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마지막 주에 두 명의 미국인이 세상을 떠났다. 한 명은 한국계 미국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미국 남부 출신이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캘리포니아에 살았던 한국계 미국인 전순태, 그리고 노스캐롤라이나 출신 베츠 헌틀리는 나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1980년 광주항쟁은 우리를 잇는 끈이었고, 우리는 한국의 평화와 정의를 함께 염원했다.
전순태
나는 1980년부터 1982년 사이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살면서 처음 전순태를 알게 됐다. 당시 그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가방 가게를 운영했는데, 광주항쟁 이후 현지 한인 사회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각성의 일환으로 북한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하기로 결심했고, 북한의 고향땅을 찾은 한 최초의 한국계 미국인 중 한 명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 씨는 한때 방문이 금지됐던 북한을 방문할 수 있도록 많은 한국인들을 도왔다. 이후 그는 한국계 미국인 영화제작자 디앤 보르셰이 림과 램지 림의 한국전쟁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 잊혀진 전쟁의 기억에 출연하면서 약간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영화 웹사이트 중 전 씨에 대한 소개페이지 참조). 영화제작자 림 씨는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전 씨를 추모하는 글을 남겼다.
전순태는 우리 영화의 핵심 출연자로서, 그의 인생 이야기는 한국전쟁의 참담한 실상과 끔찍하게 지속되는 한국의 분단,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염원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한국의 해방과 평화 통일을 위해 싸운 위대한 투사였다.
전 씨의 고향 개성은 38선 이남이지만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지배를 받게 됐다. 영화에서 전 씨는 1950년 6월 개성의 한 저수지에서 자신의 친구들과 했던 수영 시합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음날 저수지에 총탄이 떨어지고 기관총과 박격포 쏘는 소리에 잠이 깬 그는 북한군이 개성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휴전 회담으로 개성이 봉쇄 되는 바람에 전 씨는 개성 밖에, 전 씨의 아버지는 개성 안에 발이 묶였고, 그는 다시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전 씨는 남자형제 둘과 여자형제 하나와도 생이별을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196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거의 20년 후, 그가 첫 북한 방문을 한 뒤에 나는 그를 인터뷰했다. 놀랍게도, 나는 그가 이승만의 독재에 항거한 4.19 혁명 시기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그 시대는 정치, 사회적 혼란기이자 국가의 분단상황을 타개하려는 열망이 큰 시기였다.
그는 “나는 행렬의 맨 앞에 있었다”고 말했다.
살아남은 게 행운이었죠. 그러나 4.19 이후 내가 기억하는 것은 밤이건 낮이건 모든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는 당시 통일에 관한 메시지가 남북 학생들 사이에 오갔으며, 판문점에서 양측 회담을 열기 위한 계획이 준비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모든 논의는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북한과의 모든 접촉을 금지시키면서 돌연 중단됐다. 전 씨는 “박정희가 역사의 흐름을 막았다"고 슬프게 말했다. 1980년, 전두환이 유사한 방식으로 정권을 잡으면서 박정희의 쿠데타를 떠올리게 했고, 전순태 씨는 다시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활동에 뛰어들었다.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자주 방문했던 시기 외에 그는 남은 일생을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다. 지난 6월 마지막 주에 그는 숨을 거두었다.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
6월 26일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숨을 거둔 베츠 헌틀리 목사는 아내 마사와 함께 광주에서 장로교 목사로 여러 해 일을 했다. 1980년 5월, 광주기독병원에서 의사 겸 원목실장으로 일하던 당시 그는 전두환의 특수부대가 자행한 학살과 그 이후 계엄군으로부터 광주시를 해방하기 위해 일어난 광주항쟁을 목격했다.
당시 광주에 머물고 있었던 많은 외국인들과 달리, 헌틀리 목사와 그의 아내는 광주를 떠나 피신하라는 미국 정부의 권고를 거부했다. 그들은 오히려 계엄군의 공격을 피해 찾아온 사람들을 피신시켜 주었다. 지난 7월 7일, 광주 MBC는 헌틀리 목사의 공헌을 기리는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헌틀리 목사 부부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광주 항쟁의 직접적인 목격자들이었다. 1981년 2월, 나는 2달 간의 방한 일정 말미에 광주를 방문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부모님의 선교사 친구들을 통해 헌틀리 부부 이야기를 들었다. 헌틀리 부부는 나를 자신들의 집에 따뜻하게 맞이했다. 당시 헌틀리 목사의 집에서 나는 며칠을 지내며 광주항쟁의 희생자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과, 광주 시민들이 총알, 곤봉, 군화, 총검에 당한 끔찍한 부상을 직접 들었다.
헌틀리 부부가 준 정보를 바탕으로 나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전두환의 광주 항쟁 진압에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탐사를 시작했다. 헌틀리 부부를 방문한 지 15년 후, 나는 마침내 광주항쟁에서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미국 정부의 기밀해제 문서 더미(‘체로키 파일’을 말함-역주)을 입수했다.
내가 입수한 문서 중 하나는 ‘광주 폭동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미 국무부로 보낸 외교전문이었다. 광주 항쟁에 대해 미국 정부가 선호하는 ‘폭동’이라는 거짓 단어를 쓴 것이었다. 해당 문서에 나오는 내부자는 익명으로 처리되었지만, 나는 그것이 헌틀리 목사의 증언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문서는 광주 항쟁에 대해 미국 정부가 단 한 번도 취하지 않은 인간적인 시선을 담고 있었다.
헌틀리 목사는 이런 인상적인 구절을 남겼다.
우리가 광주에서 본 것은 자유로운 사람들의 집회를 지나치게 탄압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1773년 영국 본국의 지나친 세금 징수에 반발한 북아메리카 식민지 주민들이 보스턴 항에서 동인도회사의 배에 실려 있던 홍차 상자들을 바다에 버린 사건. 이는 이후 미국독립혁명의 발단이 됐다 -역주)과 유사하다고 봅니다.
그는 또 “5.18은 공산주의자의 선동이나 침투, 또는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게 아니었습니다."고 덧붙였다. 그는 광주항쟁이 시민들의 정의와 민주주의 요구에 기반한 항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광주항쟁 당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외교전문. "광주 폭동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이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안타깝게도 미국 정부는 헌틀리 목사의 증언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1년 헌틀리 목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 또한 미국 정부의 기밀 문서들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와 광주 시민들은 모두 그에게 큰 빚을 졌다.
전순태 씨와 베츠 헌틀리 목사 모두 특별한 사건에 휘말린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부디 두 분 다 영면하시길.
REMEMBERING TWO AMERICANS – ONE KOREAN, ONE SOUTHERN - WHOSE LIVES TOUCHED KOREA
The last week of June, 2017, saw the deaths of two Americans – one of them Korean, the other from the US South - who in separate ways had a profound impact on the people of Korea. Chun Sun-tae, who lived in California, and Betts Huntley, who was from North Carolina, also influenced me deeply. Our common bond was the Gwangju Uprising of 1980 and our mutual concern for peace and justice in Korea.
CHUN SUN-TAE
I first knew Chun Sun-tae when I lived in the San Francisco Bay Area from 1980 to 1982. At the time, he was running a luggage store in Oakland, California, and had become very active in the local Korean community in the aftermath of the Gwangju Uprising. As part of his political awakening, he decided to visit his family in North Korea, becoming one of the first of many Korean-Americans to go back to their homeland.
Over time, Mr. Chun helped many Koreans visit the once-forbidden North. He later gained a modicum of fame when he starred in Memory of Forgotten War, a documentary about the Korean War by the Korean-American film makers Deann Borshay Liem and Ramsey Liem (here is a section on Mr. Chun from the film’s website). In a tribute on his Facebook page, Mr. Liem wrote:
“Chun Sun-tae was not only a critically important participant in our film – his life story so vividly brought to life the hard realities of the Korean War, the terrible unending division of Korea, and the longing for family reunion - but a great fighter for Korea’s liberation and peaceful reunification.”
Mr. Chun was from Kaesong, a village that was south of the 38th parallel but ended up under communist control after the war. In the film, Mr. Chun talks about a swimming outing to reservoir he made with his friends in Kaesong in June 1950. “The next day, he awakes to bullets dropping in the water and the sound of machine guns and mortar fire, and discovers Kaesong is occupied by the North Korean army. When Kaesong is later sealed off for peace talks, Chun is left on the outside while his father is trapped inside the city; he never sees his father again.”
Mr. Chun also left behind two brothers and a sister. After going to college in Seoul, he immigrated to the United States in 1964. Nearly two decades later, I interviewed Mr. Chun after he made his first trip North. To my surprise, I learned that he had been a college student in Seoul during and after the 4.19 uprising against the dictator Rhee Syngman, a period of ferment and yearnings for an end to the country’s division.
“I was on the front lines,” he told me. “I was lucky to survive. But after April 19, all I remember, day and night, all we were talking about was reunification.” He said that messages about unification were going back and forth between students from South and North, and plans were being made for grand meetings of both sides in Panmunjom.
But all that stopped abruptly after the May 16, 1961, coup d’etat by General Park Chung Hee, who declared martial law and banned any contact with the North. Park “blocked the course of history,” Mr. Chun told me, sadly. Memories of Park’s coup were triggered in 1980 when General Chun Doo Hwan seized power in a similar crackdown, driving Chun Sun-tae to be politically active again. Except for his frequent visits to his family in North Korea, he lived in California for the rest of his life. He died there during the last week of June.
REV. DR. CHARLES BETTS HUNTLEY
Betts Huntley, who died in North Carolina on June 26, served with his wife Martha as a Presbyterian missionary in Gwangju for many years. In May 1980, while working at the Gwangju Christian Hospital as a doctor and a chaplain, he witnessed the massacre by Chun’s Special Forces and the subsequent uprising in which Gwangju citizens liberated their city from the martial law army.
Unlike many foreigners in Gwangju at the time, Rev. Huntley and his wife refused US government pleas to leave the city. Instead, they sheltered people who came to them for safety from the marauding martial law troops. On July 7, Gwangju’s MBC television broadcast a special tribute to the missionary honoring his service to the city.
Rev. Huntley and his wife were the first direct witnesses to the Gwangju Uprising I met. In February 1981, I visited Gwangju at the tail end of a two-month visit to South Korea. I had heard about the Huntleys through missionary friends of my parents in Seoul, and they welcomed me to their home. I spent several days there, and heard first-hand from Rev. Huntley and his wife about huge number of casualties and the terrible wounds caused to Gwangju citizens from bullets, clubs, boots and bayonets.
With that information, I began my quest to discover the truth of what occurred in Gwangju and the role played by the United States in General Chun’s suppression of the uprising. Fifteen years after my visit to the Huntleys, I obtained the collection of declassified US government documents that finally told the true story about the US role.
One of the documents I obtained was a cable from US Ambassador William Gleysteen to the State Department titled “Insider’s Account of Kwangju Riot,” using the false term about the uprising favored by the US government. I instantly recognized the account as the work of Rev. Huntley, even though he was not identified. But it humanized the uprising in ways the US government never did.
In one memorable passage, Rev. Huntley wrote, “What we saw in Gwangju was a demonstration of free people pushed too far. I liken it to the Boston Tea Party.” He added: “The May 18 incident was not communist-inspired or infiltrated or infected.” He knew it was a peoples’ uprising, based on citizens’ demands for justice and democracy (his report is attached in PDF format).
Unfortunately, the US government paid little attention to his account. But without the help of Rev. Huntley in 1981, I may never have obtained my documents. I and the citizens of Gwangju therefore owe him a great deal.
Both Chun Sun-tae and Betts Huntley are examples of how ordinary people caught in extraordinary events can influence history. May they both rest in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