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실격 ② 만드는 자와 챙기는 자

2021년 12월 15일 19시 35분

4년 전 뉴스타파는 '금융의 자격' 연속 보도를 통해 우리 사회 금융의 민낯을 들여다봤다.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금융사와 금융소비자 간의 불공정한 금융 거래 실태를 밝히고 개혁을 주문했다.
 이제 변화의 골든타임이 지났다. 위기는 현실이 됐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개인, 기업들이 벼랑 끝에 몰리고 있다. 금융의 사회적 역할, 안전망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그 사이 금융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금융의 자격에 걸맞게, 주문했던 개혁 과제들을 잘 이행해 왔을까. 뉴스타파가 '금융 실격' 연속 보도를 통해 다시 한번, 금융에 자격을 묻는다.

편집자 주
미중 무역 마찰과 원자재 가격 상승, 그리고 장기화된 코로나 사태까지 연이은 거시 경제의 파고 속에 우리 경제의 허리가 흔들리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영업이익으로 금융 대출 이자도 갚지 못하는 한계기업이 무려 41%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년 대비 4.3%p나 오른 수치다. 대출 상환 유예 조치가 끝나는 내년 3월 이후에는 그 수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거시 경제의 충격파는 재무구조가 취약한 중소기업들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이미 중소기업의 절반(50.9%)은 부채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들 한계 중소기업을 '좀비 기업'이라고 부른다. 금융계 전체의 건전성을 해치고 있으니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한다. 하지만 숫자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는 곳은 드물다. 우리나라 고용의 82.9%는 중소기업에서 나온다. 청산할 기업은 청산하더라도 가급적 많은 우량 기업을 알아보고 살려내는 이른바 '옥석 가리기'가 중요한 이유다.
△ 금융 이자를 못 갚고 있는 한계기업이 41%에 이른 가운데, 우량 기업을 알아보고 살려내는 이른바 '옥석 가리기'가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들 한계 중소기업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곳은 은행을 포함한 금융계다. 881조 원 중소기업 대출 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 회사들의 판단에 따라 기업인의 꿈, 노동자의 일터, 그리고 가족들의 삶이 달라진다. 이를 두고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기업인과 노동자, 즉 '만드는 자'의 삶이 이들의 경제 활동에서 이윤을 거두는 금융계, 즉 '챙기는 자'들의 손에 포획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과연 우리 사회의 '챙기는 자'들은 위기에 놓인 '만드는 자'들을 두고 제대로 된 옥석 가리기를 하고 있을까. 한 중소기업의 사례를 통해 벼랑 끝에 몰린 중소기업이 부딪쳐야 하는 혹독한 금융 현실을 들여다 봤다.

위기의 순간, '1 파운드 살' 요구하는 금융

높은 창을 뚫고 들어온 빛이 어두운 공장을 가른다. 내려찍는 프레스기 소리와 용접봉 불꽃 소리가 적막한 공장에 리듬을 만든다. 까만 기름때 묻은 마스크 너머 청년 노동자의 흰자위가 카메라를 향해 반짝인다. 하나의 유기체처럼 공장은 생동한다.
경기도 김포시 소재의 중소기업 성화전기공업. 대표 정동규 씨가 공장 구석구석을 안내하며  들떴다. 작지만 알찬 공장, 그리고 숙련된 직원들이 그의 자랑이다. 철로 만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한다. 기존에 없는 제품이라면 직접 설계와 개발도 할 수 있다. 다품종 소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회사의 최대 강점이라고 한다. 
덕분에 입소문을 타고 매일같이 주문 전화가 들어온다. 전화가 걸려오는 곳에는 대중이 없다. 전력, 철도, 건축, 토목, 한때 방위 산업 분야에서도 그를 찾았다. 내년에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 해외 주문 수주를 앞두고 있다. 
△ 성화전기공업 정종규 대표. 32년 전 맨손으로 시작해 연 매출 200억 원, 직원 수 120명 중소기업을 일궜다.
32년 전, 정 씨는 맨손으로 회사를 일궜다. 제조업의 꿈을 안고 직장을 나와 인천 셋방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청계천과 건설 현장에 전단지를 돌려 일감을 따냈다. 납기에 쫓기면서도 기술 개발은 멈추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기계를 만지다 손을 다쳤다. 지금도 움직임이 어색하다.
10여 년 기반을 닦은 후엔 기술력으로 도전해 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진입 장벽이 높았던 한국전력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당시 한전에는 재향군인회 출신이 수주를 독점하는 짬짜미가 공공연했다. 기술 자료를 들고 관계자를 쫓아다녀서 결국 기회를 잡았다. 지금은 한전의 까다로운 기술 기준을 맞추는 협력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평창 올림픽 때 세워진 송배전용 철탑이 이 회사 제품이다. 
2018년 정 씨의 사업은 이제 막 결실을 보고 있었다. 연 매출 200억 원, 직원 수는 120명을 넘겼다. 그러나 순항하던 사업에 위기가 찾아왔다. 일개 기업인이 막을 수 없는 거시 경제의 파고였다. 큰 손해를 입었지만 관록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엔지니어는 계속해서 공장을 돌리고 물건을 찍어냈다.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던 어느 순간, 생각지 못한 곳에 발목을 잡혔다. 30여 년 사업 여정의 동반자였던 금융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약속했던 살 1 파운드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고전 희극 속 고리대금업자처럼 금융이 회사를 조여들었다.

일시 상환, 블랙리스트... 찍히면, 죽는다

성화전기공업의 위기는 2018년 미중 무역 마찰에서 시작됐다. 주요 원자재인 철강 가격이 치솟았다. 물건을 만들어 낼 때마다 오히려 적자가 쌓이는 상황이 계속됐다. 엎친 데 덮친 격, 대기업과의 납품 거래에서 큰 손해를 입었다. 대기업의 주문에 따라 수십억 원 원자재 비용과 1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 철골 구조물을 만들었다. 하지만 납품을 앞두고 대기업은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했다. 원청의 설계 변경으로 인해 생긴 납품 지연의 책임을 제조사에 따졌다. 제품은 고철로 방치됐고 손해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이렇게 쌓인 한해 적자가 55억 원이 넘었다.
△ 대기업 납품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당하면서 손실을 떠안았다. 미중 무역 마찰이 시작된 2018년, 성화전기공업의 적자는 55억 원에 이르렀다.
대기업과 관계가 틀어지며 금융에도 문제가 생겼다. 계약 보증을 했던 금융사가 대기업과의 법적 분쟁이 끝날 때까지 보증 업무를 중단하겠다고 통보했다. 재정이 취약한 중소 제조기업에게는 치명상이었다. 계약 보증서를 내지 못하게 되면서 기존 수주 계약 건이 줄줄이 취소됐다. 이렇게 놓친 계약 금액이 40억 원이 넘는다. 다음 계약의 선금을 받아야 돌아갈 수 있는 회사 재정이 순식간에 멈춰 섰다. 
이른바 '금융계 블랙리스트'의 낙인도 문제였다. 보증 업무가 중단된 사실이 금융계에 알려지면서 돈을 빌려줬던 금융기관들이 채권 회수에 나섰다. 제2금융권이 먼저 움직였다. 이자 연체가 생기자 목돈을 일시에 상환하라고 요구해 왔다. 그리고 불과 통보한지 5일 만에 담보 부동산을 임의 경매에 부쳤다.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자, 처음엔 경영 정상화 절차를 밟자고 제안했던 시중은행들도 태도를 바꿨다. 회사의 금융 거래가 전면 중단됐고, 연체 이자가 붙으면서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었다. 견실했던 제조기업은 1년도 안 되는 사이, 수익으로 이자를 갚을 수 없는 한계기업으로 전락했다.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고 정 씨는 고백했다. 하지만 30년 쌓은 기술력과 신뢰, 끝까지 회사에 남겠다고 한 40여 명 직원들을 배신할 수 없었다. 힘겨운 제 살 깎기를 해서라도 어려움을 견디기로 마음먹었다. 작은 주문을 받고 공장을 돌렸다.
법원에 기업 회생을 신청했다. 외부 회계사를 통해 기업 가치를 평가했다. 다행히 기업계속가치가 청산가치보다 높게 나왔다. 채권자들만 뜻을 함께 해주면 천천히 빚을 갚아나가며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주춤했던 영업도 점차 살아나고 있었다. 2020년 말, 회사는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 성화전기공업은 10년에 걸쳐 전액 변제하는 회생 계획안을 마련했지만, 유암코를 비롯한 채권자들은 부동의했다.
그렇게 희망을 품은 순간, 금융이 다시 발목을 잡았다. 지난해 1월 채권자들이 성화전기공업이 마련한 회생 계획안 놓고 찬반 투표를 했다. 그러나 의결권 총액의 53.8%를 쥐고 있던 유암코가 반대를 했다. 유암코는 6개 시중은행이 공동 출자해서 만든 국내 최대 규모의 NPL (부실채권) 투자회사다. 배드 뱅크(Bad bank), 즉 부실채권을 사들여 처리하는 금융계의 '재활용 센터' 격이다. 유암코가 가장 많은 의결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채권을 갖고 있던 은행들이 이를 유암코에 팔았기 때문이다. 투표 결과는 부결이었다. 시간을 주면 천천히 빚을 갚아나가겠다는 성화전기공업의 손을 금융이 끝내 놓아버린 셈이었다. 
정 씨의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다시 법원에 회생 개시 결정을 받기 위해 주 채권자인 유암코 측을 설득하고 있다. 회복세에 있는 회사 매출과 새로운 계약, 새로운 기술을 보여주며 살 수 있는 기업은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정 씨의 노력에 유암코 측도 표면상 한 발짝 물러선 모양새다. 회생 절차 동의를 전제로, 일단 회생 계획안 내용을 협상해 보자는 입장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따라붙는다. 확실하고 빠른 채권 회수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양측 입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성화전기공업은 회생 절차가 개시되면 회사 소유 4개 부동산을 일반 매각해 목돈 150억 원 상당을 마련하고, 그 나머지를 출자 전환과 현금 변제로 10년에 걸쳐 갚겠다는 계획이다. 지금 같은 매출 회복세가 계속되면 금융계 부채 200억 원을 전액 상환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 성화전기공업 회생 계획안 내용과 유암코 입장. 유암코 측이 경매를 통해 부동산을 처분하면 성화전기공업은 기업 청산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문제는 유암코 측에서는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이 계획이 달갑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는 이대로 담보 부동산을 경매에 부쳐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이 빠르고 효율적이다. 협상 테이블이 열려있다고는 하지만, 담보 부동산의 가치에 상응하는 현금을 먼저 변제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상태다. 이 돈을 마련할 길이 없는 정 씨와의 협상이 제자리걸음인 이유다.
정 씨는 유암코가 이대로 회생 길을 막고 경매 절차에 나서게 되면 결국 회사가 청산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경매를 통해 쥐게 되는 변제 금액은 통상 감정가의 50%, 혹은 그 이하다. 유암코 입장에서야 얼마든 받아낸 뒤 관련 부실채권을 털어내면 그만이지만, 성화전기공업은 결국 유암코 외의 다른 금융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유암코 측은 뉴스타파에 이미 기업 존속을 위한 협조를 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변제 절차에서 기업 운영자금을 남기도록 하는 등 나름의 조치를 했다는 것이다. 성화전기공업의 경영 실적이 개선된 것을 확인하고 회생 개시 결정에는 협조한다는 방침을 세운 상태라며, 다만 투자금 손실을 초래하는 결정은 배임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회생 계획안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화 시대의 비극, 안전망 금융이 보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금융화(Financialisation) 현상을 통해 이 상황을 풀이한다. 금융화는 한 국가의 금융 부문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과도하게 커지는 현상을 뜻한다. 금융화가 낳은 대표적인 현상이 금융사의 단기 이윤 추구다. 
금융이 빠르고 확실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곳으로 돈을 옮겨가기 때문에, 제조업같이 투자에서 회수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산업은 필연적으로 위축된다. 성화전기공업의 경우, 금융사의 입장에서 보면 회생이 너무 오래 걸리는 데에다 얻을 수 있는 이익도 적고, 회생이 확실하지도 않은 매력 없는 투자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금융화 현상이 과도화되면 결과적으로 사회는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비극을 맞게 된다. 금융의 이익으로 인해 표면상 사회 전체의 부는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사람들이 일하고, 성장할 수 있는 산업 기반은 없어지는 것이다. 
제조업에 들어가는 돈은 수익으로 돌아올 때까지 몇 년이 걸려요, 그래서 이걸 인내심 필요하다고 해서 '인내 자본'(Patient Capital)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금융사, 경영자들은 거꾸로 ROE(자기자본이익률), ROA(총자산이익률)을 강조하고 있어요. 이걸 높이는 방법은 회전율을 높이는 겁니다. 회전율을 높인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빨리빨리 돈을 여기 넣고, 또 빼고 다른 데 투자하는 거죠. 그런데 3년, 10년 동안 제조업에 돈을 묶어 놓는다? 이것은 금융화 현상 속에서는 쉽지 않은 얘기인 거죠.

정승일 /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소 연구이사
이 같은 상황에서 금융계에 한계기업의 옥석 가리기를 맡겨 놓은 것은 사실상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의 업력, 기술력, 경영 의지나 사회 전체의 고용, 경제적 자산 등 정성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 사실상 재무제표 한 장으로 기업의 생사를 판단하는 것이 지금의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개별 산업과 중소기업의 특수성을 잘 알고 이를 토대로 기업의 미래 가치를 판단하는 관계형 금융을 도입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성화전기공업 사례에서 유암코 측에 부실채권을 매각한 금융사는 다름아닌 국책은행인 기업은행이었다.
국책 금융기관의 역할도 요구된다. 한계 중소기업들 가운데 옥석을 제대로 선별하고 안전망 역할을 해줘야 할 국책 금융기관들이 오히려 시중은행들과 함께 이윤 추구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기업 구조조정 사업에는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투여해 정상화 노력을 하는 이들이 정작 우리 경제의 허리 역할을 하는 중소기업의 구조조정에서는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실제 성화전기공업 사례에서 유암코 측에 부실채권을 매각한 금융은 다름아닌 국책은행인 기업은행이었다.
제작진
촬영최형석, 오준식
편집박서영
CG정동우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