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사장님’이 노조 가입을 권유하는 이유

2021년 06월 17일 17시 57분

택배 기사들과 사용자 측인 대리점 사이의 단체 교섭이 한창이던 지난해 연말, 전국 곳곳에서 여러 대리점 소장들이 제2 노조 결성에 개입한 사실이 뉴스타파 취재 결과 확인됐다. 대리점 소장들의 개입으로 제2 노조가 만들어진 곳에서는 교섭대표노조 지정을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면서 단체 교섭이 지연되고 있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단체 협약에 합의 내용이 명시되지 않는 한, 어제(16일) 체결된 2차 사회적 합의가 현장에서 제대로 이행될지는 미지수다. 

“자네가 거기(민주노총 택배노조) 같이하자는 이유가 뭔데?”

강원도 동해에서 CJ대한통운 택배 기사로 일하고 있는 A 씨. 그는 지난해 가을 어느 늦은 밤, 대리점 소장이 자신의 집을 찾아왔다고 했다. 소장이 대뜸 내민 건 한국노총 노조 가입 신청서였다. 얼떨결에 서명했지만  A 씨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소장의 강요로 노조에 가입한 점, 민주노총 택배노조와 비교해 한국노총 노조가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는 점 등이 신경 쓰였다. 이후 과도한 업무량을 못 이겨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되면서, A 씨는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민주노총 택배노조에 다시 가입하기로 마음먹었다. 노조 탈퇴 의사를 밝힌 뒤, 대리점 소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지난해 12월 26일 택배 기사 A 씨와 대리점 소장의 전화 통화 내용
지난해 12월 26일 택배 기사 A 씨와 대리점 소장의 전화 통화 내용
이렇듯 돌아온 건 8년 동안 함께 일해온 소장의 폭언이었다. 심지어 대리점 소장은 자신이 한국노총 조합원 상당수를 확보했다는 이해하기 힘든 말도 했다. 대리점 소장은 분명 사측이므로, “노조원을 확보했다”는 것은 결국 사측이 노조 결성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지난해 12월 26일 택배 기사 A 씨와 대리점 소장의 전화 통화 내용.
이 대리점의 또 다른 택배 기사 B 씨는, 택배 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리점 소장으로부터 한국노총 노조의 간부 자리까지 제안받았다고 말했다.
OO 대리점 쪽에 민주노총 애들이 많이 있는데 자기네도 거기에 맞설 뭘 만들어야 할까 싶어서 협동조합 스타일로 몇 개의 대리점이 모여서 한 개의 단체를 만들려 한다, “형, 그거 뭐 한국노총 만들려 그러죠?” 그러니까 이실직고하더라고요. 맞는다고. 맞다 하면서 기왕 하는 거 네가 그런 비슷한 일을 많이 해봤으니까 나이도 어차피 또 다른 애들보다 중간 정도 되고 하니까, 총무나 사무국장을 맡아서 해보면 좋지 않겠냐, 인원도 늘어나고 하면 판공비도 좀 나가고 하면 자기가 또 챙겨줄 건 챙겨주고 할 테니까. 

택배 기사 B 씨

두 노조의 조합원 수 경쟁, 그사이 등장한 ‘사장님’

대리점 소장 즉, 사장님이 결성에 개입한 것으로 보이는 이 한국노총 노조는 ‘전국택배연합노조’라는 이름으로 지난해 연말 강원도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뉴스타파 취재진에게 민주노총 택배노조의 지나친 집단행동 때문에 새 노조를 설립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 노조가 설립된 때는 공교롭게도 민주노총 택배노조가 대리점 소장과 한창 교섭을 벌이던 시점과 일치한다.
지난 2월 7일, 강원도 동해의 CJ대한통운 서브 터미널에서 한국노총 전국연대노조 택배산업본부 강원지부가 출범식을 가졌다.
올해 2월 한국노총 전국택배연합노조가 ‘한국노총 전국연대노조 택배산업본부’로 조직 형태를 바꾸고 공식 출범하면서부터 갈등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한 사업장에 두 개의 노조가 생기면서 기존에 진행되던 민주노총 택배노조의 교섭이 중단됐다. 대표성을 가진 과반노조가 어느 쪽인지 가려야 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는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라는 게 명시돼있다. 한 사업장에 노동조합이 2개 이상이면 교섭대표노동조합을 정해 사측에 교섭을 요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노조끼리 자율적으로 대표 노조를 결정하지 못하면 조합원이 더 많은 쪽이 교섭대표노조가 된다. 상대 노조원 숫자가 잘못 계산됐다는 생각이 들면 지방·중앙노동위원회의 판단을 받을 수 있다.
결국 교섭권을 가진 대표 노조가 되기 위해 단 한 명의 조합원이라도 더 데려오려는 두 노조의 경쟁은 필연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대리점 소장 즉, 사장님이 등장한 거다.

‘사장님 아들’까지 노조 가입 동원

대리점 소장들은 택배 기사들은 물론 자신들과 계약한 단기 아르바이트 직원인 분류 작업자, 대리점 사무직원인 OP(operator), 택배 기사 옆자리에 앉아 배송 업무를 돕는 동승자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노조 가입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강원지방노동위원회의 결정서 일부. 강릉 OO 대리점 과반수 노동조합에 대한 이의 신청 사건을 판정한 내용이다.
강원도 강릉의 한 대리점 소장은 대리점에서 일하고 있던 자신의 아들까지 조합원 수 늘리기에 동원했다. 아내를 동원한 대리점 소장도 있었다. 과반노조를 가린 지방노동위원회의 결정서에도 이런 사실이 적혀 있다. 
동해 같은 경우에는 대리점 소장의 와이프(부인)가 한노총에 가입했었고, 저희 강릉 같은 경우에는 대리점 소장의 아들. 한지붕 아래서 매일 밥을 먹으면서 얼굴을 보는 사이인데, 어떻게 사용자와 같이 밥을 먹고 지내는 사이가 노동조합에 가입해서 이렇게 활동할 수 있는가...

이수헌 민주노총 전국택배노조 강원본부 사무국장
이처럼 대리점 소장이 가입을 유도했다는 노조는 한국노총 전국연대노조 택배산업본부, 한국노총 부산지역 비정규직 일반노조,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 택배지부 등 다양했다. ‘민주노총 전국택배노조’에 맞설 수 있는 노조라면 한국노총이든 민주노총이든 가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든 사업장에 복수 노조를 만들어, 단체교섭을 지연시키거나 방해하려는 의도가 비치는 대목이다.
강원과 경기, 부산과 울산 등 여러 지역에 걸쳐 CJ대한통운과 롯데택배, 한진택배 대리점들에선 대리점 사장들이 만든 이 제2 노조들이 교섭대표노조가 되고 있다. 복수 노조 상황에서는 교섭대표노조를 가리는 데 필요한 절차와 시간이 있기에, 택배 기사의 일터를 바꿀 교섭은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다.

마름과 소작농의 전쟁을 지켜보는 ‘지주’

뉴스타파는 논란이 된 대리점 소장 5명을 모두 찾아가 봤다. 의혹을 부인하거나 대화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의미 있는 답변 하나를 들을 수 있었다.
노조들 요구하는 건 우리가 들어줄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봐야 해요, 전부 다. (물류)센터, 뭐 우리 것도 아니고 본사 거고. 그만큼 손도 못 대는 거고. 솔직히 중간에 딱 낀 사람입니다. 저리 치이고, 이리 치이고, 미치겠습니다. 때려치우지도 못하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대리점 소장 C 씨
이 대리점 소장이 ‘중간에 낀 사람’이라고 자신을 스스로 빗댄 것은 대리점 위에 이른바 본사, CJ대한통운을 포함한 대형 택배 회사가 있기 때문이다.
택배 기사와 대리점이 배송 계약을 맺고, 이 대리점이 대형 택배 회사와 다시 계약을 체결하는 이중 구조 속에서 대리점 소장들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택배 기사들이 요구하는 배송 수수료 인상과 같은 노동조건 개선은 대리점 소장 혼자서, 자체적으로 수용하기 힘든 구조라는 얘기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의 박석운 대표는 이들의 관계를 지주와 마름, 소작농에 비유한다. 대리점 소장과 택배 기사, 이 마름과 소작농의 전쟁에서 쏙 빠진 채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지주가 대형 택배 회사라고 설명한다.
이에 뉴스타파는 CJ대한통운과 롯데택배, 한진택배에 대리점 소장들의 ‘복수 노조 만들기’ 작업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그들끼리의 문제일 뿐”(CJ대한통운)이란 말과 “사실 확인을 해보겠다”는 답변 정도가 돌아왔다.
하지만 CJ대한통운의 경우, 강릉과 부산 등 일부 지역에서 대리점의 노사 문제에 개입하다 덜미가 잡힌 적이 있다. 택배 기사들의 노조 가입 경위서를 취합해오라고 대리점에 지시하거나, 노조의 부분 파업에 대한 대리점의 강경한 대응을 주문하는 식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들 대형 택배 회사들은 직접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사 교섭에는 응하지 않으면서, 뒤로는 ‘마름’인 대리점 소장들을 움직여 노사 갈등에 개입을 해온 셈이다. 이 때문에 지난해 연말부터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대리점 소장들의 복수 노조 설립 공작에도 이들 대형 택배 회사의 본사가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나오고 있다.  
민주노조가 결성되면 곧바로 어용노조가 또 결성되고, 거기에 가입을 시킨다거나 가입을 회유, 권유, 협박, 이런 것들이 이뤄지는 건 저는 개별 대리점주들이 어떤 시기에 우연히 그런 행위들을 동시에 했을 거로 생각하지 않거든요. 오히려 이거는 이 개별 대리점주들을 통제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작용하지 않는 이상은 전국에서 동시에 이런 식의 행위들이 일어나기는 오히려 더 어려운 부분이라고.

박준성 금속노조 법률원 공인노무사
최근 중앙노동위원회는 하청 노조인 대리점 소속 택배 기사 노조에 대해, 원청인 CJ대한통운이 단체교섭에 나서야 한다고 판정했다. 대형 택배 회사의 노조법상 사용자성을 중노위가 인정한 것. 하지만 CJ대한통운은 중노위 판정을 수용하지 않고 소송을 통해 법적 판단을 다시 받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파업할 수 없는 노동자들…단체협약 없이는 2차 사회적 합의 이행도 불투명

지난 9일, 민주노총 전국택배노조에 가입한 택배 기사들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을 위한 사회적 합의 기구'가 택배 기사들의 노동조건 개선에 관한 최종 합의를 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면 파업에 동참한 이들은 전체 조합원의 3분의 1이 채 안 되는 2천 명 정도였다. ‘사장님’들이 만든 복수 노조 때문에 교섭대표노조가 되지 못했고, 그 결과 쟁의권이 없어 파업에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9일 총파업에 돌입한 민주노총 전국택배노조 조합원들의 모습
일주일의 파업 끝에 어제, 사회적 합의 기구가 잠정 합의를 이뤄내면서 파업은 철회됐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의 주원인으로 지목돼 온 분류 작업을 내년부터는 별도 인력으로 처리하기로 합의됐다. 그런데 이 합의 내용은 사실상 지난 1월에 이루어진 1차 사회적 합의와 비슷하다. 1차 사회적 합의가 현장에서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2차 사회적 합의가 필요했던 거다. 
1차 사회적 합의가 이행되지 않은 이유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노사 간 단체협약에 이 내용이 명시되지 않은 탓이다. 따라서 단체협약에 이 같은 내용이 명시되지 않는 한, 2차 사회적 합의의 이행 역시 불투명하다. CJ대한통운 등 대형 택배 회사가 택배 기사들과 직접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걸 거부하고 있는 만큼, 우선 대리점 소장들과 택배 기사들 사이 단체협약이 체결돼야 하는 상황. 하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대리점 소장들이 개입해 만든 제2 노조와 기존 민주노총 택배노조의 갈등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22일, 박근희 CJ대한통운 대표이사가 택배 노동자 과로사에 책임을 지고 사과했다.
잇따른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에 책임을 지고, 박근희 CJ대한통운 대표이사가 전 국민 앞에 머리를 숙인 지 8개월 가량 지났다. 그러나 사과 이후에도 7명의 택배 노동자가 과로사했다. 지난해부터 세면 무려 30명의 택배 노동자가 과로로 인한 뇌출혈 등으로 쓰러지거나 숨졌다. 택배 노동자들의 투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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