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협회의 '공염불' 사회적 책임

2013년 10월 01일 07시 22분

경기도 일산에 위치한 카프병원. 알코올 중독 치료병원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이자 하나밖에 없는 비영리 공익기관이다.

1996년, 술에 건강부담금을 부과하는 법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법안이 통과된다면 주류업체들은 술 한 병당 5원씩, 매년 100억 원 가량을 부담해야 했다. 이 법안은 부결됐지만 보건복지부가 연이어 건강증진기금 부과 계획을 발표하는 등 술에 대한 건강부담금은 사회적 호응을 얻으며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그러자 지난 2000년, 주류업체들로 구성된 한국주류산업협회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며 기금을 조성해 ‘카프’ 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을 통해 알코올 중독 전문 병원을 세우고 매년 운영비 50억 원을 지원하겠다는 각서를 보건복지부에 제출했다. 그 후 건강부담금에 대한 논란은 잠잠해졌다.

그런데 지난 2011년, 주류협회는 10년 동안 지속해오던 재단에 대한 지원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협회가 내세우는 공식적인 이유는 ‘예방기능 강화’. 병원은 문을 닫았고 치료 중이던 환자들은 반강제적으로 퇴원해야 했다. 이중에는 제대로된 치료를 받지못해 숨진 환자도 있다.

주류협회가 약속했던 사회적 책임은 건강부담금을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을까.


<앵커 멘트>

여러분, 카프 병원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알코올 중독자들을 치료하는 전문 병원인데요. 지난 96년 국회가 술 한 병에 5원씩 건강부담금을 부과하려 하니까 주류협회가 이 부담금을 회피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이 병원 설립 후 건강부담금을 물리자는 이야기는 잦아들었는데요. 그동안 카프병원을 지원해오던 주류협회가 10년 만에 지원금을 끊었습니다. 앞으로는 예방사업에 치중하겠다는 것입니다.

건강부담금을 낼 걱정이 사라져서일까요.

박경현 피디가 취재했습니다.

<박경현 PD>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하는 백덕수씨. 밝은 얼굴로 일하는 백씨에게서 어두웠던 과거의 그림자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백덕수 / 알코올중독 치료 경험자]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술을 접하고 나서 (알코올 중독이었던) 아버지 모습으로 가는데 1년도 안 걸렸어요. 친구들하고 싸우고.”

35년간 술 때문에 수차례 이혼위기를 겪고 경찰서도 여러 번 드나들었지만 8년 전부터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심한 알코올 중독자였던 백씨는 한 병원의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프로그램 덕분에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경기도 일산에 위치한 ‘카프’ 병원. 알코올 중독 치료 병원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이자 하나밖에 없는 비영리 공익기관입니다. 이곳을 찾은 환자들은 약물 치료 등을 받고 거주시설로 옮겨가 일정기간 단주와 회복훈련을 거칩니다. 그 뒤 재활 과정을 거쳐 취업까지 지원을 받게 됩니다. 백씨가 일하는 ‘카프 카페’는 재단이 운영하는 직업재활 프로그램의 하나입니다.

1996년, 술에 건강부담금을 부과하는 법안이 국회에 제출됐습니다. 법안이 통과되면 주류업체들은 술 한 병당 5원씩을 부담해야 했습니다. 합하면 매년 100억 원 가량이 거둬질 것으로 전망됐습니다. 이 법안은 결국 부결됐지만 그 후 보건복지부가 연이어 건강기금 부과 계획을 발표하는 등 술에 대한 건강부담금은 사회적 호응을 얻으며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지난 2000년, 주류업체들로 구성된 한국주류산업협회는 자발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며 기금을 조성해 ‘카프 재단’을 설립합니다. 재단을 통해 알코올 중독 전문 병원을 세우고, 매년 운영비 50억 원을 지원하겠다는 각서를 보건복지부에 제출했습니다. 이후 건강부담금 법제화는 잠잠해졌습니다.

그런데 2011년, 주류협회는 10년 동안 지속해오던 지원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렸습니다.

협회가 내세우는 공식적인 이유는 ‘예방기능 강화’. 앞으로는 알코올 중독 치료가 아니라 공익 광고와 같은 예방 사업에 치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병원과 재활시설을 없애라고 재단에 통보했습니다.

결국 많은 알코올 중독 환자들을 새 삶으로 이끌었던 병원은 문을 닫았습니다. 치료 중이던 환자 85명은 올해 6월 반강제로 퇴원해야 했습니다. .

[정OO / 카프병원 강제퇴원자]

“조금 더 치료를 받으려고 했는데 자의와 관계없이 퇴원을 하게 되니까 조금 당황스러웠고...”

남아있는 병원 직원 15명도 다섯 달째 임금도 받지 못한 채 문 닫은 병원을 지키고 있습니다

환자들은 재단과 연계된 거주 시설로 옮겨왔지만 지원금 중단으로 거주, 재활 시설마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주류협회가 주최하는 국제세미나가 열렸습니다.

 같은 시각 호텔 밖에서는 ‘알코올 유해성 감소’를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는 주류협회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정철 카프병원 노조 분회장]

“알코올 환자 100명이 길거리로 쫓겨났습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알코올 중독으로 되돌아갔고 죽은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행사장까지 찾아와 병원 폐쇄로 인한 절박한 사정을 전달했지만 주류협회는 치료와 재활을 없애겠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종진 한국주류산업협회 상무]

“재단이 세월이 가면서 모든 게 이제 소수를 위한 치료재활로 지금 변모를 했어요.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지금 치료병원이라는 게 알콜 중독 치료병원은 보건복지부가 선정한 6개 전문병원을 포함해 전국에 약 400여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치료부분은 우리가 손을 떼도 된다.”

그러나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6개의 전문병원은 입원치료만 가능할 뿐, 카프 병원처럼 장기적인 치료와 재활을 모두 하는 곳은 없습니다.

2000년 당시 카프 재단 설립을 주도했던 주류협회 조성기 박사. 알코올 중독은 개인이 아닌 사회적 책임이며 치료와 재활이 중요함을 누구보다 강조해 왔지만 주류협회의 지원금 중단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습니다.

[조성기 주류협회 연구본부장]

“노조나 관련된 분들은 나름대로 주장을 하죠. 주류협회는 협회 나름대로 주장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물론 (병원의) 노하우가 사라지는 것은 아쉽죠. 그런데 경영 문제잖아요.”

[박용덕 건강세상네트워크 사무국장]

“몇 천억, 몇 조에 이르는 준조세를 회피하기 위해서 우리가 최소한 이 정도의 돈을 내서 사업을 이행하겠다, 알콜피해 환자들에 대한 소비자사업을 이행하겠다는 약속의 결과로써 이 출연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종의 의무이행금 같은 것인데 마치 자기들이 선행을 하거나 기부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카프 공동대책위원회는 더 이상 주류협회에 병원을 맡길 수 없다고 보고 공공병원 전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재단의 관리, 감독을 책임지고 있는 복지부는 공공병원으로 전환할 계획도 없고 특별히 운영에 관여할 수도 없다는 입장입니다.

[보건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

“저희가 세부적인 사항까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내부 이사회를 통해서 중요한 사안이 결정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국 주류협회가 약속했던 사회적 책임감은 건강부담금을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셈입니다.

뉴스타파 박경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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