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조윤선 구속...블랙리스트 수사, 남은 건 대통령

2017년 01월 21일 12시 53분

‘문화계 지원 배제 명단’ 이른바 블랙리스트 작성 지시 혐의를 받고 있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구속됐다. 두 사람의 구속으로 블랙리스트 수사는 큰 고비를 넘게 됐다. 이제 특검 수사는 박근혜 대통령 관여 여부에 집중될 예정이다.

성창호(사법연수원 25기)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21일 새벽 “범죄 사실이 소명되고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며 구속영장 발부 사유를 밝혔다. 두 사람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와 국회에서의 거짓 증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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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블랙리스트 수사는 ‘대통령 뇌물죄’와 함께 박영수 특검 수사의 한 날개다. 특검은 대통령의 비선 실세 지원을 뇌물죄로, 블랙리스트 작성과 지시는 민주주의를 거스르는 헌법위반 문제로 보고 있다. 특검의 이규철 특검보는 “고위공무원들의 문화계 지원 배제 시행 행위가 국민의 사상 및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명단 작성 및 시행 관계자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을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특검은 이 리스트가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김 전 실장의 지시로 당시 조윤선 정무수석이 주도해 작성됐다고 보고 있다. 청와대 정무수석실과 교육문화수석실을 거쳐 문체부 산하 기관으로 이어져 실행된 것으로 파악했다. 그동안 특검은 이 리스트 서류와 문체부 직원의 진술 등 여러 증거를 확보해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정관주 전 문체부 1차관, 신동철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직권남용과 권리행사방해 혐의 등으로 구속한 바 있다.

두 사람의 구속 영장 발부로 특검의 ‘반헌법적 법치 농단’ 수사는 힘을 받게 됐다. 이미 특검은 고(故)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수첩을 확보해, 보수단체들이 박근혜 대통령 풍자 그림을 그린 홍성담 화백을 고발하는 과정에 청와대가 개입한 정황을 확보했다. 이번 수사는 청와대의 세월호 침몰사고 수사 개입,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를 동원한 관제 집회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어 결과가 주목된다.

박근혜 떠받쳐 온 중심축 붕괴

김 전 실장은 박근혜 정부 국정 운영의 중심축이었다. 그는 검찰 등 사정 라인을 손아귀에 넣고 ‘종북 좌파 척결’이란 명분을 앞세워 국정을 쥐락펴락했다. ‘문화계 지원 배제 목록’은 그가 국정을 농단한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일 뿐이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남긴 업무일지 첫페이지에는 김 전 실장이 주문한 것으로 보이는 지시사항이 들어 있다. 김 전 실장이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념대결 속에서 生活(생활)-갈등 속에서 전사적 자세 지니도록. 헌법가치 수호, 선진국가 건설, 가치중립적 타협, 화합은 없다. 시장 vs. 사회 (중략)-회색지대 無(무). 강철 같은 의지로 대통령, 대한민국 보위

고(故) 김영한 전 민정수석 업무일지/ 2014년 6월 14일

김기춘 박근혜

김 전 실장과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은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전 실장은 고등고시에 합격한 뒤인 1963년, 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꾼 ‘5·16장학회’ 장학금을 받았다. ‘박정희, 육영수’의 이름을 딴 재단의 돈이었다. 검사가 된 이후엔 유신헌법 기초작업에 참여했으며,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의 범인인 문세광에 대한 수사를 맡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준 사람인 것이다. 박 대통령은 김 전 실장을 "드물게 보는, 사심 없는 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김 전 실장은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마다 이름을 올렸다. 대표적인 것이 1975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재직시 발표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유신시대를 대표하는 공안 사건으로 지난 2015년 진행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25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가 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도 김 전 실장이 법무부 장관 시절 만들어졌다.

간첩조작, 초원복국집, 블랙리스트...그리고 구속

법무부 장관 퇴임 후 두 달 뒤엔 일명 ‘초원복국집 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두고 김 전 실장은 부산시장, 부산경찰청장 등 기관장들을 부른 자리에서  “우리가 남이가”를 외쳐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이 사건으로 그는 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그는 이 발언이 새어나간 경로를 추적해 사건을 도청 문제로 전환시켰고, 위헌소송을 이끌어내 결국 자신의 기소를 취하하게 만들었다. 법을 피해 다니는  ‘법꾸라지’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났다.

이후 내리 세 번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박근혜 정부 초기인 2013년 5월부터 2015년 2월까지 1년 6개월이 넘는 기간동안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다. ‘기춘대원군’, ‘왕실장’ 등의 별명을 얻으며 권력 실세임을 과시했다. 하지만 김 전 실장은 과거의 일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고, 이번 국정 농단 사건에서도 자신의 개입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최순실 씨를 중심으로 한 수사만으로는 박근혜 정부 ‘적폐’의 한쪽 면밖에 볼 수 없다. 특검이 수사 초기부터 문화계 블랙리스트 수사에 집중한 이유다. 블랙리스트 문제는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국회 탄핵 소추위원단도 탄핵 사유에 블랙리스트 작성 지시를 추가하는 방안을 이미 검토하고 있다. 새로운 탄핵사유를 추가하려면 국회 본회의 의결이 필요해 일단은 탄핵소추안 참고사항으로 기재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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