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의 배신① 사라진 자살보험금 100억...약관의 마술

2018년 03월 20일 21시 37분

2006년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맏이네 집에 가서 죽겠다'던 어머니의 말씀은 그저 빈말이라 믿었다. 11년이 지난 지금도 이민호(가명) 씨는 그 말을 곱씹고 곱씹는다.

불행은 겹쳐서 왔다. 이듬해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석달동안 사경을 헤맸다. 무릎에 후유증이 남았지만 보상은 일절 받지 못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서명한 보험사 서류 때문이었다.

마음을 추스려 회사에 복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전같지 않았다. 일없이 겉돌다 결국 해고 통보를 받았다. 임원이 된 30년지기를 찾아가 하소연했지만 소용없었다. 부당해고 소송을 했지만 씁쓸한 패소 소식만 전해졌다.

보험은 작지만 큰 위안이었다. 2002년 어머니 명의로 우체국보험 재해안심만기보험에 가입했다. 언젠간 버팀목이 되리라 철썩같이 믿으며 영업맨의 어려운 살림에 매달 16,300원을 쪼갰다.

하지만 손사래치는 것은 세상이나 보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자살 사망은 보험금을 받을 수 없다기에 하릴없이 걸음을 돌렸다. 보험 약관에 분명히 자살 사망자에게도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몇 년 뒤 자살 사망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는 TV뉴스를 보고 다시 보험사를 찾았지만 이번엔 청구할 수 있는 시한을 지났다고 했다. 따지고 또 따졌지만 소용이 없었다. 직원은 차라리 소송을 하라고 권했다. 결국 이씨는 보험금을 포기했다. 세상사의 비정함은 이미 알만큼 알고 있었다.

2017년 TV에선 또한번 자살보험금 얘기가 나왔다. 혹시나하는 마음에 보험사에 연락했다. 이번엔 보험금이 나온다고 말했다. 휴일재해사망보험금 4883만9940원, 지연이자 726만5740원. 큰돈을 보고 확약서에 서명했다. 꺼림칙했지만 이씨는 지쳐있었다.

확약서의 정확한 의미를 안 것은 나중이었다. 11년치 이자 중 2년치만 지급할테니 더이상 민형사상 책임은 따지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확인해보니 민간 보험사들은 이미 2016년부터 자살보험금의 지연이자 전액을 지급하고 있었다.

이씨는 나머지 지연이자를 달라며 다시 보험사의 문턱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소비자 단체에 조언을 구하고, 그간 보험사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차근차근 공부하고 있다.

보험사는 완강하다. 확약서까지 받은 상황이기 때문에 남은 지연이자는 지급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취재진은 우체국보험을 운영하는 우정사업본부 측에 지연이자 과소지급의 이유를 물었다. 우정본부는 자살보험금에 대해 '고객과의 신뢰를 고려한다는 취지로 지급하고 있을 뿐, 지급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고 못박았다. 확약서를 요구한 것은 '소모적 논쟁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우정사업본부 측은 지연이자를 2년치만 지급한 것은 '소멸시효 이후에는 지급이자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약관에 따른 것이라고 답했다. 보험금을 과도하게 지급하다보면 결과적으로 보험료가 인상되기 때문에 다수의 선량한 고객 권익이 침해당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혔다.

약관대로? 보험사 마음대로!

보험사의 설명은 타당할까. 적어도 지난 16년간 '자살보험금' 을 놓고 다퉈온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살보험금 미지급은 이씨만 겪은 일이 아니다. '재해사망특약' 상품이 처음 선보인 2001년부터 보험사들이 관련 약관을 대대적으로 손 본 2010년까지 자살보험금 지급이 명시된 약관을 가진 보험 계약 건은 280만 건이 넘는다. 2016년 금감원이 발표한 미지급 총액 규모는 2456억 원에 이른다.

쟁점은 재해사망특약의 내용이었다. 당시 표준약관과 대부분의 재해사망특약, 재해사망보험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명시돼 있었다.

보험금을 지급하지 아니하는 보험사고
… 보험대상자가 정신질환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해친 사실이 증명된 경우와 계약의 보장개시일부터 2년이 경과된 후에 자살하거나 자신을 해침으로써 장해분류표중 동일한 재해로 여러 신체부위의 합산 장해지급률이 80% 이상인 장해상태가 되었을 경우에는 그러지 아니합니다.

일정 면책기간(2년)이 지나면 자살 사망자에 대해서도 특약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보험사들은 해당 특약의 내용이 단순 오기이며, 자살 사망자는 재해사망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비자들에게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2016년 5월 대법원은 '약관대로 보험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리며 소비자의 손을 들었다. 당시 소비자 측 변호인을 맡았던 송모충 변호사는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대법원의 판시 사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보험사(교보생명, 법률대리인 김앤장) 측은 민법상 '오표시 무효의 원칙'을 차용해 주장했다. 계약 당사자들이 오표시라는 것을 아는 상태라면 그 내용은 무효라는 주장이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논리를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평균 고객의 이해 가능성'을 들어가며 책임개시일 2년 후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명문 규정이 있는데 이것을 '의미없는 규정'이라고 말할 보험당사자는 없다고 판단했다. 설령 그것이 아니라하더라도 약관의 작성자인 보험회사가 책임진다는 약관 규제법상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을 따르다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시사항이다.

금융감독원은 끝까지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보험사들에 중징계를 내렸다. 당시 금감원은 보험사가 소멸시효(2년)와 무관하게 지연이자를 포함한 보험금 전액을 지급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금감원이 밝힌 주요 논리는 다음과 같다.

정당하게 청구된 사망보험금을 보험회사가 약관과 다르게 고의로 주계약 및 특약에 기재된 사망보험금 모두를 지급하지 아니하고 일부(일반사망보험금)만 지급한 것에 대해, 보험회사의 귀책사유로 특약에서 정한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았으므로 추가 지급이 필요함.

대부분의 보험회사 고객은 주계약과 특약의 보장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사망보험금을 청구할 당시 보험회사가 약관에 따라 지급하여야 할 모든 보험금을 정확하게 지급하였을 것으로 신뢰하므로, 보험전문가인 회사가 보험금의 일부를 고의로 누락하고 이를 알리지도 않은 것이므로 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됨.

지연이자 지급은 자살보험금 사태에서 보인 보험회사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징벌적 성격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민간 보험사들은 금감원의 조치에 따라 소멸시효와 무관하게 지연이자를 포함한 보험금 전액을 일괄 지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씨에게 지연이자를 과소지급한 우체국 보험의 경우, 자살보험금 사태 때는 '약관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며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징벌 성격의 지연이자를 지급해야할 때는 '약관의 내용을 우선한다'며 역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전 보험사 임원의 고백 "약관을 고쳤습니다"

취재진은 한 보험사 전직 임원의 증언을 통해 자살보험금 사태 당시 보험사에서는 어떤 대응이 이뤄졌는지 들을 수 있었다.

국내 중견 생명보험사인 흥국생명의 전직 임원으로 30년간 보험업계에서 일해온 A 씨. 그는 2005년경 자살보험금을 둘러싼 법정 공방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회사가 임의로 약관의 내용을 변경했다고 말했다. 일찍이 재해사망특약의 문제점에 대해 알고 있었음에도 책임을 피하기 위해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2005년부터 자살재해사망보험금에 관련된 간헐적 소송이 있었습니다. 회사 손익 영향 미칠게 크리라는 것을 실무부서가 다른 보험사에 비해 빨리 발견했습니다. 애초에 문제가 보험사에 있었던 겁니다. 약관을깊이 들여다보지 않은 상태에서 마케팅에 쓸 목적으로 재해사망특약을 갖다가 썼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보험사가  져야했겠죠.

당시 보험업법, 보험업법 시행령 등에 따르면, 약관을 포함한 기초서류 변경시에는 반드시 금융당국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이같은 조치도 하지 않았다. 보험회사가 정상적으로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고 소비자-당국과 공조해 해결책을 모색했다면 16년에 걸친 자살보험금 분쟁을 미연에 방지했을 수 있었던 셈이다.

약관의 수정이나 변경이 자유롭게 이뤄질 수 있는 구조라면 그 절차를 거쳤겠죠. 하지만 표준약관이나 재해사망특약 변경은 용이하지 않고, 내부만의 논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약관을 임의로 고치게 된 겁니다. 더디게 가더라도 감독기관과의 공조 하에 수정하면서 가야 했는데 거기에 대해 소홀했던 것이죠. 회사가 임의로, 편하게 하려했다는 것이죠.

취재진 확인 결과, 2005~2010년 사이 판매된 흥국생명의 2개 상품에서 약관이 변경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2005~2008년 판매된 '무배당나이스플랜UL종신보험'의 경우, 2006년 3월까지 판매된 초기 상품에서는 재해사망특약상 자살보험금 지급 조항이 그대로 실려있지만 이후 판매된 후기 상품에서는 동일상품임에도 내용 일부가 변경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무배당메디컬CI보험'의 경우, 2008년 6월까지 판매된 상품 약관에는 자살보험금 지급 조항이 명시되어 있지만 이후의 상품 약관에는 관련 조항 전체가 삭제되어 있었다.

A씨는 이같은 약관 변경을 통해 회사가 약 100억 원 가량의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추산했다. 2016년 금감원 발표자료에 따르면, 흥국생명은 비슷한 수준의 종신보험 계약을 보유하고 있는 알리안츠생명보험(137억 원), DB생명보험(140억 원)에 비해 자살보험금 미지급액이 현저하게 적은 것(32억 원)으로 나타났다. 임의적인 약관 변경이 실제 효과를 본 셈이다.

금감원 자료에 비해 오히려 영업을 더 하고 있었는데 다른 회사보다 미지급금 규모가 작다는 것은 그 기간 중에 임의로 약관을 삭제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삭제한 약관을 근거로 자살보험금 미지급액을 추정했기 때문에 그 미지급액이 나온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회사처럼 100억 원 대가 집계됐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에 대해 흥국생명 측은 불명확하던 약관을 올바르게 잡은 것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자살사망자에 대해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이 회사의 일관된 원칙이며, 그동안 약관이 불명확하게 되어 있는 점 때문에 자살보험금을 지급해왔다고 전했다. 또  주계약이 아닌 특약 변경에 대해선 당국에 신고해야할 의무가 없고, 이후 해당 내용에 대해 금감원에 보고 한 사실이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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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 오대양
촬영 : 정형민, 김기철, 신영철
편집 : 정지성
CG : 정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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