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가 지난 7월 3일 방송한 특집 다큐 <거짓말탐지기를 속인 여자>의 주인공 이시은(가명) 씨가 간첩 혐의로 대법원에서 실형이 확정됐다.

이른바 보위사 직파 여간첩 사건으로 2심 선고 직후에야 언론에 알려진 이 씨는 대법원 상고심 과정에서 사선 변호인을 만난 뒤 수사과정에서 허위로 자백했다고 밝혔고, 이후 뉴스타파의 취재 결과 기소 내용과 모순되는 수십 가지의 무죄 증거들이 새롭게 드러났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같은 증거들을 제출기한이 지났다며 제대로 판단하지 않고 사법 체계만 강조해, 탈북자 간첩 사건의 특수성과 실체적 진실을 외면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대법원 실형 확정 선고 뒤 변호인단의 기자회견
▲대법원 실형 확정 선고 뒤 변호인단의 기자회견

합동신문센터 자백이 유일한 간첩 증거?

대법원은 2심까지 유지된, 보위사령부 지령을 받고 위장 탈북했다는 이 씨 자백을 유죄 근거로 들었다. 이 씨 변호인단은 6개월 간 국정원 합신센터 독방에서 강요에 의해 허위 자백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이 씨가 국정원에서 변호인 조력과 진술거부권 고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국선변호인이 맡았던 2심까지 자백을 유지하며 선처를 호소했던 점 등을 볼 때 자백의 신빙성이 인정된다고 덧붙였다.

이 씨의 변호를 맡은 박준영 변호사는 선고 직후 국정원 합신센터 자백 당시 위법한 수사 방식이 많았고, 무엇보다 자백에 황당한 내용이 다수라며 판결을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만화에나 등장할 ‘거짓말탐지기 회피 약물' 논란 피해간 대법원

만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황당무계한 자백 내용은 거짓말탐지기 회피용 약물이 대표적이다. 이 씨가 남파되기 전날 북한 보위부장의 지령과 함께 문제의 약물을 받았다고 자백했다는 것이다.

2014101704_02

이번 최종심 선고를 앞두고 대법원이 이 황당한 약물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 지가 초미의 관심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논란을 피해갔다. 거짓말탐지기에 대한 과학적 논란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 부분은 이번 사건의 정황 증거에 불과하다고 의미를 축소한 것이다. 그러면서 거짓말탐지기 회피 약물에 대한 진술이 의심된다는 사정만으로 북한 공작원이란 자백의 신빙성이 떨어지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 씨가 간첩 혐의를 받은 핵심 내용이 보위부장의 탈북 지령 자리에서 거짓말탐지기 회피 약물을 받았다는 것임을 되짚어보면 대법원의 판단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거짓말탐지기 회피 약물에 대한 진술이 의심된다면 보위부장과 지령의 실체도 흔들릴 수 밖에 없다.

같이 탈북한 동거남 “억지로 끌고 온 연인이 간첩이라니…”

이시은 씨 동거남 김 모 씨는 실형 선고 뒤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 이시은 씨 동거남 김 모 씨는 실형 선고 뒤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더구나 이시은 씨가 자백했다는 보위부장의 지령엔 같이 탈북한 김 씨를 남한의 고정간첩에 연계시키는 것도 있었다. 북한에서 이 씨와 동거해온 김 씨는 탈북을 망설이는 이 씨를 억지로 데려온 것이 자신이라며 대법원 판결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떻게 같이 온 자신은 풀려나고 이 씨만 간첩일 수 있냐며 북한처럼 생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것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세 번의 재판을 거치는 동안 법원은 국정원 합신센터 독방에서 만들어진 자백에 의존해 모순 투성이의 공소 사실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검증 없이 유죄를 선고했다. 여기에다 검찰도 이 씨에게 유리한 중요 증거는 법정에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증거는 보위부에 실제 근무했던 다른 탈북자의 참고인 진술서다. 보위부장 등에 대한 이 씨의 진술이 모순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였다. 이 때문에 유우성 씨 간첩증거 조작 사건 때처럼 검찰 측이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는 고의로 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드는 대목이다.

보위부에 실제 근무했던 다른 탈북자의 진술서
▲ 보위부에 실제 근무했던 다른 탈북자의 진술서

대법원, 50가지 넘는 무죄 증거 ‘제출기한 지났다' 제대로 검토 안해

이 씨의 변호인단은 이처럼 기소 내용과 배치되는 새로운 증거 50여 건을 제출했지만 대법원은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이 씨가 이 증거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1, 2심에서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은 이 씨에게 있다고 했다. 상고이유서 제출 기간이 지난 뒤 관련 자료를 냈다는 것이다. 형사소송법 420조 5호에서 규정하고 있는 재심 사유인 신규성과 명백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씨 변호인단은 정식으로 재심을 청구하고, 헌재에 헌법 소원을 낼 계획이다. 법률 전문가들은 법원이 실체적 진실보다 사법 체계만 강조했다고 지적했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3심 제도나 재심 절차는 원래 억울한 처벌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며 무죄와 직결되는 새로운 증거라면 유무죄를 다툴 기회를 줬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오랜 기간 격리돼 정상적인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 탈북자의 경우 한번 자백하면 번복하기 힘든 구조라며, 최근 간첩 조작 사례들이 여전한 것을 볼 때 탈북자 간첩 사건을 다룰 때는 법원이 이 같은 특수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