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마지막날.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김승효 씨가 44년만에 억울한 간첩 누명을 벗었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가 2016년 개봉한 영화 ‘자백’(감독:최승호)에서 그는 “무죄를 못 받아서 억울해서 죽을 지경이야!” 라고 절규해 국가권력이 저지른 간첩조작 피해의 심각성을 세상에 알렸다.

일본 리츠메이칸 대학교 3학년이던 재일동포 김승효 씨는 링컨과 로스차일드를 존경하고 나스메 소세키의 소설을 좋아한 평범한 철학과 대학생이었다. 그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한국 유학을 결심한다. 1973년에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것도 한국과 일본에서 인정 받고 싶어서였다.

한국에 온 지 1년만에 김승효 씨는 재일동포 간첩으로 몰렸다.

들어가자마자 바로야. 1974년 5월 3일이야. 잡혀갔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남산의(남산의 가까운 곳이었지) 그렇지 가까웠어 (말해줘봐 거기서.. 마구 맞았어?) 마구 맞았지 (어떤 식으로 맞았어?) 빡하고 (몽둥이로 맞은 적은 없어?) 몽둥이로도 그랬었지.

김승효, 2015년 11월

재심의 이유, 불법 구금

구속영장이 나온 것은 5월 21일. 5월 3일부터 21일까지 19일간 영장도 없이 그는 중앙정보부에 불법으로 구금돼 있었다. 당시 언론은 김승효 씨를 서울대 학생이라는 점을 강조해 간첩으로 대서특필했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을 간첩이 선동한 것으로 몰아가기 위해서였다.

▲김승효 씨를 ‘학원 침투 간첩’이라고 쓴 1974년 6월 28일자 경향신문 기사

(잡혀가셨을 때 선생님에 대해 그당시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 사람들이 선생님한테 증거를 보여주거나 설명한 것이 있었나요?) 아무것도 없었어

김승효, 2015년 11월

증거도 없고 증언도 없이 고문 수사관들이 마음대로 쓰고 마음대로 도장 찍어버렸다고 김승효 씨는 증언했다.

▲ 한국어를 전혀 몰랐던 김승효 씨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조서에 수백 번 지장을 찍어야 했다.

지장을 찍을 때는 나에게 계속 "너는 무죄야, 무죄야, 무죄"라고 계속 이야기하면서 "너는 돌아갈 수 있다"면서 시키는대로 하라고. 집에까지 데려다 준다고. 미안하지만 자신들도 해야할 일이 있는 거라고 그러면서 자신들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계속 이야기 했어. 집이 아니라 형무소에 보내버린 거지.

김승효, 2015년 11월

첫취항 한 달전 만경호를 탔다는 진술도 허위

김승효 씨가 탔다는 배의 탑승 시기도 사실과 다르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조서에는 김승효씨가 1971년 7월 중순경 일본으로 취항하는 만경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 반국가단체와 접선했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만경호는 건조된 이후 첫 취항이 8월 17일이다. 김승효 씨가 만경호를 탔다는 사실은 취항도 하기 전에 탔다는 것. 자백을 강요당한 나머지 허위로 진술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김승효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땅땅땅”

서울고등법원 형사11부 이영진 부장판사는 “검사나 경찰이 피고인에 대해 작성한 조서는 절차에 위배됐기에 강제연행 및 불법체포에 해당한다. 장기간 불법구금 상태에서의 진술이기에 진술 능력이 없다. 경찰 조서도 영장 없이 작성됐기에 진술 능력이 없다. 따라서 범죄 증명 능력이 없어 무죄를 선고한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재판부는 고문을 당했다는 피고인의 주장은 명시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피고인이 법정에 출석하지 않아 진술할 수 없는 상태인 점, 피고인이 명백히 고문을 당한 직접적인 증거가 제출되지 않은 점”을 들었다. 하지만 선고 사흘 전 검찰이 이례적으로 ‘무죄’를 구형했기 때문에 김승효 씨의 무죄는 이번 판결로 사실상 최종 확정된 셈이다.

재심 법원, 고문가혹행위는 진위 파악 어렵다며 판단 안해

그토록 원했던 무죄의 순간에 김승효 씨는 법원에 출석하지 못했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데다 여전히 한국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재심 법원은 그러나 피해자가 출석하지 않아 고문가혹행위에 대한 진위여부는 파악이 어렵다고 밝혔다. 김승효 씨의 재심은 국가폭력 희생자들을 돕는 시민들의 모임, 민들레의 장경욱 변호사가 맡았다.

입증 증거가 없어 추단했는데 조사 진행됐음에도 특별한 기록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중에 영장 발부되기 며칠 전에 집중적으로 본인의 진술서나 조서가 있습니다. 이것은 5월 3일 연행되고 나서 본인이 저항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강제 연행 다음 날 첫 번째 진술서 작성 후 11일까지 작성된 것 없다가 11일이 되어서야 피의자신문조서 3회, 진술서 3회가 작성돼요. 고문과 자백 강요에 맞서다 7일째 되어 저항 의지를 상실한 정황으로 고문 가혹행위 당했음을 추단할 수 있습니다.

장경욱 변호사, 민들레

김승효 씨 대신 법정에 출석한 형 김승홍 씨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저도 동생도 벅찬 가슴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오늘 무죄 판결은 저희에게 더할나위 없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여전히 저희처럼 날조된 간첩 혐의로 몰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무죄 판결 받을 수 있길 바랍니다. 도와주신 분들 고맙습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날 재판에는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이철, 김장호, 강종건, 최양준, 유동우, 오승일, 이동석, 민향숙, 진형대 등이 함께 했다. 정확한 숫자조차 모르는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는 현재까지 100여명으로 추산된다. 이 중 60여명은 이미 사망했거나, 여전한 한국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 어려움 등의 이유로 여전히 과거  독재권력이 씌운 ‘간첩’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촬영 : 정형민, 최형석, 김남범, 오준식, 신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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