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해병대 구국결사대’의 호위를 받으며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표정은 여유 있어 보였다.

지난해 9월 1심 선고에서 원 전 원장은 ‘대선 국면에서 국정원 직원에 의한 정치 관여 행위는 있었지만 선거 개입은 없었다’는 판결과 함께 선거개입 혐의에 대해선 면죄부를 받았다. 국정원법 위반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지만 집행유예로 인해 사실상 법망을 빠져나간 형국이었다. 대의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의 공정성을 해치고, 헌법이 명시한 국가 기관의 정치 중립 의무를 위반한 범죄였지만 지나치게 가벼운 처벌이었다.

1심 선고 직후 보인 검찰의 태도는 이 재판에 법리 외의 요소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낳기 충분했다. 검찰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항소를 차일피일 늦추는 모습을 보였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적용 법리를 바꾸는 공소장 변경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끝내 공소장 변경없이 항소심에 임했다.

항소심 선고 당일, 법정 방청석 대부분은 보수단체 회원들과 원 전 원장 측 사람들로 채워졌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재판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던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애당초 판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아 선고 공판에는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 전 원장의 여유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서울고등법원 형사4부 김상환 부장판사가 판결문을 읽어나가면서 법정의 분위기는 이내 무겁게 변했다. 1심과는 다른 양상으로 판결 내용이 흘러가면서 재판정 곳곳에는 헛기침과 탄식 소리가 흘러 나왔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뒤집고 국정원법 위반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모두를 유죄로 인정했다. 원 전 원장에게는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이 선고됐다. 함께 기소된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과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은 집행을 유예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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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부장판사는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을 원 전 원장이 져야 한다고 힘 줘 말했다. 재판부는 선고 직후 구속영장을 즉시 발부해 원 전 원장에 대한 법정구속을 집행했다. 앞서 건설사 알선수재 혐의로 1년 2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수감 생활을 했던 원 전 원장은 출소 5개월 만에 다시 수감되는 처지가 됐다.

법정구속 직전 원 전 원장은 ‘나로서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한 것이다’며 ‘계속해서 재판을 받겠다’고 상고 의사를 밝혔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에 침착하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방청하던 기자들이 큰 목소리로 판결에 대한 입장을 요구했지만 원 전 원장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항소심 판결, 1심과 이렇게 달랐다

원 전 원장의 1심 판결은 나오자마자 논란의 대상이 됐다. 김동진 수원지법 성남지청 부장판사는 이 판결이 나온 직후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제목의 글을 남겨 이 판결에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판결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사슴을 말이라고 속인다는 뜻의 ‘지록위마’는 지난해 교수 724명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되기도 했다.

2년째 힘겹게 이 사건의 공소를 유지하고 있는 검찰 특별수사팀도 1심 판결에 대해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수사팀 관계자는 정치 관여는 유죄로 인정하면서 선거법 위반은 무죄로 본다는 것은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수사팀은 박근혜 정부의 정당성과도 직결되는 이 사건을 외롭게 끌어오며 갖은 수난을 겪어야 했다. 특별수사팀을 구성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갑작스런 ‘찍어내기’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났고, 수사팀을 이끌었던 윤석열, 박형철 두 부장검사는 법무부 징계와 좌천성 인사라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공직선거법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의 논리는 △구체적으로 대선 개입의 의도를 확인할 근거가 없다는 점 △원세훈 원장에 의한 직접적인 지시가 없었다는 점 △국정원 직원들의 행위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가 될 지언정 공직선거법이 규정하는 선거운동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 등 3가지였다. 하지만 이 세가지 논리는 항소심에 와서 철저히 부정됐다.

무죄 선고의 핵심 논리는 국정원 직원이 대선정국에서 정치에 개입하는 내용의 인터넷 게시글과 트위터 글을 확산시켰다고 해도 이같은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별도의 선거 관련 팀을 만들거나 선거운동 계획을 수립하는 등 대선 국면에 접어든 시기를 전후해 확인이 가능한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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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1심에서 ‘작성자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증거에서 배제됐던 트위터 계정 관련 증거를 받아들였다. 당연히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도 1심과는 크게 달라졌다. 검찰 수사팀이 국정원 심리전단 소속 직원의 이메일 계정에서 압수수색한 ‘425지논.txt’과 ‘ssecurity.txt’, 두 텍스트 파일에 담겨있는 트위터 계정들을 국정원 직원이 사용한 계정으로 인정했다. 자연히 증거 능력을 가진 트윗의 수도 2배 이상 늘어났다.

이런 변화는 좀 더 심도 깊은 트위터 분석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당초 1심 재판부는 단순히 대선이 가까워 질수록 트윗의 양이 줄었다는 점만 들어 오히려 국정원에 선거 개입의 의도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는 대선 국면에 접어들면 선거관리위원회가 트위터 상의 불법선거운동 행위 감시를 강화한다는 점에 비춰봤을 때 트윗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이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이다.

항소심 재판부가 주목한 것은 총 27만 여건에 이르는 국정원 트윗의 작성 시점과 내용의 변화였다. 국정원 직원들이 작성한 트윗을 내용에 따라 ‘정치 관여’ 트윗과 ‘선거 개입’ 관련 트윗으로 나눠 시계열로 빈도를 분석한 결과,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접어든 2012년 8월(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의 출마선언)을 전후해 눈에 띄는 변화가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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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후보의 출마 선언 이전에는 80% 이상을 차지하던 ‘정치 관여’ 트윗의 비중은 출마 선언 이후 20% 대까지 급격히 줄었다. ‘선거 개입’ 관련 트윗의 비중은 정반대의 양상을 보이며 이 시기 이전까지는 10% 대에 머물다가 대선이 있었던 2012년 12월에는 83%까지 치솟았다. 재판부는 이런 급격한 트윗 내용의 변화가 선거 개입에 대한 국정원의 계획성과 적극성을 증명하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판시했다.

1심 재판부는 국정원 직원들의 사이버 활동에 대한 원 전 원장의 지시 여부를 판가름하는 핵심 증거인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 문건에 선거에 개입하라는 직접적인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선거법 위반을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이 논리도 항소심에서 허물어졌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문건에 나타난 원 전 원장 발언의 일관된 취지를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 전 원장은 정부의 주요 정책들에 대한 홍보를 강조하면서, 이같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야당과 야권 성향의 단체들을 ‘종북 세력’이라고 일관되게 지칭했다. 선거 시기에 접어들어서는 ‘종북 세력의 제도권 진출을 막아야 한다’고 간부들에게 강조하는데 이같은 대목은 사실상 국정원 직원들에게 정치 관여는 물론 선거 개입을 하도록 독려한 것에 다름 없다는 것이다. 설사 원 전 원장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지속적인 보고를 통해 심리전단의 활동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 사전에 선거 개입의 가능성을 차단하지 않은 것은 ‘미필적 고의’에 해당한다는 것이 재판부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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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사이버 공론장의 순수성 의심하게 돼”

재판부는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하여 공격한다면 이것은 손해가 될 뿐’이라는 뜻의 경구인 ‘공호이단 하애야이(攻乎異端 斯害也已)’를 인용하며 이번 사건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국민 모두를 사실상 ‘종북 세력’으로 규정하고 실제 이들을 상대로 심리전을 펼친 원 전 원장과 국정원의 잘못을 꾸짖은 것이다.

또 “국정원의 소중한 기능 일부를 특정 정당이나 정치적 입장에 대한 반대에 활용한 것은 선거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마련된 제한 규정들을 사실상 모두 어긴 것과도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국가기관이 익명의 국민을 가장해서 선거 등의 정치 쟁점에 대한 의견을 조직적으로 전파한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국민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와 트위터 등 사이버 공론장의 순수성과 자율성을 의심하게 되는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했다는 평가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