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朝東)100년] ⑥ '강제 폐간'의 진실, 총독부 비밀문서 첫 확인

2020년 03월 16일 08시 00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30년대 후반부터 수시로 일왕 부부의 사진을 1면 중앙에 배치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1940년에 들어서 일왕 관련 기념일마다 조선일보 제호 위에 붉은 일장기를 인쇄했다. 이 두 신문은 1940년 8월 폐간된다. 조선총독부는 1930년 후반부터 일제에 충성을 다한 두 신문을 왜 폐간시켰을까.

▲ 조선, 동아 40년 8월 폐간호,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

지금까지 두 신문은 조선총독부 탄압으로 강제 폐간됐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조선일보가 창간100년을 맞아 지난 3월 5일 발행한 ‘민족과 함께 한 세기’의 한 대목이다.


동아일보와 합심해 폐간 반대 투쟁에 나섰다는 조선일보의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뉴스타파는 조선일보의 주장과 상반되는 내용을 기록한 조선총독부 비밀문서를 확인했다. 일제강점기 언론 연구자들 사이에선 알려져 있었지만,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자료다.

1940년 2월 25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정무총감에게 보고한 비밀문서다. 제목은 “언문(한글)신문 통제에 관한 건”. 2012년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이 공개한 ‘조선총독부 비밀문서 해제집’에 포함돼 있다.

▲ 조선총독부 비밀문서(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소장)

이 비밀문서에는 1939년 12월부터 1940년 2월까지 약 석달 동안 조선총독부가 두 신문사 사장과 접촉해 폐간 문제를 협의한 내용이 나온다. 총독부가 두 신문의 사장을 만나 폐간을 요구한 시점은 언제인지, 두 신문의 사장들은 각각 총독부 폐간 방침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이후 두 신문과 총독부간 폐간 협의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됐는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장신 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위원은 “조선, 동아 두 신문이 어떤 방식으로 폐간에 임했는지 보다 정확히 알 수 있는 총독부 자료”라고 말했다.

이 비밀 문서에 따르면, 1939년 12월 22일 미쓰하시 코이치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먼저 당시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를 경무국 관사로 불러들인다. 미쓰하시는 미나미 총독의 심복이다.

두 사람은 관사에서 저녁을 같이 했고, 이 자리에서 경무국장은 방응모에게 조선일보 폐간을 요구한다. 그리고 방응모는 폐간 방침에 순응하겠다는 취지로 답한다. 첫 만남에서부터 방응모는 총독부의 폐간 방침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틀 후인 12월 24일, 방응모는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장을 만나 폐간에 따른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하기 시작한다. 방응모는 이후 총독부와 몇차례 더 협의를 했다. 해를 넘기고 1940년 1월 13일, 방응모는 총독부에 서명 날인한 ‘폐간 각서’를 제출한다. 총독부와 합의한 폐간 시점은 일제 기원절인 1940년 2월 11일이다.

이 과정에서 방응모는 폐간 각서를 제출하는 조건으로 조선총독부에 6가지를 요구한다. 6가지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방응모의 6가지 요구 조건 가운데 동아일보와 함께 폐간해 줄 것, 폐간될 때까지 협의 과정은 극비로 할 것이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총독부 비밀문서에는 ‘체면이 좋지 못하다’는 식의 표현이 등장한다.

장신 상임연구위원은 “방응모는 총독부에 폐간 각서를 제출했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면 조선일보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는 사실을 방응모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방응모는 이밖에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잡지인 조광, 여성, 소년은 계속 발행할 것, 그리고 폐간에 따른 일종의 보상금도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총독부는 실제 조선일보 폐간 이후에도 조선일보 자매지인 조광 등의 발행을 계속 허용했다. 또 보상금 명목으로 돈을 지급했다.

그렇다면 경쟁지이던 동아일보는 어땠을까. 1940년 1월 16일 미쓰하시 경무국장은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와 고문을 맡고 있던 송진우를 관사로 불러들인다. 시점은 방응모가 폐간 각서를 제출하고 사흘 뒤였다. 경무국장은 백관수, 송진우 두 사람에게 동아일보의 폐간을 요구한다.

▲ 1940년 당시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왼쪽), 동아일보 고문 송진우(오른쪽)

백관수와 송진우는 즉답을 피했다. 폐간하지 않겠다고 명시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책이라면 따라야 하지만, 후일에 대답하겠다’고 답을 유보했다. 엿새 후인 1940년 1월 22일,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는 경무국 보안과장을 만나 ‘당국 방침의 의향을 완전히 이해할 능력이 부족하여 폐간 협의에 응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총독부의 폐간 제안을 거부한다.

이틀이 지난 1월 24일, 경무국장은 관사로 백관수와 송진우를 불러, ‘당국의 협의에 신중히 다시 생각할 것을 권유’하며 폐간을 요구했다. 두 사람은 거부했다.

이후 조선 총독부와 두 신문 사이에 폐간 협의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비밀문서에 나온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일보 방응모부터 살펴보자.

방응모는 1월 29일 총독부 경무국장을 다시 만난다. 비밀문서에는 이날 방응모가 경무국장에게 ‘국책에 순응할 뜻이 있지만, 체면상 동아일보도 동시에 폐간시켜야한다’는 내용의 말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방응모가 다시 한번 동아일보와의 ‘동시 폐간’을 언급한 것이다.

2월 2일, 방응모는 경무국 보안과장과 도서과장을 잇따라 만난다. 방응모는 이 자리에서 총독부가 장래에 새로 발간하려고 하는 경제신문의 경영을 조선일보에게 맡겨 줄 것, 또 폐간 시점을 2월 11일이 아닌 3월 31일까지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한다.

1940년 2월 7일, 경무국장은 조선일보 방응모, 동아일보 백관수, 송진우를 한꺼번에 경무국 도서과장실로 불러들인다. 비밀문서에 따르면, 경무국장이 폐간과 관련 두 신문의 대표자를 동시에 만난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이날 경무국장은 동아일보 측에 ‘조선일보사는 이미 폐간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전하며 동아일보의 폐간을 다시 한번 권유한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총독부의 폐간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장신 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위원은 “1940년 2월 7일, 이날 동아일보는 경무국장으로부터 방응모가 총독부에 폐간 합의를 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들었을 것이고, 방응모 역시 동아일보와 함께 폐간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사이 총독부와 방응모 사이에 이뤄진 비밀 합의, 즉 동아일보와 함께 조선일보를 폐간하기로 한 합의 시점인 2월 11일을 넘기고 말았다.

2월 14일, 방응모는 경무국장을 만났다. 방응모는 ‘폐간에는 이의가 없지만 모든 이해관계를 무시하고 동아일보와 같은 날짜에 폐간하겠다’는 뜻을 전한다. 경무국장은 방응모에게 “더이상 (합의) 비밀을 엄수할 수 없으니 불리함은 감수해야 하고, 동아일보와 동시에 폐간하면 사원 구제 등 여러 면에서 받을 이익의 감소를 감수하라”고 통보한다.

결국 이 비밀문서의 내용을 정리하면, 조선일보의 주장과 달리 1940년 2월 25일 시점 까지는 두 신문이 합심해 폐간 반대 투쟁에 나서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조선일보 방응모는 총독부 폐간 방침에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응하며 폐간 각서를 제출했다. 또한 폐간 조건으로 동아일보도 함께 폐간해줄 것을 요구했다. 반면 동아일보는 폐간에 대한 확답을 피하고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 비밀문서가 작성된 1940년 2월 25일까지는 폐간 방침에 순응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과 동아, 두 신문은 1940년 8월 동시에 폐간된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폐간 보상금 명목으로 조선일보에 80만 원, 동아일보에 50만 원씩을 책정했고, 실제 그렇게 지급했다. 당시 헌납 비행기 한대 값이 5만 원에서 10만 원 사이였다. 40년 폐간 당시 두 신문의 발행 부수는 조선 6만 3,000부, 동아 5만 5,000부 정도였다.

그렇다면 일제가 이렇게 막대한 돈을 지급하면서까지 두 신문을 폐간시킨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박용규 교수는 “큰 틀에서 언론 통폐합 정책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침략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물자가 부족해졌고, 신문 지면이 획일화된 상태에서 굳이 조선, 동아, 매일신보 등 한글신문을 3개나 발행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 당시 일제는 각 지방에서 발행하던 일본어 신문을 1개로 줄이는 통폐합 정책을 추진했다.

“조선, 동아 두 신문이 강제 폐간이라고 하는 것은 수익을 내는 기업으로서의 신문을 계속 발행하려고 했음에도 일제가 발행하지 못하게 했다. 이 측면에서 일말의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신문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비판적이고 저항적인 논조 때문에 보상도 없이 강제 폐간한 것 같이 얘기하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박용규 상지대 미디어영상광고학부 교수

해방 후 조선과 동아 두 신문은 1945년 11월 23일과 12월 1일 차례로 복간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친일행위를 반성도, 사죄도 하지 않았다.

▲ 한국연구원이 소장 중인 1945년 11월 조선일보 복간호 원본

서울 마포구 한국연구원이 소장 중인 1945년 11월 23일자 조선일보 복간호 원본을 보면, 1면 지면이 찢겨져 나가 있다. 찢겨 나간 지면에는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사진과 함께 그가 쓴 속간 기념 기고문이 실려 있었다.

박용규 상지대 교수는 조선과 동아 두 신문에게 1940년 폐간은 ‘역설적인 사건’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두 신문이 자신들이 원했던 대로 40년에 폐간되지 않고 존속이 된 상태로 5년 동안 더 계속 발행하다 45년 8월에 해방을 맞이했다면 친일적 지면을 지속적으로 보여왔던 두 신문에 대한 ‘친일의 기억’이 해방 이후 한국인들에게 모두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 두 신문이 ‘민족지’를 내세우면서 해방 이후에도 계속 발행될 수 있었을까 저는 대단히 의문이 듭니다. 역설적이게도 두 신문이 40년에 폐간되었다는 것, 그것 때문에 1945년에 복간될 수 있었고 ‘민족지’ 신화를 만들어 ‘민족주의’ 신문이었음을 내세울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박용규 상지대 미디어영상광고학부 교수

취재진은 지난 2월, 조선총독부 비밀문서를 소장 중인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을 찾았다. 이날 취재진은 이 문서와 관련해 조선과 동아 측에서 연락이 온 적이 있었는지 물었다. 박물관 관계자는 “자료 요청을 해 온 언론사는 없었다. 동아일보에서 관심이 있었지만 ‘김성수와 관련된 내용이 있느냐?’는 문의였고, 문서 내용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1945년 복간한 조선, 동아 두 신문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어떤 기사를 써내려 갔을까. 또 두 신문사의 사주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역대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어 나갔을까. [조동(朝東)100년] 의 실체를 밝히는 연속보도는 다음 편(3월 17일 화요일)에 계속된다.  



제작진
취재박중석 김용진 조현미 홍주환
데이터최윤원
촬영최형석 신영철
편집조문찬
그래픽정동우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
공동기획민족문제연구소
공동조사역사디자인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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