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프로젝트] ⑦ “광주학살 전파 막아라” 80년 외무부 문서

2019년 09월 30일 08시 01분

뉴스타파는 <민국100년 특별기획: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의 일환으로 ‘전두환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전두환 세력이 쿠데타와 광주학살로 정권을 탈취한 뒤 부정하게 축적한 재산을 환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이 땅에 정의를 세우기 위한 기획입니다. 12.12군사반란 40년을 맞아 준비한 ‘전두환 프로젝트’는 오는 12월까지 매주 월요일 방송될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1980년 5월 광주학살 직후, 한국 외무부가 전두환과 신군부를 규탄하는 해외 교민 시위를 방해하기 위한 공작을 수립, 집행한 사실이 뉴스타파 취재결과 확인됐다. 광주학살 직후 외무부가 각국 한국대사관과 주고받은 262쪽 분량의 정부문서를 통해서다. 뉴스타파가 입수한 문서에 따르면, 당시 외무부는 교민 시위를 통해 광주학살의 진실이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각국 한국대사관에 친정부단체 조직을 지시했고, 심지어 돈까지 뿌렸다.

뉴스타파가 입수한 외무부 문서는 1980년 5월 30일부터 7월 말 사이에 생산된 것들이다. 당시는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가 우리나라의 행정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외무부, 신군부 규탄 교민시위를 ‘불순분자 책동’으로 보고

뉴스타파가 입수한 80년 외무부 문서에는 먼저 전 세계에서 벌어진 교민시위에 대해 자세히 기록돼 있다. 미국과 일본은 물론, 동남아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교민시위가 벌어졌다는 내용이다. 문서에는 집회가 벌어진 일시와 장소는 물론 참여인원과 집회 당시 나온 구호까지 구체적으로 적혀 있는데, 당시 해외교민들의 주된 요구사항은 ‘전두환과 신군부 퇴진’, ‘비상계엄 해제’ 등이었다. 아래 표는 외무부 문서로 확인된 ‘80년 5~6월 당시 주요 교민시위’ 사례.

▲ 80년 5~6월 주요 해외 교민 시위 내역
▲1980년 5월 광주학살 직후, 독일의 베를린 교민과 유학생들이 전두환 물러나라는 구호를 내걸고 거리 행진을 벌였다. (자료제공: 5·18 기념재단)

외무부 문서에 따르면, 80년 당시 정부는 해외에서 벌어지는 교민들의 시위를 ‘반한단체 활동’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광주학살로 시작된 해외 교민시위는 반한단체가 주도한 활동’, ‘일본 및 동남아지역에서 벌어진 시위는 북괴의 사주에 의한 것’ 같은 표현들이 외무부 문서 곳곳에서 확인됐다. 80년 6월 3일 외무부 영사교민국이 작성한 문건(‘최근 국내사태와 관련한 재외교민 동향’)에는 교민 시위의 원인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가. 불순 분자들의 조직적인 책동과
나. 주재국 매스컴의 편파적인 보도가 촉진 작용을 하면서
다. 본국 실정에 어두운 재외 교포들의 감상적인 부화뇌동 행위를 유도한 것임.

‘최근 국내사태와 관련한 재외교민 동향’(1980년 6월 3일 )

하지만 당시 교민 시위를 기억하는 위상복 전남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증언은 달랐다. 광주학살이 벌어질 당시 서베를린자유대학에서 유학중이었던 위 교수는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광주학살 이후 시작된 교민과 유학생들의 시위는 자발적으로 조직된 것”이라고 말했다.

▲ 뉴스타파와 인터뷰 중인 위상복 전남대 철학과 명예교수. 80년 5월 광주학살 당시 위 교수는 유학생 신분으로 교민시위에 참여했다.

기숙사 TV에서 독일 방송으로 광주 학살소식을 봤어요. TV에서 제 고향인 광주 금남로에 불길이 치솟는 걸 보고 눈물이 났어요. 유학생들끼리 모여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 결의를 해서 학교 내에 단식을 벌이기로 했어요. 단식 투쟁을 해야 해외 언론들이 관심을 더 가지지 않을까 싶어서요. 3일간 단식을 벌였고 이후에 독일에 와 있던 간호사들, 광부들하고 합세해서 거리행진도 했습니다. 독일 시민들도 참여했어요.

위상복 전남대 철학과 명예교수(1980년 5월 당시 독일 유학생)

외무부, 반한단체 와해 공작 지시...친정부단체에는 돈 뿌려

당시 우리 정부가 교민 시위에 얼마나 집요하게 대응했는지는 1980년 6월 14일 작성된 3급 비밀문건(‘해외 반한단체 동향및 대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문건에는 구체적인 대응방안이 적혀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반한단체의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무시하지 말고, 반박성명, 투고, 회견을 실시한다. 단체의 움직임을 사전에 입수해 방해, 와해 공작을 추진하고 반한단체 조직원들을 전향시켜 자기 단체의 내막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열거나 수기를 쓰도록 유도하라.

‘해외 반한단체 동향및 대책’(1980. 6. 14.)

한마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광주학살의 진실을 알리려는 해외 교민들의 시위를 방해하라는 것이다.

반대로 외무부는 해외 교민 시위에 대응하기 위한 친정부단체 조직도 각국 대사관에 지시했다. 특히 1980년 6월 23일 외무부 내 영사교민국이 작성한 문건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교포단체인 민단을 활용해 친정부 세력을 조직하라”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기재돼 있었다.

▲ 1980년 6월 23일 외무부 영사교민국이 작성해 각국 대사관에 보낸 문서 ‘해외 교포 선도 및 친한세력 조직화 방안’. 문서에는 “재일 한국인 거류민단을 정비해 친한세력을 조직하라”는 외무부 지시사항이 기록돼 있다.

실제로 이 문건의 내용대로 일본의 민단회원들이 친정부 시위를 벌인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1980년 8월 14일 일본 도쿄에서 민단회원 800여 명이 신군부에 반대하던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가 주최한 ‘김대중 구출 해외동포 대표자회의’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어 한민통 회의를 좌절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외무부는 해외공관에 돈까지 보내주며 친정부 단체 지원을 독려했다. ‘일본 오사카 민단 지방본부에 5000달러 지원’, ‘독일 취약지역 활동비로 3천달러’와 ‘유럽 한인체육대회 보조비 만달러’ 등이었다.

‘전두환의 국보위’, 외무부 문건 작성 당시 행정실권 장악

뉴스타파가 입수한 외무부 문서가 작성될 당시 우리나라의 행정실권은 국보위에 있었다. 그리고 전두환은 신군부 출신들이 주요 보직을 차지하고 있던 국보위의 최고실세인 상임위원장이었다. 당시 국보위의 힘은 5·16 쿠테타 직후 박정희가 만든 국가재건최고회의와 비슷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80년 6~7월에 작성된 외무부 문건의 최종 지휘, 감독권자는 신군부와 전두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1980년 5월 국보위가 만들어진 뒤, 우리나라의 행정실권은 국보위로 넘어갔습니다. 국보위가 모든 행정기관들의 검열을 담당했고, 정부가 생산하는 모든 정책과 지시가 국보위에서 걸려졌습니다. 국보위 기관원들이 각 부처에 파견돼 있었고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80년 6월 이후 생산된 외무부 문서에 대한 최종 지휘, 감독권자도 국보위, 그리고 국보위의 최고 실세인 전두환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제작진
취재강민수 한상진
연출박경현
자료5·18기념재단
촬영김기철 최형석
편집윤석민
CG정동우
디자인이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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