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삐라 심리전

2020년 07월 27일 19시 53분

적을 삐라로 파묻어라!

한국전쟁 때 미국 육군부 장관 프랭크 페이스가 한 말이다.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미군이 주도한 유엔군 측은 한국전쟁 3년 동안 최소 25억 장에서 최대 40억 장의 삐라를 제작해 한반도에 살포했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한국전쟁 70년(관련 기사: 美 공군 폭격, ‘초토화작전’)과 휴전 67년을 맞아 미국국립문서기록청에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뿌린 삐라 3천여 점을 수집해, 다양한 삐라 유형과 살포 방식을 분석했다. 아울러 ‘삐라 심리전’의 현재적 의미도 살펴봤다.

▲ 한국전쟁 당시 미군 삐라 살포 시연회. 미국 육군부 심리전 책임자 맥클루어 준장 등이 참석했다. 1951.10.19

▲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뿌린 삐라. 뉴스타파는 미국 국립문서기록청에서 미군 삐라 3500여 장을 수집, 분석했다.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측 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북한·중국군 측 대표 남일 대장이 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3년간의 전쟁은 멈췄다. 하지만 휴전 후 67년이 지나는 지금까지 끝나지 않은 전쟁이 있다. 바로 ‘삐라 심리전’이다.

북한은 지난 6월 16일 오후 개성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6월 4일 김여정 북한노동당 제1부부장이 <노동신문>을 통해 “반공화국 삐라를 우리측 지역으로 날려보내는 악의에 찬 행위들이 방치된다면 남조선 당국은 머지않아 최악의 국면까지 내다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 뒤였다. 이에 앞서 지난 5월 31일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 등은 김포시 월곶면에서 북한 김정은 위원장을 비난하는 삐라를 살포해 북한을 자극한 바 있다.

▲ 북한, 개성공동연락사무소 폭파. 2020.6.16

남과 북은 1953년 휴전 이후에도 양측 체제를 상호 비방하는 전단지를 풍선 등으로 날려보내며 심리전을 이어갔다. 하지만 1991년 9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뒤,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한 비방과 중상을 하지 않는다”고 명시하면서 정부 차원의 삐라 살포는 중단됐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탈북자단체가 주도하는 대북 전단 살포 행위가 시작됐다.

▲ 탈북자 단체가 접경지역에서 대북 전단 풍선을 날리고 있다.

송영길 의원이 통일부에서 받은 연도별 대북 전단살포현황을 보면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여러 탈북자단체가 지난 10년간 살포한 대북 전단은 2천만 장에 이른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 해외사료수집팀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조인 67주년을 맞아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에서 수집한 한국전쟁 당시 미군 살포 삐라(leaflet) 3500여 점과 한국전쟁 시 심리전을 총괄한 극동군총사령부 및 미8군 사령부 심리전 담당 부대의 홍보영상, 전단 살포 영상 등 수십 건을 토대로 ‘삐라 심리전’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분석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B-29 등 대형 폭격기를 이용해 전단을 가득 채운 포탄을 투하하는 방식, 소형 항공기를 이용한 손 살포 방식, 105밀리 곡사포와 박격포 포탄에 삐라를 채워 지상 포격을 하는 방식 등을 주로 동원했다.

▲ 한국전쟁 당시 일본 도쿄 인근 비행장에서 극동사령부 심리전 부대원들이 B-29 폭격기에 탑재할 포탄 안에 전단지를 넣고 있다. 500파운드 폭탄 탄피 하나에 22500장의 삐라가 들어갔다.

미군이 뿌린 삐라 유형은 투항권고, 안전보장, 향수자극, 전의상실 유도, 공산당 및 체제 비판, 북한지도부 비판 등으로 분류된다.

▲ 미군이 좋은 대우를 약속하며 투항을 권유하는 ‘안전보장증명서’ 삐라

▲ 미군은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하는 것이 전쟁에 지친 적군에게 효과적인 심리전이라고 분석했다.

▲ 북한 공산당 지도부를 괴물로 그려 체제 불신을 유도한 미군 삐라

▲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살포한 삐라. 8.15 전 일제강점기 일제 장교로 복무한 리종찬, 백선엽, 김석원이 해방 후엔 미국 앞잡이가 됐다고 풍자하고 있다. 이들의 창씨개명을 적어놓았다.

미군이 한국전쟁 때 살포한 삐라, 특히 북한 체제를 비판하고 북한 지도부를 괴물이나 짐승 등으로 비인간화한 내용의 삐라는 휴전 이후에도 대한민국 교과서에 이식됐다.

▲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뿌린 삐라 내용이 들어간 도덕교과서

뉴스타파 취재진은 미국이 휴전 이후 종래의 항공기나 대포를 동원한 삐라 살포 방식이 아니라 풍선을 이용한 살포 방식을 한국 백령도에서 실험한 보고서를 발견했다. 해당 비밀 보고서는 미국 CIA가 1955년 미공군 항공기상대 등과 합동으로 풍선을 이용한 삐라 살포 방법을 실험한 내용을 상세히 담고 있다.

▲ CIA 비밀보고서. 미국정보기관 CIA가 미공군 기상대와 합동으로 백령도에서 1955년 6월부터 9월까지 대규모로 풍선 발사 실험을 한 내용이 담겨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CIA 작전팀이 1955년 6월부터 9월까지 모두 10차례에 걸쳐 띄워 올린 J-100 타입 풍선만 4천여 개, 사용한 수소가스 실린더가 천 개가 넘었다.

뉴스타파는 또 미8군 심리전 부대가 북쪽으로 보낼 각종 전단과 생활 물품 등을 봉투에 넣는 장면이 담긴 1968년 제작 기록영상을 확인했다. 이 영상에는 이 물품을 강에 띄워 보낼 예정이라는 설명문이 달려 있다.

미국 정보기관과 심리전 부대가 5-60년대에 실험하고 실행한 삐라 살포 방식을 현재 탈북자단체가 이어받은 셈이다.

뉴스타파는 이른바 ‘종이폭탄’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삐라 살포를 통한 심리전이 현재 한반도와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심리전 및 삐라 연구 전문가와 남북 관계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분석했다. 다음은 주요 인터뷰이(가나다 순)

· 김동엽 교수(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 이임하 교수(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 전갑생 뉴스타파 전문위원(서울대 연구원)
· 정용욱 교수(서울대 국사학과)
· 팀 셔록 뉴스타파 객원기자(워싱턴 주재 한반도 전문가)

제작진
취재이명주
촬영최형석 오준식 정형민 김기철
편집정지성
CG정동우
디자인이도현
웹출판허현재
해외기록수집전갑생
글 구성김용진
내레이션김정
연출최윤원 이명주 김용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