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 김성수 의문사 ② 모두가 권력의 사람들

2021년 07월 28일 17시 34분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지 21년이 지났다. 국가기관의 위법한 공권력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85건의 의문사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지만 현재까지 진실이 완전히 드러난 사건은 없다. 의문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국가 폭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개인의 한을 풀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의문사의 이면에는 범죄를 저질러도 영원히 침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권력의 뿌리 깊은 오만이 있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여전히 감추고 있다. 의문사가 지금 여기의 역사인 이유다. 
뉴스타파는 35년 전 발생한 한 18세 청년, 김성수의 의문사를 추적한다. 1만 페이지에 이르는 관련 조사 기록을 분석하고, 생존해있는 사건 관계자를 두루 만났다.  - 편집자 주
② 모두가 권력의 사람들

좋은 시절

2000년 1월. 김성수가 떠난 지 15년이 되는 해였다. 성수의 부모는 얼어붙은 시멘트 바닥, 가녀린 천막 뒤에 있었다. 국회의원 노무현이 찾아와 엄마의 찬 손을 잡았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좋은 시절 오면 다 밝혀질 거예요'.
김성수, 그리고 또 다른 의문사 유족들의 긴 싸움은 결실을 거뒀다. 국회는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135일 장기 농성의 결과였다. 같은 해 10월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했다. 유가족은 좋은 시절이 올 거라 믿었다.
박강형 경사는 경찰 신분으로 의문사위에 합류했다. 이른바 '파견 조사관'이었다. 경찰 파견자 가운데 막내라는 이유로 경찰 관련 의문사를 조사하는 조사 2과에 배치됐다. 경찰의 과거사를 파헤치는 경찰이라는 기묘한 위치에 놓였다. 박 경사는 개의치 않았다. 사건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30대 초반,  8년 차 형사였다. 그렇게 그의 인생을 바꾼 사건을 만났다. 진정 제25호, 김성수 의문사. 
△ 박강형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경찰 신분으로 의문사위에 파견돼 2년 간 김성수 의문사 사건을 조사했다. 
사건은 끝내 풀지 못했다. 지금도 유가족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한다. 하지만 2년의 의문사위 활동은 그를 바꿔놨다. 김성수 사건의 진실을 쫓는 일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았다. 나는 어떤 경찰인가, 나는 어떤 국민인가. 나의 일처럼 의문사 사건에 달려드는 민간 조사관들 사이에서 그는 뜨거워졌다. 국가 폭력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10여 년 경찰 생활에 자부심이 있었지만 스스로 떳떳하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국민이 아닌 권력에 충성하는 조직 안에서 본의 아니게 그들의 '도구'일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파견 종료 후 그는 경찰을 그만뒀다. 다른 일을 하며 꽤 돈을 만졌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경찰 조직과 의문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의문사위의 후신격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조사관 자리에 지원했다. 다시 국가 권력의 피해자들 편에 서기로 했다. 말리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할 말이 궁했다. 그는 의문사위 2년이 자신을 '잘못' 바꿔 놨다며 멋쩍게 웃었다.

드러난 조작

'결론이 정해져 있었다'. 감 좋은 형사 출신이 들춘 15년 전 수사 기록철의 첫 인상이다. 물론 예단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사건이 일어난 80년대와 그 경험한 90년대는 달랐다. 다른 시대에 대한 존중도 필요했다. 확인된 내용이 아니면 자의로 해석하지 않으려 신중을 기했다.
서류 검토를 마치고 부산 송도 앞바다 사건 현장을 찾았다. 세월 속에 현장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달라져 있었지만 과거를 느껴보려 애썼다. 일정을 끝내고 현장 인근 소줏집에서 반주를 했다. 주인에게 15년 전 사건을 넌지시 물었더니 수다가 터져 나왔다. 이상한 점이 있었다. 주인은 동네 해녀가 시신을 처음 발견했다고 말했다. 1986년 수사보고서에 기록된 최초 발견자는 남성 다이버였다.
△ 의문사위 조사 결과 김성수 시신을 최초 발견한 사람은 해녀로 확인됐다. 1986년 수사보고서는 김성수 시신의 최초 발견자를 지역 출신의 다이버라고 기록했다.
반신반의 사실을 확인했더니 수사보고서가 잘못돼 있었다. 최초 발견자로 되어있는 남성 다이버는 지역  토박이로 순경들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그가 다이빙을 하다 시신을 본 건 6월 22일 저녁, 이미 해녀가 당일 오전 신고를 해놓은 상태였다. 김성수 사건에 대한 수사는 시작부터 뒤틀려 있었다.
처음에는 '저 남자가 무엇을 잡노'하는 생각에 가까이 가보니 두 다리가 빳빳하게 붙어 있어 시체구나 생각했고, 돌덩어리가 매달려 있어서 '누가 원한이 있어 시체를 집어넣었구나' 생각하고 허겁지겁 도망갔습니다.

김ㅇㅇ / 해녀, 김성수 시신 최초 발견자
수사기록의 문제점이 속속 드러났다. 김성수의 발견 장소가 수심 17m의 심해로 기록돼 있었지만 사건 현장 방파제 앞은 '삼발이', 즉 테트라포드로 불리는 구조물이 가득하다. 이 구조물에 걸리지 않고 심해에서 익사체가 발견되려면 김성수가 자력으로 물에 뛰어들거나 얼마간 헤엄을 쳐야 한다. 
수심 17m라는 기록은 사실이 아니었다. 최초 발견자 해녀는 자신이 심해까지 잠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사체가 발견된 수심은 기껏해야 3~4m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후일 현장조사를 통해 확인된 발견위치는 수심 7m 정도다. 수심 17m를 주장한 남성 다이버와 함께 다이빙을 했던 동료는 평소 그의 허풍이 심하다고 진술했다.
고의적인 조작 정황도 포착됐다. 사건 당시 인양 현장에 있었다는 한 포장마차 주인의 진술조서에는 김성수의 점퍼를 자신이 입수했다고 돼있다. 땅에 곱게 접혀있는 점퍼를 봤고 이것을 주워 순경에게 전달했다는 요지다. 점퍼가 땅에 곱게 접혀있었다는 것은 김성수가 자의로 옷을 벗어놨다는 정황이다. 하지만 이 조서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진술자의 서명 또는 지장이 빠져 있었다. 뒤늦게 의문사위 조사에서 발견한 또다른 목격자는 다른 증언을 했다. 그는 오히려 누군가 잡아 끈 것처럼 점퍼에 얼룩과 주름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 김성수의 점퍼를 입수했다고 주장한 한 포장마차 주인의 진술조서. 조서의 마지막 서명란에 찍혀 있어야 할 서명이나 지장이 빠져 있다.
박강형 형사는 포장마차 주인과 조서를 작성한 경찰관을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이런 조서를 작성한 기억이 없다고 답했다. 당사자조차 모르는 조서라면 누군가 끼워 넣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수나 무능이 아니라 고의적인 사건 조작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뒤집힌 진실

수사의 부실이 속속 드러났지만,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경찰들은 여전히 기존의 자살 결론을 고집했다. 현장 경찰관이 미숙해서 벌어진 실수일 뿐이라는 것이다. 80년대에는 조서에 서명이 누락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자살 결론의 '흔들리지 않는 근거', 바로 부검감정서였다. 
당시 부검감정서에 따르면, 김성수의 사인은 익사다. 국과수 실험 결과 간과 폐 등 장기에서 플랑크톤이 검출됐다는 것이 그 근거다. 김성수가 바다 물속에서 호흡을 했다는 의미였다. 살아 있을 때 물속으로 들어갔으니 자살로 보는 것이 맞다는 것이 경찰의 주장이다.
하지만 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경찰의 주장은 상식에 맞지 않다는 것이 법의학자의 지적이다. 익사는 의학적으로 판단한 사망의 원인일 뿐 김성수가 어떻게 물에 들어가게 되었는가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의학자가 들여다본 김성수의 부검 결과에는 수사에서 자살 가능성을 배제해야 할 정황이 더 농후했다. 취재진이 만난 법의학자는 부검 현장 사진 가운데 하나를 손에 들었다. 부검 중 머리를 절개한 사진이었다. 머리 속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 법의학자는 100% 외상에 의한 출혈이라고 단언했다.
익사의 종류를 자살인지 타살인지 사고사인지 정할 때 여러 정황이 필요한데, 여기에는 신체적으로 머리에 출혈이 있어요. 이 분은 생활반응(출혈)이 있어서 사망 전에 손상이 생긴 겁니다. 일반적으로 스치거나 다친 게 아니라 머리 안에 출혈이 있다는 점에서 수사기관 입장에서는 굉장히 고민할 문제입니다. 이걸 경막하 출혈이라고 하는데 머리 속 뼈 안에 막이 3개가 있습니다. 그중 바깥쪽 막이 '경막'입니다. 그 안에 출혈이 있으면 100% 외상성 출혈입니다. 

유성호 /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
심장이 정지한 후에는 출혈이 발생하지 않는다. 즉, 김성수는 바다에 들어가기 전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충격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히는 게 이 사건의 핵심이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15년 전 작성된 부검감정서는 한눈에도 확인이 되는 뇌출혈을 누락했다. 
△ 김성수 사건 부검감정서 일부. 타자기로 작성된 감정서 원본에는 경뇌막하 출혈이 누락돼 있다가 나중에 수기로 추가됐다.
부검감정서 원본은 타자기로 작성됐다. 이 원본에는 뇌출혈 관련 내용이 일체 빠져 있다. '경뇌막하 출혈 20cc를 인정함'이라는 수기가 나중에 추가됐다. 언제 누가 추가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누더기가 된 부검감정서는 부검을 통해 밝혀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을 비껴간다. 머리의 타박상과 출혈 부위가 일치하는지, 경추에 충돌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지만 그저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법의학자는 실수로 생길 수는 없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경막하 출혈을 20cc이라고 수기로 기재했는데 사진상으로도 그보다 많은 양으로 보입니다. 이 정도면 극심한 두통, 머리가 이상하다고 느낄만한 것이어서 콘크리트로 몸을 묶고 떨어진 장소에서 일이 벌어졌다고 판단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상황을 잘 모르니 비난하기 어렵지만 눈에 보이는 뭔가를 기재한다는 건 100년 전이나 200년 전이나 똑같습니다. 머리에 피가 있다면 큰 상처고 우선적으로 기재해야 하는 중요한 소견입니다.

유성호 /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
부검감정서에는 실수라고 할 수 없는 치명적 결함이 더 있다. 익사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서울에 있는 국립 과학수사연구원에 검출물을 보내야 한다. 김성수 사건의 플랑크톤 실험 결과는 7월 1일과 7월 3일 이틀에 걸쳐 회신됐다. 7월 1일 자 회신 문건에는 나머지 실험 결과를 '추후 회보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김성수 사건 부검감정서는 이 나머지 회신이 도작하기 하루 전, 7월 2일에 작성됐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익사 결론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확인하기 전에 서둘러 감정서를 쓴 것이다.
의문사위 조사에서 부검의 손 모 씨는 부검감정서의 문제를 인정했다. 그는 재감정서를 작성하고 '김성수가 외상에 의한 뇌 손상을 입은 상태에서 물에 빠져 익사했다'라고 결론을 바꿨다. 15년 만에 김성수 사건 자살 결론의 핵심 증거가 무너진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뇌출혈 관련 소견이 누락된 것에 대해 누군가의 지시나 회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단순한 실수라고 주장했다. 국과수 회신이 오기 전에 부검감정서를 쓴 것에 대해서는 자신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침묵의 이유

서둘러 부검감정서가 작성되어야 했던 이유를 추정할 단서가 있다. 7월 1일은 정치권에서 김성수 사건에 대한 재수사 요구가 나온 날이다. 사건 현장에서 김성수의 시신을 살펴봤던 검안의 공 모 씨는 의문사위 조사 과정에서 뜻밖의 진술을 한다. 정치권의 재수사 요구 이후, 경찰이 자신을 다시 찾아와 김성수의 사망 추정 시간을 바꿔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사망 원인이 익사로 추정된다는 소견서도 요구했다. 공 씨는 경찰의 요구대로 해줬다. 경찰과 검안·부검 의사들 사이에 관행적으로 있는 일이었다.
단서는 더 있다. 김성수 사건 담당 형사 안호영은 6월 24일 부검 현장에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정체는 모르고 그저 '높은 사람'으로 기억했다. 부검 현장에 나타난 높은 사람의 존재감은 컸다. 안호영은 부검의에게 머리의 피에 대해 물으려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높은 사람 때문에 쉽게 말문을 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의문사위 조사 과정에서 '높은 사람'의 정체가 드러났다. 부산지방검찰청 소속 공안 검사였다. 당직 검사가 부검 현장에 나오는 일은 간혹 있었지만, 공안부 검사가 나타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훗날 의문사위 조사에 나온 이 공안 검사는 당시 초임검사였으며, 검찰 윗선의 지시에 따라 현장에 나갔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진실은 무엇일까. 부검의는 공안검사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뉴스타파는 부검의 손 씨의 과거 주소지와 그의 명의로 된 빌딩 등을 탐문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살아있다면, 80대 중반의 나이다.   

적극적 방관자들

김성수 사건에 참여한 부산 서부 경찰서 소속 형사는 12명이다. 최초의 담당 형사 안호영은 서울, 강릉 출장수사를 마치고 돌아온 뒤 수사에서 배제됐다. 7월 초 정치권의 재수사 요구가 나온 이후 사건은 수사과장 지시로 지역반에서 강력반으로 넘어갔다. 강력반 소속 형사들은 김성수의 시신조차 보지도 못한 채 수사를 진행했다. 15년 뒤, 의문사위 조사를 받은 형사들은 이 수사가 잘못된 수사였다고 고백했다. "숲은 못 보고 나무만 살펴야 하는 수사"였다는 것이다.
형사 A : 솔직히 사체를 보고 출장 갔다 왔으면 그런 수사보고서 쓰지 못했을 겁니다. 당시 이거 타살이라고 하면 뺨 맞을 정도의 분위기였습니다. 지금 보면 왜 이렇게 작성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잘못된 보고서입니다.

형사 B : 당시에 타살로 보고 수사를 했었습니다. 조장에게 말 한번 제대로 못할 시기로 잘못하면 소문이 나서 경찰 생활이 힘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형사 C : 타살 혐의점이 상당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살 의견을 초동 수사에 낸 건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휘선의 판단이지 수사관의 결론은 아니었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기록 중 (일부 내용 편집함)
△ 김성수 사건 수사보고서 일부. 김성수가 불효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몸에 돌을 묶었다는 수사관의 추정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살 결론을 뒤집는 정황이 수사 과정에서 여러 차례 드러났지만 형사들은 침묵했다. 자살 결론을 보강할 내용이 나오지 않으면 고참은 황당한 추정을 불러줬고 신참은 그걸 그대로 타자기에 받아쳤다. 김성수의 죽음을 덮은 수사보고서의 황당한 궤변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조사관 : 수사보고서에 김성수의 아버지 김종욱이 자살에 일체의 이의가 없었다고 썼는데 사실인가요?
형사 D : 직접 만나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조사관 : 그럼 왜 이렇게 작성된 것인가요?
형사 D : 그것은 잘 모르겠으나 잘못임을 인정합니다.

조사관 : 사건 현장 방파제에 실신 상태의 사람이라도 혼자서 올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썼는데, 2~3사람이 올리는 가능성도 수사했어야 하지 않나요?
형사 E : 네, 당연히 수사했어야 하나, 저로서는 알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조사관 : 수사보고서에 담임 위ㅇㅇ의 진술이라며 김성수의 성격에 대해 청취하는 부분이 있는데 당시 고교 선생 중에는 위ㅇㅇ이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요?
형사 F : 잘 모릅니다.
조사관 : 심리적 갈등으로 무작정 부산에 온 것으로 추측된다고 기술했는데 무슨 의미인가요?
형사 F : 문구는 직접 제가 작성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의 용어는 제 지식수준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기록 중 (일부 내용 편집함)
형사들은 사건 초기 자살 결론을 내린 당사자로 당시 형사 주임이었던 하 모 씨를 지목했다. 시신 인양 당시 안호영 형사와 함께 현장에 나왔던 인물이다. 안호영은 그가 사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의문사위 조사에 나왔을 때 하 씨는 수사의 부실을 인정하는 다른 일선 형사들과 태도가 달랐다. 조사관의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김성수의 머리 상처를 두고 자살 전에 스스로 머리를 때린 것 아니냐는 황당한 답변을 하기도 했다. 조사관이 자살 결론을 뒤집는 사실들을 제시했지만 그는 끝까지 김성수의 죽음은 자살이라고 고집했다. 하 씨는 2016년 사망했다.

대공(對共)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534페이지 분량, 김성수 사건의 1986년 수사기록철 속에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흐름이 있다. 수사를 통해 드러나지 않은 정보가 난데 없이 등장해 결론을 만들고, 이름 없는 존재가 수사의 속도와 방향을 조율했다. 그 행간에는 어김없이 대공(對共)이 있었다.
안호영은 송도 앞바다 시신 인양 현장에서 다른 무리의 경찰관을 목격했다. 부산 서부 경찰서 소속 대공과 직원이었다. 같은 경찰서 소속이지만 현장에서 마주친 적은 없었다. 안호영은 그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수사를 하기로 했다. 대공과 소속은 동료 지간이라도 자신의 일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다. 안호영 자신도 대공 기능을 맡은 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었다.
이 대공과 직원의 모습은 김성수의 아버지 김종욱 씨와 함께 부산에 다녀왔던 군 출신 친척 형에게도 목격됐다. 군 출신 친척 형은 일반 변사 사건에 대공이 나오는 것이 심상치 않다며 아버지 김 씨에게 경고했다. 후일 의문사위 조사를 받은 대공과 직원들은 사건 현장에 나간 일이 없다고 진술했다.
김성수 사건 당시 부산 서부 경찰서 대공과는 비상이 걸려있었다. 당시의 분위기는 부산 서부경찰서 대공2계장 김 모 씨의 의문사위 진술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퇴근을 앞둔 시각에 상급 기관인 부산시 경찰국 대공과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일은 거기에서 시작됐다.    

무언의 지시

부산시 경찰국의 대공과장은 김 씨에게 송도 앞바다에서 발견된 익사체에 대해 아느냐고 대뜸 소리를 질렀다. 한바탕 호통을 치고 나서 대공과장은 이 사건을 대공 상황으로 보고 판단하라고 지시했다. 일반 변사 사건을 대공 상황이라고 하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이후 부산 서부 경찰서 대공과는 영문도 모른 채 이 사건에 밤새 매달렸다.
대공계장 김 씨는 안호영 형사와 마찬가지로 시신에서 나온 사진인환증에 주목했다. 이 내용을 토대로 서울 관악 경찰서에 대공 긴급 조회를 신청했다. 형사과와 대공과가 김성수 신원 확인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는 부산일보 장병호 기자의 토막 기사는 여기에서 나왔다. 대공 상황 매뉴얼대로 입수된 대공 라인의 정보는 부산 지역 안기부와 보안사령부에 전파했다.
△ 6월 24일 자 수사보고서. 대공 용의점 분석란에 조기 자살 결론을 내리는데 쓰인 출처 불명의 정보가 처음 등장한다. 
시신 인양 이틀째인 6월 24일 작성된 작성자 불명의 수사보고서에는 이러한 부산 서부 경찰서 대공과의 조사 기록이 담겼다. 이 수사보고서는 부산시 경찰국장에게 보고됐다. 문건의  '대공 용의점 분석란'에는 대공계장 김 씨와 안기부 조사관 정 모 씨가 함께 '합신' 조사를 했다고 나와 있다. '합신'이란 합동 정보 신문조 활동을 뜻하는 것이다. 군과 안기부, 경찰 등 대공 요원으로 구성돼 공비나 간첩에 대한 현지 조사와 포로에 대한 1차 신문을 하는 조직을 뜻한다.
주목할 부분은 이 대공 라인의 수사보고서에 김성수 사건을 조기 자살 결론으로 이끈 출처 불명의 정보들이 처음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수사보고서에는 △ 노동야학 6회 관련자인 점, △ 성적 하락으로 고민해왔다는 친인척의 진술, △ 학사징계처분을 받은 점 등이 나와 있다. 노동야학 관련 사실을 조회할 수 있는 전산 기기는 대공과만 접속이 가능했다. 친인척은 경찰 조사를 받은 일이 없었고, 사건 당시는 1학기 성적이 나오기 이전이어서 학사징계 처분이 나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이후 경찰이자살 결론을 내리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
이와 관련, 부산 서부경찰서 대공 계장 김 씨는 의문사위 조사에서 해당 내용이 김성수의 신원을 확인해준 서울 관악 경찰서 대공과로부터 전화로 전해들은 것이라고 진술했다. 관악경찰서 대공과에서 왜 이런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전달했는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문제는 부산 서부 경찰서의 태도였다. 단순 첩보 수준에 불과한 정보를 가지고 대공과와 형사과가 한 몸처럼 움직였다. 시신 인양 이틀 만에 일사천리로 자살 결론을 내리고, 다른 정황이 나와도 끝까지 결론을 바꾸지 않았다. 누군가 김성수 사건의 진실을 덮으라는 '무언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면 설명이 어려운 부분이다.  

사건의 전말

당시 부산 서부경찰서 대공과장으로 재직했던 권 모 씨는 의문사위 조사에서 이 은밀한 대공 라인의 움직임을 해석했다. 당시 행정고시 출신 신출내기 경찰 간부였던 그는 김성수 사건 수사에서 배제돼 있었다. 그는 김성수 사건을 대공 사건으로 보라는 부산시경의 지시가 명목상의 합신조 활동을 통해 형사계의 수사에 관여하고 사건을 자살로 시급히 종결하라는 암묵적인 공작 지시였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수사형사들이 국가기관이 개입했을 소지가 보이면 사건을 조기에 마무리하기 위해 대공 부서에 판단을 떠넘겼을 수 있습니다. 또 암묵적으로 자살로 사건을 시급히 종결 처리하라는 지시가 있으면 나름대로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합신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경찰 조직은 비밀이 쉽게 노출되는 곳이기 때문에 상부에서 공식적으로 자살로 빨리 종결하라는 지시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6월 24일 자 수사보고와 같이 몇가지 단서 만으로 염세비관 자살로 추정된다는 의견을 내는 것은 책임의 문제가 따르기 때문에 단정적인 의견을 제시할 수 없으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암묵적인 지시'가 있었을 개연성이 있습니다.

권ㅇㅇ / 당시 부산 서부경찰서 대공과장 (의문사위 조사 기록 중)
그의 진술에 따르면, 이 '무언의 지시'가 나온 진원지는 다름 아닌 부산시 경찰국장 권복경이었다. 부산시 경찰국장은 지금의 부산 지방경찰청장에 해당하는 직위다. 권복경은 이듬해인 1987년 경찰 조직의 정점인 치안본부장, 지금의 직위로는 경찰청장에 오른다. 전두환으로부터 6월 항쟁의 물결을 막으라는 임무를 부여받는 인물이다. 2019년 사망했다.
△ 권복경 당시 부산시 경찰국장. 김성수 사건 이듬해인 1987년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으로 진급한다. 
권복경은 김성수 사건이 발생하자 참모들을 질책했다. 관할 구역에서 돌을 매단 서울대학생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사실이 그를 불편하게 했다. 죄 없는 학생의 참혹한 죽음이 불러올 사회적 파장을 예감했을 것이다. 실제로 뒤이은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은 김성수의 경우와 달리 성공적으로 은폐되지 않았고, 결국 정권을 무너뜨린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경찰국장의 질책은 무언의 지시가 됐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뜻은 일선 형사까지 전달됐다. '모두가 권력의 사람들'이었다.
알아서 기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15년이 지나 의문사위 조사에 참여한 관계자들은 고백했다. 그러나 자신의 고백을 조서에 담지는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김성수의 죽음을 단 이틀 만에 자살로 만든 사건의 전말이다. 
취재진은 진실을 증언할 사람을 찾아 나섰다. 35년 전 사건에 연루됐던 경찰은 대부분 사망한 상태다. 우여곡절 끝에 사건의 중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대공계장 김 씨의 연락처가 확인됐다. 그는 자신을 가해자처럼 여기는 것이 불쾌하다며 의문사위에서 한 말 외에는 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의문사위 조사에서 김 씨는 "여전히 김성수가 자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진실을 찾는 여정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3편에서 계속)
제작진
촬영이상찬, 신영철
편집박서영
CG정동우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