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26회 시선 - "박근혜씨, 아버지를 말한다" [전문]

2012년 09월 14일 16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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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재 시사토론-박근혜씨, 아버지를 말한다

 

1989년 5월 19일 밤 9시 50분부터 2시간동안  MBC 방송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박경재입니다.

제가 대단히 외람스럽습니다마는 시청자 여러분께 한가지 질문을 드려볼까요?

우리나라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인물을 누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다소 예외는 있겠습니다만 아마 고 박대통령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 박대통령을 무척 싫어하시는 분도 계시고 좋아하는 분도 계시지만 그 평가가 어느 편에 서든지 간에 그분은 분명 대단히 폭발적인 존재였습니다. 벌써 고 박대통령이 5.16 거사를 한지도 28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분이 세상을 떠난 지도 10년 가 까이 됐습니다. 오늘 참으로 오래간만에 우리 MBC 카메라 앞에 고 박대통령의 따님이신 박근혜씨가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박근혜(이하 박): 안녕하세요?

이 TV카메라 앞에 나오신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을 더듬으실 수가 있는지요?

박: 글쎄 거의 한 9년, 10년 되나요?

그렇게 되시죠? 그래도 하나도 안 변하시고 더욱 아름다워지셨다고 느끼는 시청자가 많이 계신 것 같아요.

박: 그렇지도 않아요.

겸손의 말씀이신데 지금 이 말씀을 막 나누기 시작한 이곳 소개부터 해주시겠어요?

박: 이곳이 어린이회관 안에 있는 잔디밭이구요. 저쪽이 본 건물이구요. 어머니가 남산에 70년도에 어린이 회관을 지으시고 나서 그 건물이 너무나 높기 때문에 어린이들한테는 위험한 면이 많다고 해서 이렇게 넓직한 곳에 짓기를 소망하셨거든요.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나라 건물양식을 따서 다 설계하시고 기공도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그 뜻을 이어 가지고 여기에다가 어린이회관을 지으셨지요. 지금 근화원 설명도 좀 하자면, 87년에 된 건물인데요. 그건 제가 관심을 갖고 지은 건데 우리나라 꽃 이름을 따서 근화원이라고 지었어요. 그리고 이걸 짓게 된 동기는 요즘 우리나라 전통가옥을 어린이들이 보기도 힘들고 또 그 안에서 생활한다는 건 더 힘든 일이구요. 그래서 전통예절과 기타 이런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되는데 이를테면 절도 제사 드릴 때 절과 또 새해에 드리는 절이 다 다른데, 이것을 다 혼동해 가지고 제사때 드리는 절과 새해 드리는 절이 다른데 이걸 혼동해서 제사때 드릴 절을 세배로 드리고 이런 우스운 일도 있고 해서... 기왕이면 전통적인 한옥에서 우리나라 전통예절을 배우면 더 뜻이 있지 않을까 해서 지었습니다.

요즘 근황을 여쭤보려 했는데 설명 도중에 나온 것으로 일단 믿고 이렇게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작년 가을인지부터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시다가 월간지 여성잡지를 시발로 해서 인터뷰를 하시기 시작하고 드디어는 우리 MBC 카메라 앞에까지 나오셨는데, 그렇게 침묵을 깨신 동기나 이유가 있으신지요?

박: 그 동안에도 아버지에 대해서, 특히 아버지가 하신 일에 대해서 제가 판단하기에는 왜곡된 여러 가지 평가라든가 그런 보도를 수없이 접해오면서 참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것이 기회가 안 되고 기념사업회도 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그렇게 안 되었어요. 그런데 작년부터는 기회가 성숙돼 가지고,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니까 저도 그런 기회에 부모님에 대해서 잘못된 것을 하나라도 바로 잡는 것이 자식 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싶어 적극적으로 응해 왔습니다.

그럼 그전에는 기회가 안됐다는 말씀입니까? 기회가 있었는데 스스로 사양하셨다는 얘긴가요?

박: 기념사업회만 해도 그 전까지는 할 수가 없었지요.

그 얘기를 시청자 여러분들께 조금 분명하게 해주십시오. 저도 궁금한데 누가 방해를 해 서 못하셨다는 얘깁니까? 아니면.. 할 수 없었다는 말씀을 잘 제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박: 제가 구체적으로 말씀을 안 드려도 잘 아실텐데요.

잘 모르겠는데요.(겸연쩍 웃음.)

박: 제가 새마음운동을 했는데, 그 새마음 운동도 사실 타의에 의해 해체된 거나 마찬가지거 든요, 그런 마당에 무슨 기념사업회를 한다는 건 더더군다나 어려운 일이지요.

10.26으로 이야기를 옮겨 볼까요? 인간에겐 운명의 날이 있는데 박근혜씨에게는 그런 운명의 날이 유난히 많았던 것 같습니다.10.26 그날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하셨는지요?

박: 예. 제가 매일 아침 아버지 곁에서 신문도 읽어드리고 제가 먼저 식사를 끝낼때도 있지만 주로 모시고 식사도 했는데,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진지를 드시고.옛날에 아버지가 교사로 계실 때 가르치던 제자가 선물을 족자로 보내왔는데 그걸 참 흐뭇하게 생각하셨구요. 오늘 삽교천에 다녀온다고 끝을 흐리시면서 나가셨어요. 삽교천에 다녀온다고 말을 끝까지 다 하지 못하시고 가신다는 것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마음에 걸리고 그렇습니다.

그날 이상한 점은 또 없었습니까?

박:특별히 그런 것은 없었는데. 오후에 제가 손님을 만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저녁에 바깥에서 식사를 하시고 온다고 기다리지 말고 먼저 식사하라고 비서관이 전해주셨고요. 아침이 마지막이었어요.

비보를 들으시는 것은 정확히 몇시?

박:새벽 한 시인가. 갑자기 인터폰이 와서.제 예감이 섬뜩한게 안 좋았어요.이 무슨 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직감을 하고.아버지 서재 들어가기 전에 전실이라고 있었거든요. 그 당시 김계원 비서실장이 올라오셔서 아버지 돌아가신 일을 처음 들었어요.

그래서 놀라워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김재규 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말다툼을 하다가 경호실장을 향해 쏜 총이 잘못돼서 아버지가 맞으셨다고.제가 기억하기에는 그렇게 들은 기억이 나요. 그래서 제가 그 당시에 아버지가 자주국방에 골몰하고 계신것을 옆에서 봐왔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혹시 이런 공백기에 북한이 혹시 장난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싶어가지고 38선은 괜찮냐고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다고.

그 엄청난 순간에 휴전선 문제를 말씀하신것이 5년동안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시면서 대응을 해오신 그런 맥락에서 나오신 것이 아닌가도 생각이 드는데.이제 이런 말씀을 여쭤 보겠습니다.

누구나 궁금한 대목인데, 박 대통령과 김재규 두 분은 공통점이 많죠. 두 분이 고향이 같으시고 육사 2기시고 교사를 두 분다 하셨고.박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서 중앙정보부장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있던 그 분이 왜 박 대통령에게 총을 겨눴느냐.지금 밝혀진 것은 김계원 실장의 보고와는 달리 과실로 쏜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쏴서 박 대통령을 저격했는데 왜 그랬다고 보시는지요?

박: 그동안의 이야기를 종합해 볼때 경호실장과 정보부장의 충성 경쟁이라고 할까요. 그런 알력에서 비롯되어서 정보부장으로서 여러 실책을 저지른것에 대해서 아버지가 문책을 하시고 불신을 하신 것에 대한 두려움 등이 복합되어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닌가 판단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무모한, 사후의 일은 생각 안 하고 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보시는지요?

박: 김재규 부장은 11월 14일 아버지에게 스위스에서 일부러 주문을 해서 시계를 생신 선물로 드릴려고 준비를 했었던 분. 오래전부터 모의했다면 그런 선물까지 준비할 필요가 뭐 있겠어요. 또 아버지가 하신일이 정말로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면 사나이답게 한번이라도 아버지에게 건의를 했었어야지요. 그 건의가 옳은 것이고 나쁜 것이고는 둘째 치고.

옛날에는 독을 앞에 놓고도 상소라는 것을 했잖아요. 임금님한테. 내가 죽어도 좋으니까 죽더라도 나라를 위해서 바른 소리를 하고 죽겠다. 그렇게까지 요즘 생명이 쉽게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럼 정말 유신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했다면 이러이러한 것은 어떻다고 한번이라도 이야기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좋은 부귀영화는 다 누리면서.결국은 신임을 하셨기 때문에 정보부장이라는 높은 자리까지 주셨는데 그런 식으로 배신을 한다는 것은 패륜이죠.

그날 현장만을 본다면 부하들 5명을 시켜서 계획적으로 한 거 아닙니까? 현장만을 본다면요.

박:우발적이라는 것이..하루 전에 계획했다 해도 우발이죠 그거는.

이런 점은 어떻습니까? 10.26 9일전부터 유신을 기념하기 위해서 파티를 하고 그랬었지요.그러다가 부마사태가 심각해지니까 데모가 그날도 있었고. 그 당시 10.26 사태 당시 부마 사태가 대단히 심각했었는데. 그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이 더 이상 데모가 악화되면 캄보디아처럼 수백만이라도 탱크로라도 깔아없애자.이런 식의 야만적 발언도 나온 것으로 보도가 되고 있는데. 10.26사태가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느냐는 의문들이 있어요.어떻게 보세요?

박: 아버지는 10.26 사태가 없었다면 김재규 당시 정보부장이 경질됐던 것은 확실하고 차지철 경호실장도 그 자리를 물러났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이틀전에 제가 여러통의 편지와 건의서를 받았거든요.그것은 시국을 걱정하는 편지고 건의서인데 아버지 주위의 몇몇 사람들이 일을 망치고 있다.그래서 그 사람들을 사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력한 건의였어요.거기에 차지철,김재규씨도 포함되어 있었어요.그날 그걸 제가 종합적으로 아버지께 다 말씀드렸지요. 아버지가 굉장히 심각하게 경청하셨고.다 들은 다음에 알았다고 힘주어서 말씀하시는데, 제가 오랫동안 아버지를 모셔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말씀하실때는

그게 어떤 뜻이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거든요. 그 때 아버지가 어떤 결심을 하셨구나.정보부장이 곧 경질이 되겠구나 그렇게 믿었어요.

정보부장과 경호실장을 경질을 함으로써 사태 수습이 됐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박: 아버지가 바른 판단을 내리셔서 그 전에도 위기를 넘겨오셨기 때문에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바른 판단을 내리셔서 수습을 하셨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월간 잡지의 보도를 보면 그 당시 후계자를 구상하셨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게 사실인지요?

박:제가 점심때도 아버지를 모시고 식사를 하던때도 많았거든요.

그 때 아버지가 간간이 다음 대통령은 누구면 좋겠냐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어요.그래서 저는 아직도 임기가 이렇게 남으셨는데 그걸 그렇게 물으시나 생각하면서.누구를 후임으로 맡길까 구상하는구나를 제가 알았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수 주일전부터는 점심때마다 그게 화제였어요. 누가 후임으로 적당할 것 같냐고. 저는 뚜렷한 생각이 없었고.

나중에 아버지가 결론을 내리시는데 최규하 국무총리가 맡아서 하면 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아버지가 그런 결론을 내리실때는 하루아침에 그런 결론이 나오는게 아니라

어떤 일을 시키시면서 어떤일을 하는 걸 쭉 보시면서 판단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당연히 제기되는 의문이 왜 김종필씨가 아니었나? 박근혜씨는 김종필씨는 어떠냐는 말씀을 드려보신 일은 있는지요?

박: 저는 그런 질문을 한 기억은 없구요.아버지께서 많이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목숨을 내걸고서 정말 5.16 혁명을 한 후에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는 아버지 평생의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하신 일인데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나라를 조국 근대화를 해 놓으신 다음에 누가 그거를 제대로 잘 지켜나갈 것인가 그걸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셨겠어요. 여러 가지 인품과 그 사람의 과정등을 판단해서 내리신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규하 총리가 나중에 걸어가신 길을 보면서 박대통령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은 안 하시는지요?

박: 아버지는 그 때 그만큼의 기반을 닦아 놓았기 때문에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제는 공산당에게 먹히지 않고 누가 하더라도 자립경제의 기반하에서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판단을 하셨던 것 같아요.

그때는 아버지가 유신헌법도 개정할라고 하셨기 때문에 개정된 헌법하에서 경선을 거쳐가지고 대통령이 되는 것이니까 그 때 아버지가 결심을 하셨더라도 누가 대통령이 될 지는 알 수가 없지요.다만 나라의 기반이 잡혀있었기 때문에 안정된 기반하에서 나라를 이끌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납득이 잘 안 되는 것이 국민의 의사에 의해서 대통령이 선출이 된다면 유신체제에서 최규하 총리가 국민적 인기와 성원을 받고 대통령이 된다고 박 대통령이 보셨는지. 그렇게 생각하세요?

박: 글쎄요. 정말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선거가 어떻게 됐을까는 제가 말씀 드리기가 좀...

지금 백담사에 가 있는 전두환씨가 이런 말씀을 했어요. 내가 차라리 죽어서 나왔으면 이런 모욕은 안 당했을 것이다...박대통령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갖든 부정적인 시각을 갖든 전권을 혼자 가지고 계셨다는 점에서 독재자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못할텐데 독재자가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고 나온일이 과연 있었는지, 그리고 나중에 어떤 말로를 보냈는지 이런 점을 생각해 볼때 과연 박 대통령이 최규하 총리든 누구든 후계자로 지명하고 물러나셨을 것인가는 좀 의문이 드는 대목?

박:그건 분명해요. 아버지는 물러나셔서 평화롭게 지내길 소망하셨어요.

말씀을 끊어서 죄송한데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고 보시는지요? 국민의 저항이 없다고, 물론 역사의 가정인 것 뿐이지만.어떻게 생각하세요?

박: 아버지가 물러나는데 국민을 저항한다구요? 왜?

물러나서 평안하게 계시고 싶었다고 하셨는데. 그 동안 박정희 대통령이 걸어오신 길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내지 저항 때문에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박:그동안 10년동안 왜곡 일변도로 아버지와 아버지가 하신일을 그저 깍아내리는 세월을 살아오셨기 때문에 그것만 보셔가지고 온통 국민이 아버지를 독재자로서 미워하고 그런걸로 생각하고 계신데 제가 여기서 추모영화를 보러 오신 분등을 만나면 아버지 어머니를 추모하는 국민의 마음은 지극하다는 것을 제가 피부로 느낄 수 있어요. 그렇게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서 일하고 나오신 아버지께 우리 국민이 그렇게 악인들에요?왜 그렇게 저항을 하고 그래요?

좋습니다. 이런 점은 어떻습니까? 지난 10년동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보도나 이야기만 있었다는 취지이신것 같은데. 61년 5.16이 나고 나서 5년을 더 장면총리가 사시고 돌아가셨는데 장면 총리를 박정희 정권은 끊임없이 매도했습니다. 무능하고 부패했다. 단 한번도 제 기억으론. 장면 총리의 이야기. 우리가 무능하지도 부패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를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그 후에도 79년 이전까지 장면 총리쪽의 억울한 측면이 한 번이라도 공개적으로 토론이 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박: 그 때 장면 총리에 대해서 신문에 나쁘게 나가기 직전에 어머니 부속실에 들어왔어요.어머니가 그걸 우연히 보게 되어서 전임자에 대해서 이렇게 쓰는 것은 안 된다. 그래서 그걸 지우게 하시고. 막으신 적이 있는 것을 제가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 제 생각에는 박정희 정권이 장면 총리 등 전임 정권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 박정희 대통령 사후 되풀이 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데...

박: 그건 그렇게 일반화 할 일은 아닙니다.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해야지요. 그럼 5.16에 대해서도 질문하시겠다니까 제가 말씀드릴게요. 5.16때 과연 어땠는가? 6,70년대 한국은 어떻게 성장을 했는가 그걸 가지고 이야기 해야지 무조건 잘 됐다 잘못됐다라고 말하라는 것은 아니죠.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 해야죠.

5.16을 나중에 질문드리려 했는데 말씀을 하시니까.5.16을 어떻게 평가하세요.

박:저는 5.16이 말하자면 구국의 혁명이었다고 믿고 있는데. 아버지 3주기 땐가 한 재미작가 아버지를 추모하면서 신문에 기고한 글이 있어요. 그 글중에 이런 부분이 나오는데.

아버지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한반도가 아버지를 만들어간 방법과 아버지가 한반도를 만들어간 방법, 이 두가지를 동시에 생각해야만 평가가 된다. 저는 이 이야기야 말로 정말 아버지를 평가하는데 정곡을 찌른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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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5.16을 평가하는 신문들의 표현을 보면 그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야기가 안 되고 그냥 어떻게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느냐,헌정을 중단시켰다,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식의 비판 일변도로 나오는데 저는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냐면 그럼 5.16이 없다, 더 나아가 유신이 없다고 할 때 과연 그 5.16을 비판하고 매도까지 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데리고 사는 이 땅이,이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이 굶어 죽어갈때는 그 사람에게 복지정책이 어떻고는 의미 없는 이야기.일단 먹여서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일단 사람을 살리는 것이 최선의 길인데. 나라가 없어지는 판인데 민주주의를 중단시켰다는 이야기가 어떻게 나올 수가 있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나라가 있어야 민주주의가 있는거니까.

제가 들기론 지금 결과를 가지고 말씀하시자고 하시면서 제가 듣기론 그 결과로서 경제발전을 말씀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박정희 정권아래에서 국민들이 일방적으로 한 이야기만 듣다가 지금 여러 가지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경제발전이 박정희 대통령만의 공이 아니다. 예를 드는 것이 미국에 있는 우리 교포가 백만이 넘습니다. 미국에 많은 나라에서 이민을 왔는데 60년대,70년대에는 우리 교포를 일컬어 제 2의 유태인,그러다가 요새는 유태인보다 더 성취를 많이 하니까 제 2 유태인이란 말도 없어져버렸는데.그래 늘 하는 이야기가 미국에 이민온 우리에게 공화당 정부도 없었고 박정희씨도 없었는데 우리는 이렇게 잘 살지 않느냐.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있어서 경제발전이 됐다는 것은 허구다는 제 일차적 증거다. 이런 말을 하거든요.

그 다음에 공화당 정부때 대한민국 영토내만 살펴봐도 그 저임금 속에서 노동한 분들의 눈물과 땀속에서 이뤄진 것이지, 우리나라의 우수한 인력. 그 때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을 한 게 그 분의 개인의 행복이지 그 분 때문에 나라가 잘 살게 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강력한 반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 그렇게 좁게 보게 되면 한이 없어요. 교포에 대한 것도 그래요.어머니가...어머니 말씀이 아버지 말씀인데.우리가 교포를 가장 위하는 길은 무엇이냐.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나라가 가난을 면하고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러셨어요. 우리가 못 살 때는 자기 나라에 대해서 긍지도 가질 수 없는 그런 것이 이제는 벗겨졌잖아요. 이제는 어디가든지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말할수 있고.

제가 여쭤보는 것은 그 공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돌아가야 되느냐?

박: 물론 나라 건설을 한 분이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그러나 우리나라가 5천년동안 가난했거든요.우리 선조가 5천년동안 가난해가지고 그런 수모를 당했는데. 그동안 지도자도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또 우리보다 여건이 좋은 나라가 많거든요.자원도 풍부하고 공산당의 위협도 없고.그런 나라도 가난하고 싶어서 후진국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만큼 가난을 몰아낸다는 것은 노력만으로 안 되고. 물론 하늘의 축복도 있어야겠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인데. 물론 국민전체가 이룬 성과이지만 지도력 없이 민족이 자각하고 저력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만 하더라도 민주당이 다 남겨놓은 것을 5.16으로 못하게 된 것이고 5.16 이후에 꼭 공화당 정부 때문에 경제발전이 된 것이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비판의 소리가 있기 때문에 제가 말씀드린겁니다.

박: 5.16도 아까 이야기를 하다 말았지만요. 어떤 분에게 제가 들었는데 4.19이후에 5.16까지의 혼란이 진정한 자유냐.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정부의 통제기능을 상실한 완전히 무정부 상태다.

장면 총리야 말로 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칼 사용을 자제하고 국민에게 호소하고 그런 게 진정한 용기가 아니냐는 이런 생각도 들구요. 혼란을 말씀했지만 1961년 5.16이 가까워지면서 4월 5월 데모 건수도 줄고 진정국면으로 들어갔거든요. 그 당시 자료를 보며는요.

장면정부가 60년 8월에 집권했거든요. 그런데 많은 책을 보면 그 이전인 7월부터 이미 쿠데타 모의를 했어요. 그러니까 장면정부가 잘못해서 쿠데타를 했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김모의원에 모 잡지에 인터뷰 한 것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자유당 정권때부터 쿠데타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는 그런 글은 읽어보셨는지요?

박: 그 당시에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결심을 했는데 4.19가 있어서 안도를 하고 그 계획이 취소가 됐잖아요. 그럼에도 4.19이후 나라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말하자면 5.16 혁명이 난 건데.

이 점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5.16이 있었기 때문에 전두환이라는 또 다른 군사독재정권이 탄생했다. 그 후에 면면히 이어진 군사독재로 이어져서 5.16은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잘못을

한 게 아니냐?

박: 그런 어거지 논리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5.16과 5.17은 다른 거고.

어떤 점이 다릅니까? 군인이 총을 들고 헌정을 중단시킨 것은 같은 거 아닌가요?

박: 그렇게 고것만 갖고 이야기하면 같지만 국민 학교 아이도 아닌데 어떻게 고 상황만 같고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버지가 하신 것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어거지로 같다붙인 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 5.16이 있었기 때문에 5.17이 있어요? 5.16이 있었다하더라도 5.17이라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 때 나선 것이 잘못이지 5.16이 있었기 때문에 5.17이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요.

5.17이 잘못된 것이죠?

박: 그거는 청문회를 통해서 5공에 대해서 제가 보고 느낀 것이 많은데 그거를 제가 굳이 이 자리에서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5.16과 5.17이 다르다고 말씀하시면 5.17에 대한 평가를 보류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박: 제가 5.16에 대해서 조금 더. 시대상황이 많이 망각되고 군이 개입됐다 이것만 이야기 되기 때문에. 5.16이 일어났을 때 우리나라 상황이 어땠는가. 그 때 우선 실업자가 수 백만이었구요. 국가적으로 큰 화근이죠. 풀뿌리로 연명하는 농민이 허다했어요. 오죽하면 혁명공약에서 절망과 민생고에 허덕이는 농민을 기아선상에서 해결해야 되겠다는 것이 혁명공약에서 나왔습니다. 그 때는 또 밀수가 횡행했지요. 경제가 그런 지경이었지요. 매일 데모가 있고 국회의사당에선 국회의원들이 이불깔고 데모하고 국민 학교 학생들도 데모를 하는 그러니까 특히 북한하고 대치해서 볼때 지금과 그 때는 말할 수 없이 달랐어요. 그땐 우리가 군사력,경제력에서 북한에게 지고 있을 때였거든요. 그 때 공산당이 가만 있었겠어요. 가만이 있으면 공산당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공산혁명을 위해서 상황이 완전히 무르익었다고 판단해서 수많은 간첩을 남파하고 대남방송을 강화하고 전단을 뿌리고, 국내에서는 용공세력이 불안을 극도로 선동했지요. 그 사이에 반공의식은 자연히 해이되고. 또 학생들이 스스로 남북회담 열겠다고 나섰던 때 아니에요.

국회의원들이 이부자리 깔고 농성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 계실때도 자주 있었던 일입니다.

학생들의 데모는 지금도 있습니다. 그 때 민주주의가 됐으면 다 끝났을 일을 박 대통령 때문에 늦어졌다는 평판도 있고. 제가 꼭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혁명공약을 말씀하시니까.

박대통령께서 혁명공약에서 조속한 시일내에 군으로 복귀하신다고 했거든요. 그 약속은 우리가 분명히 기억하는데.

삼선개헌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는 기억하실거에요. 전국을 돌아다니시면서 이번 한번만 뽑아주면 마지막 기회다. 그게 마지막이 아니었지요. 수없이 거짓말 하셨다는 비판이 있는데.

박: 그 때 민주화가 될 것을 아버지가 중단을 시키셨다는 말도 그래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나라가 있은 다음에 민주화도 할 거 아니겠어요. 나라가 없어지는 판인데 나라가 없어지는 판에 민주화를 할 수 있나요?그 때 그 시국을 보는 분들의 의견은 5.16이 먼저 났느냐 공산당이 먼저 쳐들어 왔겠느냐 그런 시점에서 5.16이 다행히 먼저 나서 파멸직전에 국가가 구출됐다 그렇게 보고 있어요. 나라가 없어지면 민주주의를 못하는 건 둘째치고 다 죽는 판 아니에요? 그래서 5.16 혁명이 국민의 지지를 받았지요.

지금은 뭐 국민의 지지를 받지 않았다고 그러는데 그 때 국민의 지지를 받았어요.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하시는데 그럼 김종필, 김재순, 박준규씨 같은 분들. 이런 분들이 추모사업에 전혀 관여를 안 하시고, 박대통령을 전혀 옹호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국민의 반감이 있기 때문에 무서워서 안 하는 것은 아닐까요?

박: 저는 어떤 정당이 추모사업과 같이 하는 것은 반대해요. 아버지를 옹호 안하는 문제는 그게 왜 국민이 옹호하지 않는 것과...말하자면 아버지가 하신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면 아버지가 살아계실적에 그런 높은 자리를 하지 말았어야 하는거에요.

근데 그 분들이 박대통령을 변론 안 하고 있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박: 글쎄요.

저는 둘 중의 하나로 보는데. 박대통령이 사람을 잘못 쓰셨거나 다른 하나는 국민들이 박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여전하니까 무서워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박: 국민의 반감 때문에 그렇다는 것은 저로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구요.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유신만 해도 아버지 살아계실적에 우리가 유신을 해야 산다 이렇게 외치고 다녔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유신을 옹호 안한다. 그건 거꾸로 이야기하면 그 때 유신을 말하고 다닌 것이 자기 소신도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지 높은 자리를 하니까 그 부귀영화가 탐이 나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은 유신을 이야기해도 한 자리를 한다든지 이득 볼게 없다 그러니까 지금 그러고 있는게 아닌가 이렇게 해석할 수 도 있지요.

아까 혁명공약과 관련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끊임없이 말을 바꾸고 약속을 안 지켜서...

박: 뭘 그렇게 끊임없이 말을 바꿨다고 그러셔요.

이 대한민국 땅에 불신을 심은 박정희 대통령이다 하는 비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 하세요?

박: 아버지가 3선 개헌을 하시면서 3번 대통령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고 해서 반드시 대통령이 된다는 보장은 아니죠. 그런 기회를 한번 더 원하신 거고 판단은 국민이 하는 거 죠. 아버지가 벌여 놓으신 일을, 말하자면 1차 임기때 계획을 세우시고, 2차 임기는 반도 하지 못하고, 다음 정권에 넘겨주기 위해서 준비하고 사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든가 웬만큼 살 만한 나라였다면 그냥 임기 채우고 나가고 하면 다 좋은데, 아버지로서는 목숨걸고서 이 나라에, 일은 벌여 놓았는데 임기는 다가오고 그러니까 국민에게 한번 더 할 수 있는 기회, 이것을 마무리해서 아버지가 마음속에 갖고 계셨던 설계랄까, 그것까지는 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청하신거지, 그렇게 개헌을 했다고 해도 국민이 싫으면 아, 그분은 대통령을 해선 안 되겠다고 하면 안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게 두려워서 선거를 없애고 유신을 한 게 아니겠습니까.

박: 그리고 유신에 대해서도 그때 왜 아버지가 유신을 하실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얘기를 길더라도 좀 할까요? 제가 유신에 대해서는 잡지를 통해 자세하게 얘기를 다 했는데, 방송으로는 처음이니까 간단하게 유신 당시, 이것도 그래요. 5.16과 마찬가지로 시대상황은 얘기가 안되고

시대상황은 우리가 다 기억하니까요. 72년에 성년인 분이 시청자 중에 다수일테니까

그것 은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박: 그래도 잡지에 인터뷰가 나가니까 그것을 너무나 오랫동안 망각했었기 때문에 마치 처음 듣는 얘기같이 생각하는 분들이 많던대요. 제가 안해도 될까요?

아니, 하십시오. 하시는걸 말리는 건 아니고. 하십시오

박: 그러니까, 60년대 2차대전후부터 60년대 말까지는, 다 아시는 얘기지만 세계가 양분화 되어가지고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공산진영과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자유진영, 이렇게 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때는 자기 나라의 이익보다도 자기 진영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할까, 그래서 자기 진영에 어떤 군사분쟁이 있다면 개입해서 구해준다거나 하던 세계 국제 조류 가, 60년대 말부터 실리를 추구하는, 자기나라의 이득을 위해서는 자기나라와 수십년간 친구로써 관계를 맺었던 나라를 하루아침에 배신할 수 있는 그런 국제정세로 변화가 됐죠. 그 과정에서 강대국들이 자신들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벌이는 흥정에서 힘이 약한 약소국은 언 제 자기 나라가 이렇게 팔릴지 저렇게 팔릴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 있게 됐었잖아요.

그럼, 이런 반박도 가능한데요. 61년부터 72년까지 11년을 박대통령이 끌어오셨는데 나라 가 그때도 그렇게 약했다면 11년간 정치를 참으로 잘못하신 것이 아닌가....

박: 그러니까 중간에서 자꾸 말을 끊어서 제가 이걸 쭉 좀..... 나라가 적어도 지금 말씀을 하시니까 얘긴데 5천년의 찌든 가난을 물리치는데 그게 1,2년 안에 되겠어요? 그래도, 60년대는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던 후진국이 1차 5개년 계획을 실천 에 옮겨서 뭔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처음으로 봤던 시기가 아녜요? 또,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는 60년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도 그러셨어요.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 사람이 자신감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해요? 흔히 요즘 경제는 발전 시켰는데 정신은 발전이 안됐다, 정신의 개혁과 발전없이 어떻게 경제가 발전? 저는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68년도라는 해는 아버지로선 잊을 수 없는 해라고 그러셨어요. 왜냐하면 우리 민족이, 아버지를 비롯해서 처음으로 우리도 하면된다. 우리도 이 가난을 몰아내고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을 얻은 해가, 기점이 68년도라고 보신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 자신을 얻은걸 바탕으로 해서 70년도에 조국근대화,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던거죠.

그런데 이제 국민적인 의문은 72년에 하신 유신을 포함해서 왜 5.16 이고, 유신이 계속해 서 박정희 대통령 그분이 끌고 나가야 되느냐. 그게 의문이죠. 국민이 다른 지도자를 원할 수 있었고, 국민이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었던 것인데, 왜 꼭 박정희씨가 계속 하려고 했느냐. 거기에 그분의 비극이 있었지 않을까요?

박: 결국, 그렇게 하다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 개인으로서는 불행, 글쎄요. 불행하시다고 볼 수도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이 태어나서 한번 죽는 건데, 정말 국가를 위해서 자신의 뜻한 바를 펴고 간다면 돌아가실 때 그렇게 돌아 가셨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로서는 소원을 다하고 가신 거니까 반드시 불행했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데

그런데 이제 이런 기억까지 있습니다. 워낙 박대통령에 대해 비판하다 보니까 나온 이야기인진 모르지만 명치유신에서 따가지고 유신이라는 이름을 붙힌 것이 아니냐, 박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를 했기 때문에 이름 자체를 그렇게 했다는 그런 비판도 나옵니다.

박: 유신이란 말은 신라시대 때부터 나오잖아요?

대원군 시절에도 함여 유신이 있었구요. 깊이 연구도 안해보고 우리가 흔히 듣는 것이, 우 리가 근대사에서 듣는게 명치유신이니까 그렇게 따온거 아니냐 이렇게 갖다 붙힌거지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 장교를 하셨고 일본군 장교를 하셨고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가 남로당에도 있으셨다가...

박: 그 남로당은 잘못된 거에요.

유죄를 받은 것은 사실 아닙니까?

박: 예. 그러나 유죄를 받은 거와 실제와 다르다면 그거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억울하신거죠.그건 아버지가 그 때 그런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몇 번 찾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사람의 정체를 모르시고 그런건데 아버지는 그걸 모르시고 연루가 된 억울한 것이죠.

이 점은 어떻습니까? 유신 얘길 한마디 더 하고요. 유신의 아이디어랄까. 요새말로 생각 자체는 누가 하신 겁니까? 박대통령 스스로 입니까? 주변의 어느 분이 아첨을 하기 위해서 한 이야기입니까?

박: 그걸 그렇게 말씀하시면, 벌써 질문부터가 왜곡된 거예요.

편견을 가지고 한 질문일까요?

박: 예, 그럼 유신이라는 걸 질문하시는 분은, 그것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지금 우리가, 유신이 과연 어떤 것이냐 하고 알아보는 과정인데, 아첨을 하기 위해서 그렇다하면은 이것은 나쁘다는건데 그렇게 여쭤보는 이유는 아까 얘기의 중복이지만 이 시점 현재, 유신이 잘됐다고 주장하는 학자나, 당시 국회의원이나, 장관이나 저는 한사람을 보질 못했는데요. 그것은 뭘 말할까요?

박: 그것은 용기를 내지 못하는...

그 용기가 만용 아닐까요? 용기를 낸다면,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오히려 용기 아닐까요?

박: 그럼, 유신을 할 적에는 왜 유신을 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제가 아첨이란 말을 쓴 거죠. 그 사람들이 아첨한 것이란 말을 단정적으로 쓴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박: 저도 대한민국 국민인데, 제가 유신에 대해서 옳다고 그 불가피성을 주장하고 또 그것에 대해서 인터뷰를 한 것이 많은 호응을 받았어요. 그럼 그분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가요? 신문에 이렇게 나는 것, 뭐 유신이 어떻다 하고 비판하는 글을 쓰는 그 사람들만이 지금 국민은 아니잖아요.

네 좋습니다. 그런 분들도 계시는 것으로 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전두환 전대통령을 처음 만나신 건 청와대에서죠. 기억을 하실 수 있는지요.

박: 정확히 언제라고 기억은 안나는데요. 보안사령관으로 부임 전에 청와대 근무시절이예요.

경호실 차장보였던가요?

박:예. 그렇게 기억이 되는데 아버지가 공식행사에 나가신다던가, 무슨 행사에 나가시게 되면 경호실에 근무하니까 자연히 수행을 하게 되는데 그때, 제가 처음 보지 않았나 그렇게 기억이 됩니다.

전두환 전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열 다섯살 아래신데요. 박대통령 17년생이고 전두환씨는 32년생이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전대통령이, 사실 여부는 모르겠구요. 여쭤보는 이유가 그건데요. 박대통령을 아버지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건 사실인가요.

박: 아니요. 전혀.

그렇치 않습니까?그리고 이순자씨를 처음 만난 기억이 나시는지요.

박: 아버지 돌아가신 후 신당동으로 문상차 방문했을 때 그때 처음.

그런데, 5공화국 시절에, 그 두분이나 그 두분의 지시를 받은 그 수하의 인물들이 박근혜 씨나 박대통령 유족의 활동을 박해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풍설도 있는데.

박: 그런 기억은 없구요. 그런 질문을 하시니까 얘긴데, 5공화국이라는 것이 저한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렇게 볼 때 저로선 그 5공화국 시절을 상당히 정말 가슴 아프게 살아왔어요.

왜 그렇죠?

박: 기억을 해도 가슴 아프게 기억이 되고, 왜냐하면 돌아가신 아버지와 또 아버지가 하신 일 에 대해서 너무나 극심하게 매도됐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개인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딸로서 가슴 아픈일이지만 또 우리 국가 전체로 볼때도 그런 매도는 국가에 정신적으로 큰 손해를 입혔다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적어도 60년대 70년대 한국현대사는 누가 뭐래도 외국 사람들이 '한강의 기적'이라고 평가할 만큼 정말 기적에 가까운 그런 경제발전과 말하자면 조국 근대화를 이룬 연도예요. 우리 조상들이 5천년동안 가난하고 싶어서 그렇게 수모 받고 산 것 아니고, 또 우리보다도 좋은 여건을 가진 나라들이 가난하고 싶어서 지금 그렇게 사는게 아니죠. 그만큼 가난을 몰아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데, 그렇다면 오늘날 올림 픽까지 치루게 될 정도로 우리나라가 발전했다는 것은 그 앞서간 세대가 그만큼 뼈를 깎는 노고를 기울였기 때문에 나라가 발전했다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박대통령이 5공화국시절에 일방적으로 매도되었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서러우셨다고 했는데 그 서럽게 만든 분이 전두환씨가 아니냐 하는 질문입니다.

박: 그 당시에 전부를 다 통틀어서죠. 그 시절엔 온통 매도만 됐으니까요. 참 견디기 어려웠던 순간도 많았어요.

지금 이런 TV 회견의 기회도 있고, 또 작년부터 잡지회견도 있고 6공시절의 얘긴데, 6공을 칭찬하란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점에서는 자유로우신지요. 이제는,

박: 네.

아 자유스러우시군요.

박: 그래서 아까 말씀을 드리다 말았는데 개인적으로 말하게 되면 그 시절이 아버지가 그렇게 매도된 것으로 인해서 가슴 아팠지만 우리나라 전체로 볼 때는 정신적으로 많은 손해와 피해를 입혔다, 제가 그렇게 믿는 이유가, 앞서간 세대의 그런 뼈를 깎는 노고 없이는 이런 오늘의 발전이 있을 수가 없는데, 그것을 우리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알려줘야 하거든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게 됐다. 우리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말을 흔히 하는데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경제가 발전했다고 해서 더 좋은 학용품을 쓰는것도 중 요하겠지만 그것 못지않게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가져야 되는건데 정신적인 풍요로움이라는 것은 공장에서 기계같이 찍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것은 역사를 통해서 얻어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앞서간 세대가 이런 노고를 거쳐서 오늘이 있었다 하는 것을 알게 되면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어떤 좋은 얘기보다도 국가에 대 해서 긍지를 갖게 되고, 또 자기도 나라를 위해서 잘해보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고, 이런 것이 전부 풍요로운 자산이 되는건데 그것을 바르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그렇게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을 앗아간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요. 또, 더 나가서 오늘 날 우리가 이런 혼란과 무질서를 겪고 있는데 오늘날 우리사회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원인이 많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한 가지 손꼽을 수 있는 중요한 이유는 그 동안의 역사의 왜곡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간 세대가 전부 다 잘못됐다는데, 후배가 어떻게 선 배를 존경할 수 있겠어요? 나라를 위해서 실컷 일하고서 지금은 오히려 젊은 세대에게 반발 과 멸시를 당하는 것이 그 동안의 사회분위기로 인해서 자초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질문을 좀 드려보죠. 말씀이 기신데 대충 시청자 여러분이 알아 들으셨으리라고 생 각합니다. 충분히 전달이 됐으리라고 믿고. 전두환씨에 대해서 한마디만 더 여쭤볼께요. 전두환씨 부부가 백담사에 가 계신데 전두환 씨의 저 모습을 어떻게 느끼세요.

박: 어떤 면에서요?

어떤 답변도 좋습니다. 느끼신 그대로...

박: 그 동안 청문회를 통해서 쭉 봤지만 청문회에 나온 그런 일들이 없었다면 저런 일도 없었지 않았겠어요.

지금 나이가 웬만큼 드신분은 다 기억하는 장면입니다만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그로부터 5년이상을 박대통령이 현직으로 계셨는데, 그 사건 전후 인간적 면모의 변화는 없었을까요?

박:아버지의 슬픔은 말할 수 없었죠. 그런 가운데서도 아버지는 그런 슬픔을 딛고서 아버지가 머릿속에 계획하신 국가에 대한 설계를 계속하겠다는 결심을 하셨지요.

그럼 말씀이 나온 김에 박 대통령의 유품을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이제 장소를 옮겼는데요. 시청자 여러분께 여기가 어딘지 설명을 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박: 처음에 말씀드렸던 근화원인데요. 점점 잊혀져 가는 우리나라 고유의 예절이라든가, 그런 것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가르 쳐주기 위해서 만든 것인데 기왕이면 그런 교육도 전통적인 한옥안에서 배우면 더욱 뜻이 있지 않을까 해서 지은 겁니다. 그리고 저 앞에 보이는 정자는 목련정이라고 이름을 붙였는 데 어머니가 목련꽃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어머니를 추모하는 뜻에서 목련정이라고 했고, 이 쪽에 있는 별채 이름은 영혜루라고 했는데 그것의 [영]자도 어머니 성함에서 딴겁니다.

지금 육영수 여사 말씀을 하셨는데 벌써 불의의 저격사건으로 돌아가신지 15년이 되지 않습니까? 목련꽃 얘기를 하시니까 더 생각이 나는데 박정희 대통령 그분에 대해서는 그제 나 이제나 많은 비판도 있는데 육영수 여사는 참으로 많은 분의 많은 사랑을 받으신 분인데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박: 어머니의 좌우명이랄까 그것이, 인내, 노력, 성실 그렇게 어머니가 적어놓으신 글도 있어 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군인이셨을때는 군인의 아내로서, 또 대통령이 되신 후에는 대통령의 아내로서, 어머니가 내조로써 하셔야 될 일을 성실한 마음으로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정성 껏 해오셨기 때문에 그런 진실된 뜻이 국민들께 전달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5.16얘기를 다시 제가 여쭤보는건 아니고 이런걸 좀 말씀드리고 싶어요. 다른 대통령 따님과는 달리 박근혜씨께서는 5년동안 퍼스트 레이디 역할도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시고 난 뒤, 그랬기 때문에 스스로 공부도 많이 하셨고 그래서 또 인터뷰에서 오늘 제가 외람스럽지만 많은 정치얘기를 가지고 논의를 하는데, 아까 정원에서 얘기가 나왔었습니다만 박대통령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그림이나 일기장을 시청자 여러분께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박: 네, 여기 좀 갖고 나왔는데요. 우선 이것은, 아버지가 메모를 하신게 있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들여다보면 정말 아버지는 완전히 60년대 70년대에 그냥 어떻하면 나라를 빨리 발전시킬까 거기에 모든 것을 기울이셨다는 것이 절절히 나타나요. 그러니까 한해 대책을 강구하시면서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으시고 일단계는 어디다, 이단계는 어디다 하고, 또 예를 들면 농업정책을 구상하시면서 소 한 마리 값이 충청북도는 몇 십만원이고, 어디는 몇십만원이고, 양송이는 평당 가격이 어떻고, 그런 것을 전부 이렇게 실제 계산을 하시고 수익이 얼마, 투자가 얼마고 하는 기록이 나 타나지요. 심지어 아버지는 나라를 빨리 발전시켜야하는데 혹한기 겨울에는 산업발달에 지장이 많잖아요, 날씨 때문에. 그 기간까지도 아까우셔 가지고 그래서 쭉 매년 산업개발에 지장을 줄 수 있는 기간이 언제부터 언제까진가, 이것을 유심히 보셨다가 어떤 때는 12월초부터 아주 추워질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12월말까지도 따뜻한 해가 있고 또 3월도 그렇고, 그래서 결국 우리나라 산업개발에 지장을 줄 수 있는 기간은 12월중순부터 3월초까지다, 그런 결론도 내리시고 말하자면 그런 발자취가 여기 담겨져 있습니다.

아주 꼼꼼하시고 너무나 많은 일을 혼자 다 하시려고 한건 아닌가 모르겠어요?

박: 그만큼 절박했으니까요, 우리나라 상태가. 그리고 또 이런 경제분야 뿐만 아니라 예를 들 면, 선비가 되려면 가난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든지, 날씨가 차가와 진 후에야 송백이 시들 지 않음을 안다, 또는 주역의 최고 이상은 지천태, 그러니까 하늘이 땅에 봉사할 때 세상이 편안해진다, 하는 그런 글들도 많이 적어놓으셨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좌우명 또는 마음의 양식으로 삼으신 그런 자취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기, 많이 공개가 됐었지요. 어머니를 추모하시는 시라든가 74년도부터 돌 아가실 때까지 구구절절이 어머니를 그리워하신 글들이 가득 담겨져 있고, 물론 국가적인 일에 대해서도 많이쓰셨지만.

일기를 매일 쓰신건 아니시지요?

박: 아주 바쁘실 때는 못쓰시고요. 그리고 이것은 아버지가 그림에 취미가 있으셔서...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강아지 스피츠가 있었거든요. 방울이가 있었는데 방울이도 스케치 해놓으시고 이런 꽃들도 그리시고 그리고 정물화라든가, 이런 그림은 참 귀엽죠? 색칠까지 해놓으셨어요.

그림만 그리신게 아니라 풍금이나 피아노도 자주 치셨다고요.

박: 네, 퉁소도 자주 부시고요 시조도 지으시고, 시도 지으시고, 스포츠도 여러 가지를 즐기셨죠. 그리고 이것은 수채화, 청와대에 가을에 국화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그걸 보고 그리셨구요. 이것은 9월 30일이 음력 으로 아버지 생신이죠. 양력으로는 11월 14일인데 그때 고향을 생각하시면서 상상해서 그리 신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유화를 시간이 있을 때 틈틈히 그리셨는데 이것은 여름 동해안에 출장갔을 때 보신 것을 청와대에 오셔서 그리신 것 같아요. 바다가 보이고. 이것은 그림이 아니고 어머니가 시집오시기 전에 수를 놓으신 건데 틀이 많이 낡았거든요. 그래서 아버지가 이 새틀로 고치셨어요. 그리고 이것을 청와대 이층 가속실에다 걸어놓으시 고 '여기 어머니 손의 바늘이 수천번도 더 들락날락 했을게 아니겠느냐'고 어머니를 그리워 하면서 한참을 들여다보시곤 하셨던 거예요.

어머님 생전의 얘길 한 말씀만 더 여쭤 보면요. 살아 계실 때 정치얘기를 부부간이라고 그럴까 이렇게 나누신 일이 자주 계신지요?

박: 뭐, 정치, 사회문제 여러 분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시는 것을 제가 많이 봤어요. 식사 시 간에도 화제가 그렇게 돌아가면 얘기를 나누시곤 했는데, 물론, 어머니도 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대해서 많은 이해를 하시는 편이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철저히 국민 편에 서셔서 그건 이렇지 않느냐고 하시고, 아버지는 그게 그렇치 않고 이렇게, 하시면서 설명을 하시게 되니 까, 아버지, 어머니께서 이렇게 대화 나누시는 것을 보면 꼭 축소된 대한민국 같다고요. 아버지는 정부고 어머니는 국민이고 그러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두 분이 쳐다보고 막 웃으시고 그러신 적이 있는데...

그 5년동안 육영수 여사가 안 계신 박대통령 말년에는 정치얘기를 두뿐이, 박대통령과 박 근혜씨가 많이 나누셨는지요?

박: 아버지가 많이 얘기해 주셨어요. 특히 식사시간 같은 때 아침, 점심, 이런 때 아버지하고 단둘이서 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아까 그 후임자 문제도 그렇고, 또 아침에 신문을 펼치면 거기에 사건이 나면 자연히 화제가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에 대해서 아버지는 이렇게 생각한다. 또, 어떤 사설이 잘 된게 있으면 이거 한번 읽어봐라 하고 건네주기도 하시고, 또 제가 듣 고온것에 대해서 어떻게 된 건가 아버지께 여쭤보면 아버지는 그것에 대해 설명도 해주시 고, 그래서 상당히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해주고 싶으신 말이 있었다면 뭘까요?

박: 결국 그거지요.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김재규,차지철)사퇴를 시켜야 된다. 그것을 다 건의문등을 다 읽어드리고 그랬기 때문에 비록 돌아가시긴 했지만 그것도 다 국운이고 운명이고.

이제 어차피 국민들이 궁금해하시는 몇 가지 큰 사건에 대해서, 일부 보도도 되고 안된 것도 있지만 여쭤보겠습니다. 박대통령 시해사건, 그러니까 10.26바로 일주일전 내지는 열흘 전, 정확한 날짜는 밝혀지지 않습니다만 잘 알려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이 빠리에서 일어났죠? 그걸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누구의 소행같습니까.

박: 저는 그걸 아버지께 들어서 알고 있는데요. 그것도 아침에 실종사건이 신문에 보도되니까 아버지께서 그것을 보시고 저한테 얘기를 해주셨어요. 아버지는 그렇게 추측을 하신거죠. 그 김형욱씨가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은 말하자면,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을 때 그 직위에서 원한을 산 일도 있었을 것이고, 또 직권을 남용해서 비리도 있었을 것 아니겠느냐, 그런데,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는 그래도 신분 보장이 됐지만 국회의원 공천에서 떨어지니까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미국으로 달아난 것 같다. 그런데, 거기 가서 북쪽하고 연결이 되어서 돈도 많이 받고, 또 자기를 합리화하는 글도 쓸 겸해서 그런, 비난하는 글을 썼는데, 북한쪽에서는 글도 썼고 그런 글을 쓰게 한 후에는 자기들의 목적은 달성됐고 또 잘못하면 탄로가 나니까 그 목적을 이룬 후에는 어떻게 한거 아니겠느냐 이렇게 아버지가 추측을 하셨는데, 아버지의 그런 추측은 단순히 아버지 혼자 상상해서 말씀 하시는게 아니고 대통령직에 계시기 때문에 여러 군데서 그 동안에 그런 정보를 들으신 걸 가지고 이렇게 추측을 해서 판단을 내리신 것 같았어요.

근데, 이제 10년이 지났는데 정확하게는 9년반 정도. 이쯤 되면 만약에 김형욱 전 중앙정 보부장을 북한에서 납치했더라면 자기네들이 북한에서 김형욱씨를 사주해서 대남방송을 시 킨다던가, 또 어디에서 죽였다면 우리 정보부의 정보망도 상당히 막강해서 뭔가 드러났을텐 데 아무것도 안 드러나고 있거든요. 그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 드러나는 건 몇 십년 후에도 드러나는 거구, 하여튼 아버지로서는 아버지가 들으신 정보에 근거해서 그렇게 판단을 내리고 계셨거든요. 저는 또 순전히 아버지 말씀을 듣고 그렇게 알고 있는 거구요.

이 점은 어떤가요. 이런 풍설은 들어보셨는지요? 국민들 사이에 바로 김형욱씨를 한국중앙정보부가 바로 박정희 대통령 지시하에 파리에서 납치해 가지고서 청와대 지하실에서 김재규 당시 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이 동석한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 스스로 또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사살했다. 이런 풍설을 들어보셨는지요.

박: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그 비슷한 얘기는 들었는데요. 아니 거짓말을 꾸며 낼래도 좀 비슷하게 만들어내야지, 그렇게 터무니없이, 그건 아버지를 너무 모르고 하는 얘기예요. 아버지가 얼마나 인명을 중시 하셨는데요. 저는 5.16도 무혈혁명이라는 것을 항상 다행이면서도 아버지다운 그걸로 생각하는 데,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인명을 가볍게 보시고 할 분은 절대 아니예요.

이런 얘기는 들어 보셨는지요. 김재규 정보부장이 10.26을 일으킨 것도 박정희 대통령 밑 에서 6년 10개월 동안 충성을 다한 김형욱의 최후를 보고 자기대로 하나의 동기가 됐다, 그 런 범행을 한 것이. 이런 말씀도 들어 보셨는지요?

박: 그건 지금 처음 듣는데요. 그런 거짓말을 바탕으로 해서 얘기가 되면 그 방향으로 쭉 한도없이 나가겠지요. 근본이 틀리니까 얘기가 안돼요.

김대중 납치사건은 어떤가요. 일본에서의 납치사건

박: 네. 그것도 그땐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땐데, 아침에 그게 신문에 났거든요. 그러니까 아버지하고 어머니 두 분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서로 의아하게 놀라셨고, 두 분이 이렇게 저렇게 말씀을 나누시는 가운데 결론이라기보다도 추측으로 내리시는 판단이, 이것은 아버지가 시키지 않으셨으니까 감히 어떻게 했을 것은 상상도 안 되고 북한에 서 그렇게 조작을 해서 한국정부를 궁지에 몰려고 이런 식으로 한 게 아니겠느냐. 자세한 것을 알아봐야 되겠다고 하시며 지하 서재로 내려가셨죠.

그런데, 김형욱 정보부장 경우는 박대통령 자신이 곧 돌아가셨으니까 어떻게 사건을 규명 하거나 해명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김대중 대통령 후보 납치사건은 충분히 그 진상을 밝히고 관련자를 처벌할 수 있었는데 그런 조치를 특히 형사적인 면에서 안하셨는데, 우리 나라에 숱한 정치적 의혹내지는 미궁사건이 있어 왔잖습니까? 이게 또 하나의 미궁사건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대통령이 그렇게 덮어 버린게 옳다고 생각하세요?

박: 제 짐작엔 이게 일본이 관련이 돼 있어가지고 그걸 공개적으로 말을 하면 국가간의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 때문에 냉가슴 앓듯이 그렇게 된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두려워서 밝힐 걸 밝혔다는 말씀인지요? 아니면 제가 선뜻 이해가 안 되는데요. 밝혔어야 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박:글쎄, 그때 딱 그렇게 돼 버렸으면 이렇게 나중에 이런저런 얘기가 안 되었겠지요.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그 방법이 오히려 좋지 않았나, 그렇게도 생각이 되는데... 그 당시에 아버지로서는 국제간에 문제라든가 또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던 그런 문제가 또 있지 않았나 하는 짐작도 됩니다.

요즘 그럼 많이 나오는 보도대로 그러면 이후락 당시 정보부장이 독단적으로 한 것이라고 믿으세요? 누군가 했을테니가. 북한이 한 것 같지는 않고. 그럼 누가 했습니까?

박: 뭐 다 알고 있잖아요. 이젠 비밀도 아닌데요.

인터뷰 초반부터 다 안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말씀을 하셔서 저는 정작 모르겠는데.

뭐 좋습니다. 정인숙 사건, 저는 별로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긴데, 시청자 여러분께서 워낙 궁금해하실 것도 같기도 해서. 어떻습니까? 이거는 여러 잡지에 해명하시기를 박대통령이 문제의 정인숙이란 여인이 낳은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믿으시는지요?

박: 그건 뭐 하도 여러번 잡지에 해가지고 좋지도 않은 얘기를 또 한다는 것은.... 그런데 질문을 하시니까 답을 드리겠는데요. 그것은 아버지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건이예요. 한마디로. 그런데 돌아가신 후에 완전히 이야기가 조작이 돼가지고 돌아가셔서 말씀 못하신다고 해서 정말 너무나 끔찍한 누명을 쓰신 거죠. 그래서 그것도 잡지에 얘기가 된 거지만 어머니께로부터 얘기를 들었어요. 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최근에도 그 일을 깊이 담당했던 분한테도 직접 얘기를 들었구요. 그게 어머니 얘기하고 일치가 되는데, 그런 분들이 누구라고 밝히는 것은 그분들하고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사건이 났을 때 그 사건에 직접 관여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었는데, 아버지께 사표를 써 가지고 와서 그 살인사건에 대해 해명을 했다고 해요. 그 여자하고 관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살인사건 하고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정말 억울하다는 얘기를 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그때 검찰총장을 시켜서 그 사건을 조사시키신거죠. 그래서 결국은 그 오빠가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다 나왔잖아요.

네. 정종국씨죠. 누구의 아이다 그게 박정희의 아이냐 아니다 그것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또 다른 사람, 그 분도 박정희 시절 고위 관리죠. 그런 것이 박정희 정권은 왜 이렇게 도덕적으로 문란하냐 이런 말이 나오고 느껴지는데.

박: 그러니까 아버지를 매도하고 깎아내리기 위해서 아주 부도덕하다, 그런 걸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잘 들어맞는 이야기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돌아가신 분이 무슨 말씀을 하실수 있겠는가 그래서 많은 누명을 썼죠. 제가 여쭤보는 것은 생존시에도 참으로 그런 말이 많았거든요?

박: 생존시에는 그런 말이 없었어요.

아마 청와대에 계셔서 그런 말을 들어볼 기회가 없으셨나본데

박: 오히려 돌아가시고 몇 년 뒤부터 그런 책이 나오고 그랬지.

그리고 전두환 전대통령의 경우엔 하도 많은 금전적인 스캔들이 있어서 뭐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이 오히려 우스꽝스러울 정도인지 모르겠는데 박대통령이 돌아가신 직후 그리고 이 제 전대통령이 많은 스캔들에 휘몰려 있을 때 박대통령이 액수까지 나왔었죠? 뭐 부정확한 숫자겠지만 22억불이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정확도 여부는. 스위스 은행에 예금을 해 놓으시고 돌아가셨다, 이런 말이 있었는데 뭐 해명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박: 해명이고 뭐고 그것도 말이 안돼요. 정말 너무 기가 막힌 조작이에요. 도대체 스위스 은행하고 아버지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이 자리가 박대통령을 나무라는 자리는 절대 아니겠습니다마는, 따님께서 아버님의 많은 업적에 대해 말씀을 하고 계시니까, 박대통령이 요즘도 있는 TK사단이란 말, 바꿔 이야기해서 이 나라의 그렇치 않아도 남북으로 갈렸는데 동서로 또 가르도록 나쁜 지방색을 심어놓은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는 비판이 있는데 어떻게 반박하실 수 있는지요?

박: 아버지가... 물론...왜 미국대통령도 그렇잖아요. 뭐라고 그러죠? 조지아?

예, 조지아 마피아.

박: 예. 그런식으로 했듯이 어느나라 대통령이건 집권자간에, 일단 대통령이 되어서 일을 할땐 혼자 일을 할 수 없으니까 주위에 많은 분들이 돕게돼죠. 그럴 때, 대통령도 인간이니까 우선 아는 사람들을 처음에는 쓰게 되겠죠. 그렇잖아요? 그러나 자꾸 경륜을 쌓아가면서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고 그러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아버지도 군 출신이시기 때문에 그때부터 알았던 분을 처음에는 가까이 하셨지만 그것을 의도적으로 딱 여기는 아니고, 여기는 내 사람으로 쓰고, 그런 분은 아니에요.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미국의 카터 대통령때 조지아 마피아, 또 레이건 대통령때 캘리포니아 마피아는 4년 또는 8년이 지나면 선거에 의해 바뀌고 물러가니까 문제 가 적은데, 우리는 한번 잡으면 나가지도 않고 철옹성을 쌓으니까 거기서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박: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인재가 발굴 기용됐어요? 그게 뭐 어느 한 구역에서만 나오진 않았잖아요? 자꾸 아버지가 지방색을 없애자고 얘기를 하면서 아버지가 지방색을 심으셨다, 이렇게 자꾸 말하는 것부터가 지방색을 심화시키는 얘기라고 저는 생각해요. 예를 들면 선거때 지방색을 없앱시다. 어떤 정치가가 나와서 그런 얘길 하고는 지방에 가서는 여러분은 내가 여기 출신이니까 나를 뽑아야 합니다, 하는 식으로 얘기를 하고 다시 중앙에 와서는 아, 이 지방색 때문에 큰일났다고 이렇게 말한다면 그건 위선이죠.

박대통령이 시키셨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고위공직자가 선거유세에서 그랬거든요.천년만에 신라에서 왕이 났다.그러면서 참으로 지방색을 강조하신 분이 계신데. 결과적으로 그런분의 잘못을 깨우치고 말리지 않은 그런 허물은 면할 수 없지 않느냐?

박: 글쎄 뭐.(헛웃음)

또, 이런 점은 어떻습니까? 요즘, 통일논의가 한창입니다만은 72년에 7·4공동성명을 하시고 바로 그해 유신을 했지 않습니까? 10월 17일 불과 석달후에. 그래서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자기의 직권연장에 이용한 나쁜 선례를 남겼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 어떻게 반박하실 수 있겠는지요?

박: 그게 바로 역사의 왜곡이예요. 우리가 일본 사람한테 왜 남의 나라 역사를 왜곡하느냐고 우리가 데모도 하고 그랬는데, 물론 일본도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면 안돼지만,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역사를 왜곡하면 안돼요. 왜,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정말 욕을 먹고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한 결정을 직권을 연장하기 위해서 안보를 이용했다, 그렇게 말을 갖다 붙여서 자라나는 세대도 전부 그렇게 알아듣도록 한다는 것, 이건 얼마나 큰 왜곡이에요?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역사가 왜곡이 된다는 건, 남에 의해 왜곡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집권연장을 위해서 안보를 이용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때 그런 상황이었는가 하는걸 잘 연구를 해보고서 얘기를 해야지. 그냥 그렇게 갖다 붙여서 얘기를 한다는 건 자라나는 청소년과 우리 역사에 죄를 짓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이젠, 초점을 개인, 박근혜씨로 돌려가지고요. 지금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많은 국민들, 얼마나 많은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마는 박대통령 또는 육영수 여사를 추모하고, 또 추모 사업회의 일도 하시는데 정당으로부터 정계에 진출하라고 권유를 받으시건, 또 스스로 정치에 참여하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외국에는 정치인의 자녀가 더 잘아시겠지만 많이 정치 일선에 나서시는데, 그런 계획이 없으신지요?

박: 글쎄, 지금은 추모사업회에서 제가 기념관 짓는 걸 일차적인 목표로 했지만 그것과 동시에 그것보다 앞서서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런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 동안 제가 다른 인터뷰에도 쭉 응했던 것이고요. 그런데 열중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뭐, 느닷없이 정치에 진출할거다, 안할거다, 그런 얘기부터가 어울리지가 않는 것 같애요.

박대통령의 유지를 이어받는다고 스스로 말씀하신 신민주공화당에서 어떤 권유를 받으신 적이 없습니까?

박:예. 없어요.

그분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분들이 유지를 이어받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박: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으려면 아주, 딱 적극적으로 이어받고 그 유지를 이어받을 생각이 없으면 그냥 독자적으로 나가고 그러는거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어느 점에서 그럴까요?

박: 그러니까 만약에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는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해요. 지금, 그 동안 매도당하고 있던 유신, 5·16 거기에 대해서 나는 이런 이런 소신을 가지고 참여했었다. 그런데 그게 뭐가 잘못됐느냐, 딱딱! 정말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했던 사람이라면 그것을 얘기할 수 있어야 해요. 어떤 비난을 당장은 받는다 하더라도. 그래서 그것을 잘 몰랐던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하고 설득시킬 수 있어야 되고, 그런게 정치죠!

가장으로서의 박정희씨를 어떻게 평점하시겠습니까?

박: 아버지요? 저는 아버지에 대해선 그리운 마음으로 머리끝까지 차있고, 또 어떻게 평점을 내리고 말고 하는 것보다도 아유, 이렇게 억울하게 그 동안 당하셨는데 이걸 어떻게 벗겨 드려야 돼나 그런 생각으로 꽉 차있기 때문에 저한테 그런 걸 물으신다는게…

혹시 말이죠. 아버님이나 어머님이 두분 중에 한분이라도 살아계시면, 추모사업을 하는 것도 감사히 생각하겠지만, 살아계신다면 결혼을 해서 한 가정을 이루고 그분들에겐 외손자, 외손녀가 되겠죠. 한국적 해석인진 모르겠지만, 이런 생활하시길 원하진 않으실까요? 또 그런 계획은 없으신지.

박: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물론 그렇게 바라셨을 것 같아요. 그건 부모님으로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시잖겠어요? 그런데, 이제 돌아가셨으니까 저로서는 만약에 시대가 이렇지 않았으면 또 제 생각이 달랐을지 모르겠는데 이런 시절을 살다보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님의 뜻을, 컴컴하게 됐던 것을 잘 벗겨서 바르게 빛내드려야겠다 하는 그런 생각, 그걸로 모든 것을 바쳐도 충분히 보람이 있고 또 다른 걸 할 마음의 여지도 없어요.

그걸 병행하실 수 있으면 좋겠는데

박: 그리고 또 사람이, 보통 사람들이 다 걷는 평범한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그런 얘기도 제가 소설에서 본 기억이 나지만 그렇겠죠. 대부분 평범한 길을 가는 것이 행복하겠지만, 또 결혼 안한다고 해서 그렇게 큰일 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육여사 생존시는 약혼설 같은 것이 시중에 돌아다니고 그랬죠? 그게 사실이었습니까?

박: 전혀. 전혀.그건 어머니도 너무 기가 막히셔서 참. …

그러면 육여사 서거하신 후에 박대통령 말년에 결혼을 강력히 권고하지 않으셨나요? 아버지 입장에서.

박: 아버지는 마음속으로는 제 나이도 있고 하니까 어떻게 결혼을 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부담은 있으셨던 것 같아요, 분명히. 그런데 아버지가 저를 굉장히 필요로 하셨다는 것, 그것을 제가 상당히 뭐랄까 보람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 그때 어느 대통령이 방문해서 저를 초대해 잘 대접하겠다고, 요청을 해왔거든요. 그렇게 몇 차례 얘기하다가 가겠다는 답이 없으니까 외무부 장관을 통해서 정식으로 아버지께 요청을 했는데, 아버지께서 초청은 고맙지만 제가 없으면 하루라도 내가 불편해서 살 수가 없다고 그 점을 양지해 달라고 그렇게 거절을 하신 적이 있거든요. 또,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에 아버지가 아침에 진지를 잡수시다가 확 울으셨어요. 그러다가 울음을 멈추시더니 ‘정말 근혜가 없으면 내가 못 살거 같애’ 그렇게 하시면서 아마 어머니께서 (약간 눈물지음)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려고 너를 두었나 보다고 그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거든요. 제가 5년동안 아버지 곁에서 노력한 것도 다른 무엇보다 아버지가, 비록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외롭지 않으시다는 것, 말하자면, 어머니가 남기신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 노력한거나 마찬가지죠. 그 시절이.

이왕 아버님을 위해서 말씀을 쭉 하셨는데, 오늘 제가 여쭤본 얘기중에 꼭 하시고 싶은 말 씀이 있으면 해주시죠. 시간이 많지 않은데.

박: 5·16이 가까웠기 때문에 이 인터뷰가 된 것이므로 5·16에 대해 한마디를 더 하자면 4· 19 의거는 말하자면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서 희생을 무릎 쓰고 일어난 혁명인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일어난 5·16혁명도 그런 의미에서 4·19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 저는 그렇게 보구요. 또 5·16이 있었기 때문에 4·19때 희생된 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목숨까지 버렸는데 4·19후 그 혼란의 와중에서 만약 우리나라가 공산당의 밥이 됐다면 그 희생이 무슨 가치가 있어요.

또 더 나아가서 3·1운동도, 6·25사변도, 그때 많은 우리 선조가, 앞서간 분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희생을,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내놓으셨는데 그것도 5·16때 나라가 공산당한테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희생이 값진거고 헛되지 않은거지, 만약에 나라가 여차직했다 하면 그 희생이 다 헛된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전 그런 의미에서 5·16을 생각하고 싶구요. 마지막으로 아까 유신에 대한 얘기가 중간에 끊어져서 말을 못했는데 특히 유신과 자주국방은 뗄레야 뗄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그 기간 안에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가 유신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또 아버지가 생전에 유비무환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아버지의 그 유비무환 정신이 이 자주국방에서와 같이 잘 나타날 수가 없어요.

뭐냐하면 우리가 그 동안 몇 십년동안 미국에 의존해서 국방을 했는데, 나라를 지켜왔 는데, 그 동안 미국이 우리의 국방을 도와준 것은 참 고마운 일이지만 미국뿐 아니라 그 어 떤 나라에 대해서도 우리가 스스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어떤 나라에 의존해서 지켜야 한 다고 할 때 그 서러움, 그 허망함이라는건 아버지 시절에 있었던 일로 잘 나타난다고 생각 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65년도에 아버지와 존슨 대통령이 월남 파병문제에 대해서 협상 을 하시고서 곧 이어서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미국대사로 와있던 브라운씨의 이름을 따서 브라운 각서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미국으로부터 단단히 약속을 받은 게 있어요. 그것은 한 국군을 현대화시키겠다는 것, 또 하나는 한국과 사전협의 없이 절대 미군을 뽑아가지 않 겠다는 것,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4년후에 닉슨 대통령이 당선되어서 그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자 72년까지 뽑아가겠다, 이렇게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그때는 어떤 협상도 소용이 없었지요.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뽑아가는 판이었으까. 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군대의 사정을 보게되면 그 당시 미국의회 청문회에서도 다 증언이 되었던 얘긴데 그때 우리나라의 군장비가 6·25 당시때 것, 2차대전때 것, 이런 것이 섞여 가지고 완전히 고물부대라는 거죠. 그런 것을 미 국에서 뻔히 알면서도 그냥 그 정책에 의거해서 그대로 뽑아가겠다는 것이 그 당시 우리나 라로선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는지 몰라요. 1대 1로 대결해도 힘든, 우리가 그땐 승산이 없던 때였죠. 그런데 북한은 그때 중공과 소련의 비호를 받고 있었잖아요. 그리고 대통령이 그 다음에 포드 대통령으로 바뀌니까 더 이상 추가 철군은 하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을 했는데 , 몇 년 못가서 카터가 당선되니까 이번에는 또 철군을 하겠다고 강력하게 나왔죠. 그러니까 우리나라 국민으로서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이 남에게 의존해서 국방을 하게 될 적에는 그쪽의 정책에 따라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변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아버지와 유비무환 말씀을 아까 드렸지만, 71년도에 닉슨 대통령이 여기서 7사단을 뽑아갈 때 잔여 2사단에 대해서 언제 뽑아간다는 언질을 미국에서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미국에게 약속받은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이 끊나면 반드시 잔여부대에 대해서도 얘기가 있을거 다, 그때, 미리 짐작을 하시고서 71년부터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 굉장히 서두르셨어요. 그러나 그 당시의 그런 방만한 체제를 갖고는 빠른 시일내에 방위산업과 자주국방을 이 룰 수 없다고 판단하셔 가지고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셨죠. 72년도에. 그것이 유신이죠. 그리고 73년도에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약속 받은 한국군 현대화 5개년 계획이 부족해서 거기에 우리 자체 전력증강 계획을 추가시키셨고, 75년도에는 우리나라의 국방비로는 도저 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방위세를 신설하셨어요. 그래서 75년까지 그렇게 하신 후에 아버지 계획은 1980년도까지는 자주국방을 완전히 이루 어서 1대 1로 북한하고 대결할 때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그런 체제를 갖출 모든 계획을 세우셨고 또 경제면에 있어서는 4차 5개년 계획이 1981년도에 끝나는데 그것도 1년 앞당겨서 1980년도까지 4차 5개년 계획을 마무리 지어 가지고 그때까지 자립경제 자주국방을 완전히 이루시겠다는 것이었어요. 아버지 말씀이 그때부터 즉 71년부터 그렇게 자주국방을 위해서 미리미리 대비했기에 망정이지, 80년도까지 자주국방을 이루겠다는 계획이 우연히도 카터 대통령이 4, 5년 후에 미군을 마저 모두 철수시키겠다는 그 연도하고 우연히도 맞아 떨어 져서 만약에 미리 그런 대비를 안했다면 카터 대통령의 그런 정책이 나왔을 때 상당히 당황했을 거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유신을 통해 북한보다 10년이나 뒤진 우리나라의 병기생산을 자체적으로, 독자적으로 생산해서 자주국방을 달성하려고 하셨던 것이고, 그런 계획이 차질없이 수행되려면 사회적으로 안정이 유지되어야하고, 사회적인 안정이 유지되려면 강력한 지도체제가 불가피했기 때문에 유신을 통해 그것을 이루려고 하셨던 것으로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하나하나 반박은 안하겠습니다. 제가 박대통령을 히틀러와 비교하는 건 전혀 아니지만 그런 이야기가 있잖습니까? 히틀러도 자기 나름대로는 애국을 해서 히틀러도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 에바 브라운의 눈에는 참으로 훌륭하게 비쳐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과연 박대통령의 모습이 시청자에게는 어떻게 비쳐질지 제가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박: 히틀러와 비교한다는건.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그러나 박 대통령이 성취한 많은 공이 있더라도 그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있던 것은 우리가 잊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이제 장시간 시청을 해주신 MBC 시청자 여러분께 한 말씀 해주시죠.

박: 제가 심혈을 기울여서 하고 있는 것이 부모님 기념사업이거든요. 그 기념사업회에 부모님을 추모하시는 많은 분들의 따뜻한 성원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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