침묵과 굴종을 강요하는 그 사람들을 불의한 파업자라고 새겨놓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깃발을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