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엉터리상 '스티비 어워즈', 공공기관서 사실상 퇴출

2021년 05월 27일 15시 30분

지난 2월부터 뉴스타파가 보도한 ‘트로피 스캔들’은 시쳇말로 '폭망'했다. 시청률(유투브 조회수)은 바닥을 기었고 별다른 반향도 없었다. 수많은 공공기관들이 세금을 쏟아부어 십수년간 엉터리상을 받아온 사실을 고발한 탐사보도였지만, 그 흔한 받아쓰기 기사 하나 따라오지 않았다. LH사태로 조기 낙마한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 산하 기관장들을 모아 놓고 한마디 한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변 장관은 최근 '스티비상' 수상과 관련해 공공기관이 세금을 낭비했고 광명 시흥 지구에서 LH 임직원들이 사전 투기를 했다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라며 ‘사실관계를 떠나 기관장이 경각심을 갖고 청렴한 조직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최근 뉴스타파는 우리나라 공공기관들이 대거 수상한 행정 관련 국제 시상식인 스티비 어워드가 출품만 하면 상을 주는 식의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 연합뉴스 (2021.3.2)
취재에만 15개월이 걸린 역작(?)은 이렇게 빛도 못 본 채 사라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트로피 스캔들’ 보도의 여파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스티비 어워즈’에 마구 달려들던 공공기관들이 자취를 감추는 기적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연례 행사처럼 온갖 명목의 작품을 내 상을 쓸어담던 지자체가 뉴스타파 보도 이후 출품작을 거둬들인 사례도 확인됐다. 조용하지만 강한, 청량음료 같은 변화다.
국제비즈니스상 '스티비 어워드'의 실체를 파헤친 기획 '트로피 스캔들'의 메인 타이틀

뉴스타파 ‘트로피 스캔들’ 3부작...‘스티비 어워즈’ 실체 추적

‘트로피 스캔들’은 국제비즈니스상 ‘스티비 어워즈’의 실체를 고발한 프로그램이다. ‘비즈니스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려온 이 상이 사실은 돈만 내면 누구나 받을 수 있고, 누구나 심사에도 참여할 수 있는 엉터리상임을 확인해 준 내용이었다. 뉴스타파는 2월 18일 예고편을 낸 데 이어 같은 달 22일부터 3월 4일까지 총 3부작으로 ‘트로피 스캔들’을 보도했다.
지난해 뉴스타파 취재진은 ‘스티비 어워즈’가 전세계에서 운영중인 7개 ‘스티비상’ 중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아시아-태평양 스티비 어워즈’에 3개의 가짜 출품작을 내고 취재진 3명이 허위 경력으로 심사에 참여하는 '언더커버(잠입)' 방식으로 취재를 진행했다. 취재기간만 15개월에 달한 장거리 레이스. 독재자 전두환이 40년 전 대국민 탄압용으로 만들었지만 지금은 형체도 찾을 수 없는 ‘사회정화위원회’, 뉴스타파의 이름을 베낀 ‘뉴스설파’ 같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작품을 출품했음에도 금상 2개, 동상 1개를 받는 쾌거를 이뤘다. 취재진이 낸 작품을 스스로 심사하는 코미디 같은 일도 있었다. 피 같은 취재비 수백만 원이 들어갔다.
뉴스타파가 정보공개청구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우리나라의 공공기관들은 2006년부터 슬슬 이 상을 받기 시작했고,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본격적으로 이 상을 쓸어 담았다. 2008년 9개에 불과했던 수상건수는 2009년엔 29개, 2012년 61개, 2017년 104개, 2019년 93개로 늘어났다. 특히 미국에 본사를 둔 ‘스티비 어워즈’가 22개 아시아 국가만을 겨냥한 신상품(아시아-태평양 스티비 어워즈)을 출시한 2014년 이후부터 출품-수상이 부쩍 늘었다. 우리나라는 이 상의 최다 수상기록 보유 국가다.
지난 십수년간 우리나라 공공기관이 받은 ‘스티비상’은 모두 770개였다. 한 번이라도 이 상을 받은 적이 있는 기관도 183곳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7억 원 가까운 국민 세금이 출품비, 트로피 제작비, 시상식 참가비 따위로 들어갔다. 공공기관이 직접 출품작을 내고 상을 받으며 쓴 돈만 그 정도였다. 홍보대행사나 광고대행사를 통해 받은 163건까지 합하면, 족히 10억 원을 넘길 것으로 추산된다. 낭비된 세금 중 상당액은 해외에서 열린 시상식 참가비용이었다. ‘스티비 어워즈’ 시상식은 주로 런던, 바르셀로나, 뉴욕, 도쿄, 싱가포르 같은 유명 관광지를 돌며 열리고 있다.
뉴스타파 취재진이 잠입취재를 진행한 ‘2020 아시아-태평양 스티비 어워즈’에서도 우리나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과를 올린 바 있다. 32개 공공기관이 55개의 상을 쓸어 담았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멈춰 섰지만,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오프라인 시상식도 열었다. 1등 수상국의 위세에 걸맞는 대규모 행사였다.
뉴스타파의 ‘트로피 스캔들’ 3부작 보도 이후 ‘스티비 어워즈’ 측이 자사 홈페이지에 게재한 팝업창. ‘뉴스타파 언론보도는 사실과 다릅니다’라는 제목과는 달리 “철저하고 엄격한 검증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일종의 다짐글이 들어 있다. 

55개에서 2개로... ‘스티비상’ 공공기관 수상 건수 대폭 줄어

그런데 뉴스타파의 ‘트로피 스캔들’ 보도 이후 생각치 못한 변화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일단 매년 ‘스티비상’을 노리던 공공기관들이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지난 5월 5일 수상자가 발표된 ‘2021 아시아-태평양 스티비 어워즈’에서 수상의 영광을 안은 우리나라 공공기관은 단 두 곳, 수상작 수도 2개에 불과했다. 지난해 같은 상에서 총 32개 공공기관이 55개의 트로피를 받아간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돈만 내면 대부분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과거 행태를 생각하면 출품작을 낸 기관도 두 곳 뿐이었을 걸로 추정된다. 공공기관의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스티비 어워즈’가 2021년을 기점으로 사실상 퇴출 수순에 들어간 것이다. 
뉴스타파 보도의 여파는 사기업에도 불어 닥쳤다. 사기업이 받은 '스티비상' 수가 대폭 줄어들었다. 지난해 36개였던 것이 올해는 20개에 불과했다. 상을 챙긴 기업 숫자도 23개에서 11개로 쪼그라 들었다. 단골손님인 KT는 올해도 7개의 트로피를 받아 챙겼고 하나금융그룹(1개), 교원그룹 계열사(2개)도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나머지는 소규모 기업이었다.          
‘트로피 스캔들’ 보도는 당사자인 ‘스티비 어워즈’ 측에도 상당한 충격과 혼란을 준 듯 하다. ‘스티비 어워즈’측이 자사 홈페이지에 걸어놓은 팝업창이 이를 잘 보여준다. ‘뉴스타파의 언론보도는 사실과 다릅니다’라는 제목의 창이다. 그런데 이 창에는 뭐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이 생뚱맞게 “엄격한 검증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일종의 다짐글이 들어 있다. 뉴스타파 보도를 인정하며 사업을 접을 수도, 그렇다고 뉴스타파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는 뻔한 거짓말로 사건을 뭉갤 수도 없는 ‘스티비 어워즈’ 측의 고심이 읽힌다. 물론 취재진의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다.
여하튼 눈치 빠른 공공기관들이 2021년을 기점으로 ‘스티비 어워즈’를 빠르게 '손절'한 뒤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수상의 영예를 만끽한 공공기관 두 곳은 인천시와 의정부시 산하기관격인 의정부영상미디어센터였다. 취재진은 이 두 곳에 연락해 ‘스티비 어워즈’에 상을 출품한 이유 등을 물었다. 특히 유일하게 수상사실을 보도자료로 만들어 뿌린 인천시에는 출품배경을 더욱 꼼꼼히 물어 봤다. 뉴스타파 보도를 보고도 출품 한 건지, 못 보고 출품했는지 궁금해서다. 이런 답이 돌아왔다.
많은 공공기관들이 받는 상이어서 의심없이 출품하게 됐다. 출품 이후 나온 뉴스타파 보도를 감명깊게 봤다. 뉴스타파 보도 이후 '스티비 어워즈' 측에 항의 메일을 보냈다. 수상 트로피를 제작하거나 홍보할 생각은 없다. 출품료는 개인 비용으로 처리해 세금을 낭비하진 않았다.

- 의정부영상미디어센터 관계자
인천시 영문 홍보잡지 '인천NOW'를 만드는 외부 협력업체가 출품했다. '인천 NOW'는 지자체가 만든 첫 영문잡지여서 홍보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 과정에서 인천시 예산이 들어간 것은 없다. 협력업체가 관련 비용을 모두 지불했다. 출품 이후 나온 뉴스타파 보도를 보고 문제를 알게 됐지만, 예산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어서 출품을 진행했다. 인천시는 현재도 많은 돈이 들어가는 상은 출품하지 않는다는 가이드 라인을 가지고 있지만,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검토해 출품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겠다.

- 인천시 관계자
2017년 ‘여성 기업인 스티비상’을 받은 박춘희 당시 송파구청장. 뉴욕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가하며 4444만 원의 예산을 사용해 단일 건 최다 금액을 기록했다.

송파구·강동구, 뉴스타파 보도 후 출품 철회하고 세금 환수

뉴스타파 보도가 나간 뒤 이미 낸 출품작을 황급히 거둬들인 공공기관도 두 곳 확인됐다. 서울 송파구와 강동구다.
뉴스타파는 지난 3월 ‘트로피 스캔들’ 3부작을 보도한 직후, 혹시 ‘2021 아시아-태평양 스티비 어워즈’에도 상을 출품한 공공기관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스티비상 수상 전력이 있는 공공기관들을 상대로 정보공개를 청구했었다. ‘2021 아시아-태평양 스티비 어워즈에 상을 출품했는지’, ‘혹시 출품했다 철회한 사실이 있는지’ 등을 묻는 내용이었다. 서울 송파구와 강동구가 답을 보내왔다. ‘각각 6개씩의 출품작을 냈다가 취소한 사실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두 지자체는 출품비로 쓴 390여만 원과 350여만 원을 ‘스티비 어워즈’ 측으로부터 회수했다는 사실도 알려왔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돈이지만, 세금 낭비를 막은 훈훈한 결과다.
송파구는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21개의 상을 쓸어 담았던 ‘스티비상’ 단골 지자체였다. 그 동안 이 상을 받으며 쓴 예산만 대략 8000만 원에 달한다. 쏟아부은 돈을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 공공기관 중 단연 1등이었다. 2017년 당시 송파구청장이던 박춘희 씨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시상식에 우리나라 공공기관장으로는 유일하게 참석하면서 여행경비 3600만 원, 통역비 400만 원 등 총 4444만 원의 세금을 쓴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강동구도 2019년부터 2년 연속 ‘스티비상’을 받으며 840여만 원의 세금을 썼었다. 
뉴스타파는 엉터리상 ‘스티비 어워즈’에 국민 세금을 쏟아붓는 공공기관이 확인되는 대로, 추가 보도를 이어갈 예정이다.
제작진
취재한상진 김강민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