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판 무죄...특검 필요성 커져

2014년 02월 07일 20시 27분

“이 사건에서 수서서의 보도자료 발표와 언론 브리핑이 그 시기와 내용의 면에서 최선의 것인지에 관하여 다소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컨데 김하영이 40개의 아이디와 닉네임을 사용했음이 확인된 이상 비록 당시까지는 그것이 경찰이 설정한 분석범위 내의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분석의 범위와 관련된 쟁점을 분명히 부각시켜서 이를 기초로 수사가 확대될 여지가 있음을 밝히는 등으로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는 방법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검토한 여러 사실관계를 종합하여 보면 비록 그런 아쉬움이 남는다고 할 지라도 검사가 제출한 증거 및 다른 간접사실만으로는 피고인에게 실체를 은폐하고 국가정보원의 의혹을 해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거나 허위의 수사결과발표를 지시하려는 의사가 있었다고 인정하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저희 재판부의 판단입니다.”

서울지법 형사합의21부(이범균 부장판사)가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게‘피고인 무죄’를 선고하며 설명한 판결 취지다.

지난 대선 직전 있었던 경찰의 국정원 사건 중간수사결과 발표에 아쉬움은 있지만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김 전 청장에게 형사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뜻이다.

▲ 서울지법 형사합의21부(이범균 부장판사)가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게‘피고인 무죄’를 선고

 2012년 12월 16일 경찰의 중간수사결과 발표는 대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최선의 것인지 아쉬운’ 그 중간수사결과 발표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대선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란 여론조사 결과도 있었다.

14차례에 걸친 공판에도 불구하고 재판과정에서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판결은 증인의 진술과 정황 증거에 상당부분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 권은희 당시 수서서 수사과장 기자회견 2014년 2월 7일

검찰이 공소장에서 중시했던 것은 권은희 당시 수서서 수사과장의 진술이었다.

재판부는 권 과장 진술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국정원 여직원 김 모씨의 오피스텔 사건이 터진 다음날인 2012년 12월 12일 오후에 김용판이 직접 전화해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권은희 전 수서서 수사과정의 진술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오전에 김기용 당시 경찰청장의 지시로 영장 신청을 보류하라는 지시가 이광석 수서서장에게 전달됐고 이에 따라 영장을 신청하러 갔던 직원을 철수시켰기 때문에 김용판 전 서울청장의 압력으로 영장 신청이 가로막힌 것은 아니라고 봤다.

또 권 과장은 국정원 직원 김 씨가 노트북의 분석범위를 지정하자 항의의 표시로 수서서의 유지상 사이버 팀장을 철수시켰다고 했지만 유 팀장은 스스로 철수했다고 진술한 점을 받아들였다.

아울러 서울경찰청 증거분석팀이 수서서에 분석결과를 보냈을 때도 암호해독 프로그램인 인케이스 프로그램과 사용방법을 함께 보내줬기 때문에 인케이스 프로그램이 없어 열람할 수 없었다는 권 과장의 진술이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들

국정원 직원 김 모씨가 노트북과 데스크톱 컴퓨터를 임의제출하면서 ‘2012년 10월 이후의 박근혜, 문재인 지지 비방 댓글만 조사해달라’라고 요청한 것을 경찰이 받아들이고 그 범위에 맞춰 분석결과를 발표한 것이 타당했느냐의 문제였다.

재판부는 판례를 들며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또 증거분석팀 전원이 토론을 통해 합의했고 이 과정에 김 전 청장이 압력을 넣은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당시엔 국정원 여직원의 인터넷 활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오랜 시간 많은 사실이 밝혀진 지금의 잣대로 당시 분석범위 밖의 댓글에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여기까지가 재판부가 무죄 판결을 내린 핵심 근거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풀리지 않는 의혹이 있다. 매우 강력하면서도 핵심적인 의혹이다.

‘2012년 10월 1일 이후의 박근혜, 문재인 지지 비방 댓글만 조사해달라’는 국정원 김 씨의 요청은 어떻게 나오게 됐고,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 범위 안에서 분석했을 경우 문제가 될 증거가 안 나올 것이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 김용판 전 청장과 국정원 사이에 사전 조율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다.

8월 23일 뉴스타파 보도 ‘말할 수 없고’, ‘기억나지 않는 이유’ 에서 이미 지적했다.

 

국정원 직원 김 씨는 이틀동안 오피스텔에서 나오지 않았다. 경찰 증거분석팀의 CCTV를 보면 오피스텔안에서 해당 기간의 댓글흔적을 지운 정황이 나온다. 실제로 검찰은 김 씨가 오피스텔에 있는 동안 텍스트파일 187개를 영구삭제하고 상부에 보고했다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 첫 공판 때 밝혔다.

그리고 김 씨는 경찰에 하드디스크 임의제출 의사를 제출했고 국정원의 허락을 얻어 제발로 나왔다. 결국 그 범위 안에서 경찰은 분석을 했고 댓글이 없다고 발표했다.

김용판 전 청장은 국정원 이종명 당시 차장과 12월 11일,14일,16일 세 차례나 통화를 했다.

▲ 증거분석 종료 전 보도자료 초안 작성

또 서울청 증거분석팀이 키워드 분석을 종료하기 하루 전인 15일 저녁에 이미 보도자료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댓글이 더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수사결과 발표 때의 기자 예상 질의에 맞춰 답변을 만들기 시작한다.

▲ 분석실 CCTV 화면 내용 중 '질의답변서 논의'

그리고 바로 보도자료 초안 작성 직전인 15일 점심 때 김 전 청장은 ‘기억하지 못하는’ 식사를 했다. 무려 4시간동안이나. 보도자료 초안 작성이 수사계통 간부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이 직후다.

그리고 하루 뒤에 서둘러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김용판 전 청장은 박원동 당시 국정원 국장과 15일과 16일에 통화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을 정리하면,

  1. 압수수색이 아닌 임의제출 방식이면 제출자가 요청한 범위안에서 경찰이 분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분석범위를 엄격히 제한해 요청했다.
  2. 증거분석팀은 이를 충실히 수행했다.
  3. 분석범위 안에서 댓글은 안 나왔고 경찰은 그대로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증거분석팀은 떳떳했다. 한 명도 예외없이.
  4. 이 과정에서 김용판 전 청장은 국정원 이종명 차장, 박원동 국장과 수차례 통화를 했고수사진행 상황과 결과를 빨리 발표하라는 종용을 받았다.
▲ 김용판 전 서울청장, 이종국 전 국정원 차장, 박원동 전 국정원 국장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해진다.

김용판 전 청장 입장에서는 별도의 압력을 행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 국정원과 미리 조율이 돼 있었다면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는 지를 점검하기만 하면 됐고, 수사결과 발표를 최대한 서두르기만 하면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분석이 종료되기도 전에 댓글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 초안을 작성해 놓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분석이 끝나자마자 경찰 역사상 처음으로 일요일 밤 11시에  중간수사결과 발표를 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런 의혹을 풀기 위한 증거를 검찰은 공소사실에 넣지 못했다.

피고인과 국정원 간부와의 통화 내역은 알아냈지만 그 이상 나가지 못했다. 김용판 전 청장이 국정원과 사전 조율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오피스텔에서 김 씨가 댓글 흔적을 지운 것과 분석 범위를 제한해 요청한 것과의 인과 관계도 밝히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가 공소사실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재판부의 결론도 검찰의 증거만큼이나 불충분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과는 무죄였다. 그렇다고 검찰 특별수사팀 검사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순 없다. 팀을 구성하게 한 채동욱 검찰총장이 물러났고, 윤석열 수사팀장도 날라갔다.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의혹만 남겨 놓은 채 끝난 이번 1심 선고는 오히려 특검의 필요성을 높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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