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중한 책임 묻겠다? 실제는 '봐주기판결'

2015년 05월 22일 01시 18분

‘국정원 증거조작 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부장판사 김상준)는 20일 1심과 마찬가지로 국정원 직원과 그의 협조자 전원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인해 '사법부의 형사사법 기능이 심각하게 방해됐다'는 판결 내용과 달리 일부 국정원 직원들의 형량이 줄어들면서 '봐주기 판결'을 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영사확인서는 증거 아니다" 판결에 엇갈린 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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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량에서 6명 피고인의 희비는 극명히 갈렸다.

유우성 씨의 출입경기록을 비롯한 3건의 중국 공문서위조에 개입한 김보현 국정원 대공수사국 과장과 그의 두 조선족 협조자 김원하, 찐밍시 씨의 형량은 1심보다 늘었다. 재판부는 김 과장에 대해 "죄질이 불량함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유 씨에게 사과하지 않고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검찰의 구형대로 징역 4년을 선고했다. 1심의 2년 6월보다 늘어난 형량이다.

또 재판부는 김원하 씨와 찐밍시 씨에 대해서도 1심의 양형이 지나치게 가볍다며 각각 2년(1심 : 1년 2월)과 1년 6월(1심 : 8월)로 형량을 늘렸다.

반면 김보현 과장을 제외한 나머지 국정원 직원들의 형량은 크게 줄었다. 1심에서 징역 1년 6월 실형을 받았던 이재윤 국정원 대공수사국 처장은 항소심에서 벌금 1,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권세영 과장과 이인철 전 주 선양총영사관 영사도 각각 벌금 700만 원(선고유예)을 선고받았다.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아 면직 처분될 가능성이 높았던 이들은 이번 항소심에서 벌금형으로 감형되면 국정원 직원 신분을 유지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렇게 양형이 엇갈린 이유는 항소심 재판부가 1심 때와 달리 국정원 직원들에게 적용된 일부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2건의 '이인철 주선양총영사관 영사 명의의 영사확인서'에 대해 모해증거위조의 죄를 물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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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해당 영사확인서는 수사팀 지시에 따라 작성된 일종의 보고서로, 진술서의 성격을 지닌다"며 "허위의 내용을 기재했으므로 허위의 진술서로 봄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이는 수사기관에서 허위의 진술을 하는 것과 차이가 없으므로 비록 허위공문서 작성죄에는 해당이 되더라도 법리상 '증거 위조'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번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이다. 이 때문에 김보현 과장을 비롯한 국정원 직원 4명은 영사확인서 관련 모해증거위조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받았다.

이와는 별도로 이재윤 처장은 1심에서는 유죄 판결을 받았던 '허룽시 공안국 명의 회신공문' 관련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이재윤 처장이 "위조 증거 입수와 관련해 김보현 과장과 공모했다는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나 검사의 증거만으로 범죄의 증명이 이뤄졌다고 보기 힘들다"고 판시했다.

국정원 증거조작 사건 피해자 유우성 씨의 변호인 측은 이 같은 판결 내용에 대해 "영사증명서가 모해 증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첫 사례인 만큼 대법원에서 법리적인 부분을 판단할 것"이라며 "공문서인 영사확인서는 진술서와 성격이 다르다고 보기 때문에 (대법원에서) 판례가 변경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일부 국정원 직원들에게 벌금형이 내려진 것에 대해 "일반 국민들이 경미한 사문서위조를 해도 최소한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것이 보통"이라며 "더 엄하게 처벌해야 할 공무원이 벌금형을 받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국정원 연락관의 진술로 공판검사에 면죄부?

한편 이번 판결에는 증거 조작의 실질적인 지휘자로 지목돼 왔던 이문성, 이시원 두 공판검사를 공범으로 보기 힘들다는 내용이 포함돼 사실상 재판부가 이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이문성 검사(왼쪽)와 이시원 검사(오른쪽)
▲ 이문성 검사(왼쪽)와 이시원 검사(오른쪽)

국정원 직원들의 변호인들은 항소심 공판 과정에서 국정원 수사지도관 출신 이문성 검사가 국정원 직원들로부터 증거 입수 과정을 상세히 보고받아 왔고 가짜 영사확인서를 입수할 때도 깊이 관여했다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유우성 사건의 국정원 측 주무수사관이었던 김 모 씨의 진술을 토대로 "공판검사가 확인서의 형식, 내용, 의미를 잘 알 거나 허위 작성 사실을 아는 공범자로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판결문에 인용된 김 씨의 진술 내용은 '확인서의 입수경위에 대해선 별도로 설명하지 않았다', '영사확인서를 받자는 의견을 누가 제시했는지 모르겠다'는 것으로 모호한 내용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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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김 씨는 유우성 사건 당시 이문성 검사와 긴밀히 소통하던 국정원의 연락관이었다. 국정원 직원들의 변호인 측은 지난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검찰이 유우성 사건의 핵심 관계인인 김 씨를 함께 기소하지 않은 것은 결국 공판검사를 일찌감치 기소대상에서 제외하기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결국, 재판부는 공판검사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국정원 직원의 진술만을 토대로 공판 검사들이 위조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부실한 결론을 내린 셈이다.

유우성 씨 변호인 측은 "재판부가 기소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마치 면죄부를 주는 것처럼 언급했는데 매우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또 "애당초 검찰이 공판검사를 기소에서 배제하면서 국정원 관리책임자에 대한 기소 내용이 부실해졌다"며 “검찰의 꼬리 자르기 식 기소가 항소심에서 국정원 직원들의 유죄 부분이 대폭 축소된 원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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