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최장, 노인 빈곤율 최고, 자살률 최고, 남녀 임금격차 최고, 청년고용률 최하, 출산율 최하, 국가의 사회복지지출 최하, 산재 사망자수 최고 등등 OECD 통계에 잡히는 우리나라의 지표들입니다.

줄줄이 나열하기도 벅찰 정도로 최하 또는 최악을 나타내는 이 수많은 지표들은 한결같이 대한민국에서의 삶이 인간으로서의 ‘행복’이란 단어와는 저 멀리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헬조선’이라는 시쳇말을 그저 자기비하적인 표현이라 무시해 버릴 수 없는 것이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세계 12위의 경제규모를 가진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사회적 약자 대변 못하는 한국의 선거제도

우리나라 소득 상위 10%와 하위 10%의 차이는 10.1배로 OECD 평균을 뛰어넘습니다.

그런데 OECD 평균보다 높은 나라들을 보면 대개 승자독식의 양당제 정치시스템을 갖고 있는 나라가 많습니다. 반면 상하위 10%의 격차가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들은 대부분 비례대표제를 시행하고 있는 유럽의 다당제 나라가 많습니다.

상위 10%의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집중도를 보면 90년대 신자유주의 바람이 강하게 분 이후 미국은 47%까지 가파르게 올라간 반면 유럽은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2% 늘어난 데 그쳤습니다. 한국은 미국처럼 45%까지 상승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그만큼 커진 것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요?

각국의 여러 정치경제학자들이 연구했는데 공통적으로 나온 결론은 정치제도가 그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다수대표제보다는 비례대표제 국가에서, 대통령제보다는 의회중심제 국가에서, 단독정부보다는 연합정부 아래서 재분배 효과가 훨씬 높게 나타났습니다.

복지를 위해선 증세가 필요한데 보수쪽은 기본입장이 세금감면입니다. 중간층은 증세보단 세금감면을 좋아할 수밖에 없죠. 반대로 다당제에서는 중간층이 하층과 결합해서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압박해 세금을 받아냅니다.

강명세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다수대표제는 1표라도 이기면 모든 걸 갖게 됩니다. 증세로 중산층 지지가 1%만 빠져서 저쪽으로 가면 모든 걸 잃기 때문에 증세를 하기에 위험부담이 큽니다.. 하지만 비례대표제에서는 잃어도 의석수만 줄어드는 거지 모든 것을 잃는게 아니죠. 선거제도의 그런 차이가 수십년 누적되면 지금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양당제의 특징은 무조건 반대하는 거죠. 반대해서 저쪽이 죽어야 내가 다음에 권력을 잡으니까. 그래서 양당제는 서로 반대하다 아무것도 안 되지만  다당제가 되면 과반을 이루기 위해 연합할 수밖에 없죠. 만약 3당이 연합하게 되면 각자 가장 원하는 아젠다를 놓고 타협하게 되고 그럼 최소한 3개의 아젠다는 그 정부 아래서 해결이 되죠.

조성복 독일정치연구소장

외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바람을 타면서 우리 사회에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는 소득양극화의 핵심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문제에서 보듯이 대법원에서까지 사측의 불법파견을 인정해도 사측은 직접고용을 하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또다시 단식농성을 벌여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숫자가 230만 명에 이르는 특수고용노동자들(택배기사, 학습지교사, 중장비기사, 대리운전 기사 등)의 경우도 국가인권위가 노동 3권 보장을 권고했지만 국회의 법 개정은 지지부진하기만 합니다.

소상공인들이 지난 8월 사상 처음으로 직접 광화문에 나와 대규모 집회를 열었던 것도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회에 이런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정당이 없는 것은 지금의 선거제도가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그 결과 두 거대정당이 특혜를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20대 총선의 정당득표율과 최종득표율을 보면 두 거대양당은 받은 표에 비해 의석수가 부풀려져 있습니다. 반면 군소정당들은 표의 가치가 축소돼 있습니다.

민주당의 표는 정의당표보다 5.8배나 부풀려져 있습니다.

지난 지방선거 때는 더 심했습니다. 서울시 광역의원 선거의 경우 민주당은 51%의 정당득표로 110명 의석 가운데 102석, 무려 93%를 가져갔습니다. 반면 바른미래당과 정의당은 10% 정도의 지지율을 얻었지만 0.9%, 단 1석만 얻었습니다. 민주당의 1표는 군소정당의 1표보다 23배나 부풀려졌습니다.


▲ 2018 지방선거 서울시 광역의원 선거 표의 가치. 민주당이 23배나 높게 셈된 것과 같다.

표심만 왜곡돼 있는 것이 아닙니다. 투표자 가운데 당선에 반영이 안되는 사표 비중은 88년 13대 총선부터 20대 총선까지 항상 50% 안팎을 기록했습니다. 투표자 절반 정도의 의사는  국회 구성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것입니다.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3년 전 중앙선관위가 도입을 제안했던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정당득표율에 따라 전체의석수를 결정하는 선거제도입니다.

독일도 우리와 같은 소선거구제에 1인 2투표 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1표는 지역구 후보에 1표는 정당에 투표합니다.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원의 숫자는 똑같이 299명으로 1대 1의 비율입니다. 정당지지율이 그대로 각당의 전체 의석수가 되기 때문에 정당득표율과 최종 의석율은 거의 차이없이 비례합니다.

유권자들의 한 표 한 표가 모두 누군가의 의석을 결정하기 때문에 투표율도 높아 한번도 70%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습니다. 우리와는 보통 20% 정도 차이가 납니다.

어느 정당도 한국의 정당들처럼 과잉대표되지 않고 과소대표되지도 않기 때문에 특정 정당이 과반을 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정당 간 연합이 이뤄지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 중산층 누구의 민심도 배제되지 않고 법안으로 반영됩니다. 현재의 독일이 보여주고 있는 수준높은 재분배와 복지는 민심이 그대로 반영되는 독일의 선거제도와 정당정치에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의회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과 대통령제의 한국은 정치시스템이 다릅니다.

비례대표제와 가장 궁합이 잘맞는 제도는 의회중심제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제 하에서도 승자독식의 다수대표제보다는 비례대표제가 훨씬 낫다는 정치학자들이 많습니다.

민심이 그대로 의석수에 반영돼 원내교섭단체 수준의 정당이 여럿 나타나게 되면 어느 정당도 다른 정당을 무시할 수 없게 되고,  자연스럽게 타협과 협력이 이뤄질 수밖에 없게 되죠. 예전의 DJP연합 때 오히려 개혁법안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생산됐던 경험도 있습니다.

최태원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외과 교수

75%의 룰

정치경제학계의 세계적인 석학인 아이버슨과 소스키스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주요 17개국 민주주의국가의 전후 50여 년 동안 다수대표제하에서는 우파 쪽의 집권 기간이 75%, 비례대표제 하에서는 좌파 쪽의 집권 기간이 74%였습니다. 증세를 놓고 중간층의 표심이 선거제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총선 결과를 놓고 보면 한국의 지난 30년의 모습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른바 진보 쪽인 민주당 계열 정당이 자유한국당 계열의 보수파를 이긴 적은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후폭풍 때 뿐이었습니다.

지방선거 압승 후에 선거제도 개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민주당이 곱씹어봐야할 대목입니다.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자유한국당의 선호하는 중대선거구제와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2017년 베를린시의 팡코 선거구 선거결과를 보면 지역구에서는 좌파당 후보가 1위로 당선됐지만 각각 3,4위를 차지한 사민당과 녹색당 후보도 의회에 입성했습니다. 소속 정당의  비례대표명부 상위순번에 올라있었기 때문입니다. 지역구 후보 역시 비례대표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어서 현역 의원들이 크게 불리하지 않은 선거제도가 독일식 비례대표제입니다. 자유한국당이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많지 않습니다.

이런 정당 간의 이해득실을 따지기 전에 무엇보다 87년 이후 우리의 정치를 장악해왔던 두 거대정당은 왜 국민들의 삶이 갈수록 피혜해지고 있는지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2년 전 대한민국 주권자들은 자신들이 위임한 권력을 잘못 사용한 대통령을 탄핵했습니다.

국회 역시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지 못하다면 시스템을 바꿔야합니다.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야지만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정치에 반영되고, 그때서야 비로소 국민의 삶도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습니다.

선거제도 개혁이 촛불정신의 연장선일 뿐 아니라 ‘헬조선 탈출로 가는 비상구’인 이유입니다.

취재:최기훈
촬영:정형민 김기철 오준식 신영철
편집:박서영
CG:정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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