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식 위기탈출, '유체이탈 화법'

2015년 04월 23일 19시 04분

성완종 전 회장으로부터 3천 만원을 받았다고 지목된 이완구 국무총리가 사의를 표명했다. 자신이 임명한 총리가 물러나는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매우 안타깝고, 총리의 고뇌를 느낀다”라고 말했다.

‘안타깝다’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뜻대로 되지 아니하거나 보기에 딱하여 가슴 아프고 답답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책임, 또는 사과의 의미는 없다. 그렇다면 이번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3천만 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물러나는 총리의 고뇌는 느끼면서도 2년 만에 5명의 총리나 총리후보가 물러나는 사태를 보는 국민들에겐 아무런 미안함도 느끼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박근혜 대통령이 ‘안타깝다’고 말한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취임 초 이중 국적, CIA(미 중앙정보국) 자문 등의 논란으로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가 사퇴했을 때도, 비뚤어진 역사관 문제로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사퇴했을 때도 사과 대신 ‘안타깝다’고 말했다.

2015042303_01

박 대통령은 지난 2년여 동안 자신에게 불리한 사안이 생길 때마다 진솔한 사과보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를 보이며 위기에서 빠져나갔다. 지난 2년 간의 박근혜 대통령 발언을 통해 이른바 ‘대통령의 위기대응전술’ 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석해 봤다.

위기 대응1. 일단 대통령은 빠지기

2013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한 달도 안 돼 자신이 임명한 장차관급 인사 7명이 줄줄이 낙마하는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인사권자인 박근혜 대통령은 사과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아닌 허태열 당시 인사위원장 겸 비서실장이 사과했다. 그것도 허태열 비서실장 명의의 사과문을 김행 대변인이 대독하는 형식이었다.

▲ 김행/청와대 전 대변인/2013.3.30/
▲ 김행/청와대 전 대변인/2013.3.30/

2013년 5월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중 윤창중 청와대 전 대변인이 성추행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도 박근혜 대통령 대신 사과를 한 사람은 참모진이었다.

▲ 이남기/청와대 전 홍보수석/2013. 5.10
▲ 이남기/청와대 전 홍보수석/2013. 5.10

하지만 당시 이남기 홍보수석의 사과는 오히려 국민의 반발을 더 키웠다. 청와대 대변인이 끼친 국제적인 망신에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사과를 하는 대신 오히려 사과를 받는 이상한 모양이었다. 비판이 커지자 허태열 나와서 비서실장이 사과했다.

▲ 허태열 당시 청와대 인사위원장 겸 비서실장/2013.5.11
▲ 허태열 당시 청와대 인사위원장 겸 비서실장/2013.5.11

위기대응2. 논란 계속되면 책임 전가

박근혜 대통령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 참모진 2명이 사과를 하고 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리고 국민 앞이 아닌 참모진들을 불러모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사과했다. 하지만 정작 책임은 인사권자 자신이 아닌 참모진들에게 돌렸다.

공직자로서 있어서는 안되는 불미스러운 일 발생해서 국민 여러분들께 큰 실망을 끼쳐드린 데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관련 수석들도 모두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 박근혜 대통령 수석비서관회의 발언/2013.5.13

304명의 희생자를 낸 세월호 참사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은 책임을 돌리는 발언을 자주 했다.

사고의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고 원인 규명 하겠습니다. 만약에 지금 오늘 여러분들과 얘기한 게 지켜지지 않으면 여기 있는 사람 다 책임지고 물러나야 됩니다. - 진도체육관에서 박근혜 대통령 발언/2014. 4.17

2015042303_05

‘여기 있는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지만 당시 손짓은 주변의 참모진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형참사에 대통령의 책임 있는 발언이 없었다는 비판이 커지자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이후 34일만에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은 눈물을 보이며 “이번 사고에 대처하지 못한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다”며 처음으로 자신의 책임을 언급했다.

하지만 그 이후 개최된 4차례의 대통령 주재 회의에선 책임을 주로 ‘유병언’ 에게 돌렸다.

2015042303_06

위기대응3. 검찰에 가이드라인 제시

2015042303_07

박근혜 대통령은 검찰에 수사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듯한 발언도 종종 했다.

지금 유병언 검거를 위해서 검경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못 잡고 있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검거방식을 재점검하고 다른 추가적인 방법은 없는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검토해서… - 박근혜 대통령/ 6.10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 발언

이같은 박근혜 대통령의 질책이 나오자마자 검찰은 군, 검, 경이 모인 긴급대책회의를 개최하며 유병언 잡기에 매달렸다. 결국 검찰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205명을 기소했지만 이 가운데 정부 고위관계자는 단 1명도 포함되지 않아 꼬리자르기식 수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유병언 측은 34명이 기소됐는데 모두 구조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횡령, 배임 혐의였다.

비선 실세의 국정 개입 의혹이 담긴 이른바 ‘정윤회 문건파동’이 있었을 때도 박 대통령은 검찰이 수사 중인 상황에서 문건을 ‘찌라시’로 규정했다. 검찰에 문건 내용의 진위보다는 유출자 색출을 촉구했다.

그 찌라시에나 나오는 그런 얘기들에 이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은 정말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박근혜 대통령 2014.12.7 여당지도부와 오찬 중 발언

그리고 한 달 뒤 나온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 내용은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까지 비선 실세의 인사 개입을 폭로한 상황이었지만 “인사 개입은 확인할 수 없고 문건 내용은 풍문을 짜깁기해 만든 근거 없는 것”이라고 결론냈다. 그리고 조응천 전 청와대공직기강비서관 등 문건 유출자로 지목된 3명만 기소했다.

위기대응4. 정말 힘들 땐 물귀신 작전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화살이 겨냥된 사안에 대해서는 자신의 문제가 아닌 원래부터 그랬던 고질적인 문제로 희석시키며 빠져나갔다.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사과 대신 국정원은 과거부터 논쟁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과거 정권부터 국정원은 많은 논쟁의 대상이 돼 왔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국정원도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박근혜 대통령/수석비서관회의 발언(2013.7.8)

이 같은 물타기식 발언은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이번 기회에 우리 정치에서, 과거부터 현재까지 문제가 있는 부분은 정치개혁 차원에서 한번 완전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박근혜 대통령/긴급현안점검회의 발언(4.15)

자신의 핵심 측근 7명이 거론된 사건에 사과나 책임 있는 발언을 하는 대신 ‘원래부터 있었던 문제’로 초점을 흐리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전술이 통할까?

2015042303_08

박근혜 대통령은 그동안 이 같은 전술로 위기의 순간마다 속속 책임을 피해갔다. 그러나 이런 전략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취임 초 54.8%에서 최근 38.2%(2015.4월3주)으로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는 “박 대통령이 정무적인 대응이나 발언을 할 때마다 지지율이 반등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보면 박 대통령의 집권 3년차 지지율은 역대 이명박, 노무현 대통령보다도 낮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이 기존과 같은 책임회피식 태도를 고수해서는 국정위기를 돌파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이번 사건의 본질은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 비리의혹이고, 2012년 대선자금 문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대통령이 엄중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라며 “이번에도 물타기식 대응을 하고 그에 맞춰 검찰도 물타기식 수사를 한다면 정권도, 검찰도 함께 죽는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