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중노위, 사상 최초로 MBC 방송작가 노동자성 인정

2021년 03월 22일 14시 22분

사상 처음으로 노동위원회에서 방송작가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 받았다. 지난 19일 중앙노동위원회는 MBC 보도국에서 해고된 두 명의 방송작가가 제기한 부당해고 구제신청 재심 사건에서, 두 작가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초심 판정을 취소한다는 판정을 내렸다. 두 작가를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하고 부당해고를 인정한 것이다. 노동위원회가 방송작가를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1년부터 MBC 아침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투데이>에서 외신을 소개하는 코너인 <이 시각 세계>를 맡은 이 모 작가와 <아침 신문 보기> 코너를 담당한 김 모 작가는 지난해 5월 전화로 해고 통보를 받고 한 달 후 해고됐다. 이들은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했지만 부당해고 여부를 판단받지 못했다. 지노위가 '프리랜서' 계약을 했던 두 작가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아 사건을 각하 처분했기 때문이다. 노동위원회에서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자 신분을 인정받아야 부당해고 여부를 다툴 수 있다.
하지만 중노위의 판단은 달랐다. 두 작가의 노동자성을 인정했고 MBC의 부당해고까지 인정한 것이다.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사용자는 노동자를 해고하려면 해고사유와 해고시기를 서면으로 통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효력이 없어진다. MBC는 두 작가에게 전화로 해고를 통보했고 해고 사유에 대해서는 "개편을 하라는 지시때문"이라고만 밝혔을 뿐, 정확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방송작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 인정한 첫 사례 

이번 사건을 담당한 김유경 공인노무사(돌꽃노동법률사무소)는 "최근 방송제작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한 법원의 판례들은 일관되게 방송 프로그램 제작이라는 방송업의 특수성에 주목했다"며 "업종을 막론하고 그들의 근로 실질이 동료간 유기적 협업을 하면서 사용자에게 종속된 관계임을 핵심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김 노무사는 "이번 판정도 기존 법원의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상식과 법리에 입각한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12월 뉴스타파와 인터뷰를 한 이 모 작가(사진 왼쪽)와 김 모 작가. 
사건 당사자인 이 모 작가는 "초심에서는 지노위가 사측이 주장하는 답변서를 그대로 판정문에 실어 크게 실망했는데 중노위는 근로의 실질을 살피고 법리적으로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서 결과에 대해 낙관할 수 있었다"며 "결과를 듣고 한참 울었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저희보다 더 오랜 기간 언론사에 종속돼 일하는 작가들이 많을 것"이라며 "최초이다보니 한걸음 한걸음이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끝까지 가서 뒤따라오는 또다른 누군가는 좀 더 쉽게 올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사례는 방송국에서 일하는 작가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한 첫 사례여서 방송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MBC만 해도 보도국에 50여명의 작가들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송계에서 작가를 정규직으로 채용한 사례는 TBS가 거의 유일하다. 대부분 프리랜서 업무위탁계약을 맺고 일해 4대 보험 적용이 안 되고 계약해지를 당해도 퇴직금이나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 특히 보도국 작가들의 경우 다른 방송작가들과 달리 '예술인' 범주에도 포함되지 않아 지난해 12월부터 시행된 예술인 고용보험에서도 제외된 바 있다. "보도는 예술의 범주로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작가를 '프리랜서'로만 고용하는 방송계에 파장 클 듯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지부장 김한별)에 따르면 20여년 전 대구마산 MBC 방송작가들이 노조법상 근로자 지위 소송을 제기한 바 있으나 소송에서 패소했고, 이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은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중노위 재심 사건에서도 MBC측은 대구마산 MBC 방송작가의 노조법상 근로자성을 부정한 고등법원 판례를 주요한 논거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지난 19일 열린 중노위 심문회의에서 한 공익위원은 과거 대법원에서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MBC 프리랜서 제작 PD의 사례를 거론하며 "두 작가와 작업 과정이 매우 유사해 보인다"며 작가 사건에서 대법원의 법리를 적용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MBC 측에 질문하기도 했다.   
지난 3월 10일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소속 조합원인 TBS 작가가 점심 시간을 이용해 MBC에 방송작가 노동자성 인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방송작가지부는 22일 성명을 내고 "노동자가 복직을 위해 시간과 돈을 들여 회사와 투쟁하는 것이 얼마나 피 말리고 고된 일인지 해고 노동자였던 MBC 박성제 사장 스스로가 가장 뼈저리게 알고 있을 것"이라며 "즉각 두 작가에게 사과하고 조속히 원직 복직처리하라"고 촉구했다. 김한별 방송작가지부장은 "두 작가 사례와 비슷하게 일하고 있는 방송작가들이 굉장히 많다"며 "이번 판정을 시작으로 방송작가 노동자성 인정과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더 열심히 싸우겠다"고 말했다.
언론노조(위원장 윤창현)는 성명을 내고 "MBC 사측은 이번 중노위 판정을 겸허히 인정하고 판정문 송달 이전에라도 조속히 원직 복직 의무를 이행하기 바란다"며 "MBC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방송사는 자사 내 비정규직 실태를 점검하고 처우개선에 나서줄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언론노조 TBS지부도 성명을 내고 "TBS의 경우 작가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해 지난해 2월 정규직 작가를 고용해 고용안정성을 보장한 바 있다"며 "이번 판정 결과가 방송가에서 방송작가의 노동자성, 더 나아가 프리랜서라는 계약에 가려진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건강한 노동 환경을 만드는 발판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두 작가는 MBC에 원직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MBC 관계자는 이번 중노위 판정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판정의) 이유가 중요한데 아직 판정서를 받지 못했다"며 행정소송으로 갈 지 여부에 대해서도 "판정서를 받아봐야 판단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판정서는 판정일로부터 한 달 이내에 당사자에게 전달된다. 
이번 사건의 주요 쟁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보도국 작가들이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 해당하는지 여부였고 둘째는 노동 관계 종료의 정당성 여부였다. 뉴스타파는 4월 20일 공개된 판정문을 입수해 중앙노동위원회가 두 쟁점을 어떻게 판단했는지 살펴보았다. 

지휘 감독과 종속성 

우선 노동자성 인정 여부와 관련해, MBC는 두 작가에게 최초 아이템을 고르는 재량이 부여됐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중노위는 "이와 같은 재량은 일반 근로자가 업무를 수행할 때에도 통상적으로 부여되는 것"이라며 "매우 단순한 업무를 처리하는 사무보조원이 아니고서는 이런 재량도 없이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점에 비추어 볼 때 MBC의 주장은 이유 없다"고 밝혔다. 업무 수행 과정에서 MBC가 상당한 지휘·감독을 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MBC가 '프리랜서' 신분이었던 이 모 작가에게 경위서 제출을 요구한 점도 종속성을 인정하는 근거가 됐다. 2017년 12월경 이 작가는 <이 시각 세계> 코너가 일정대로 방송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경위서 제출을 요구받은 적 있다. 이에 대해 중노위는 "경위서를 제출받은 것은 MBC가 주장하는 일반적인 위임관계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요구로 보인다"며 "오히려 이 모 작가가 방송사에 실질적으로 종속돼 근로를 제공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근로 제공의 계속성과 전속성

근로 제공의 계속성에 대해서도 MBC는 "방송 프로그램의 특성상 언제든지 프로그램이 폐지될 수 있으며 담당 방송작가도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기에 계속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노위는 "근로관계의 계속성은 미래의 가능성을 두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근로제공 관계가 계속적으로 이뤄졌는지 여부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라며 "두 작가가 MBC에서 9년간 계속해 근로를 제공한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되는 이상, 근로제공의 계속성이 부인될 여지는 없다"고 못 박았다. 또한 두 작가들이 MBC 방송작가 외에 다른 업무를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근로제공의 전속성 또한 인정했다. 두 작가는 2011년 MBC에 입사한 후 퇴사하기까지 다른 방송사에서 작가 업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사회보험 가입, 근로소득세 납부 여부는 부차적 요소”

MBC는 또 두 작가가 사회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고 근로소득세를 원천징수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중노위는 "사용자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임의로 정할 여지가 커 근로자성 판단에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서면 통지 의무 미준수… 부당해고 인정”

두 번째 쟁점인 노동 관계 종료의 정당성 여부와 관련해 중노위는 MBC가 서면이 아니라 구두로 계약 해지를 통지한 점을 중요하게 봤다. MBC는 지난해 5월 두 작가에게 프로그램 개편을 이유로 한 달 후 계약이 해지된다는 것을 전화로 통보했다. 이에 대해 중노위는 "서면 통지 의무를 준수하지 않았으므로 이들에 대한 해고는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중노위는 MBC에 두 작가를 원직 복직시키고 해고 기간에 정상적으로 근로했다면 받을 수 있었던 임금상당액을 지급하라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