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냉장고 문을 닫는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이란 철 지난 농담입니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현실에선 실현이 불가능한 일을 뜻합니다. 보험업계에선 이 말이 썰렁한 농담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 바닥에는 '코끼리' 만한 고객 몫의 보험금을 '냉장고'만한 목표치로 줄여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회사 손해사정업체’의 직원들, 즉 손해사정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험 소비자만 모르는 ‘손해사정'

먼저 '손해사정'이라는 낯선 용어부터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보험업계에서는 보험사고가 일어났을 때 보험금을 지급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보상이라고 합니다. 보험소비자들은 이 보상 절차가 가입자와 보험사, 1:1의 관계에서 진행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손해사정이라는 절차가 더 있습니다. 보험업 감독규정에 따르면, 소비자의 보험금 청구 이후 영업일 기준 3일 이내에 보험금이 지급되면 손해사정서 작성을 하지 않을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청구 이후 3일이 지나서 나오는 모든 보험금 청구 건은 손해사정 절차를 거치게 된다는 말입니다.

국내 손해사정제도는 1977년 보험업법 개정을 통해 탄생했습니다. 태생적으로는 보험 계약의 상대적 약자인 보험소비자를 보호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험소비자는 보험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제3의 입장을 가진 별도의 전문가(손해사정사)가 손해액 산정과 보험금 지급을 판단하도록 한 것입니다. 보험사 역시 제3자에 의한 손해사정 절차를 통해 가입자의 보험금 시비를 피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원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삼성생명 보험가입자 강경자 씨의 경우를 보면 현실에서 손해사정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강 씨의 남편은 2011년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후 6년 동안 문제없이 보험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올해 4월 보험 손해사정사라는 사람이 갑자기 남편에게 찾아왔습니다. 손해사정사는 환자에게 뭔지도 모르는 서류에 사인을 하라고 종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험금을 더 이상 지급하지 않겠다는 보험사의 통보가 왔습니다.

7년 동안 같은 사람이 같은 병원을 다닌 비용인데, 이제 와서 보험금이 안나오는 이유를 강 씨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손해사정사가 작성한 보고서를 보고 싶었지만 손해사정사는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취재진이 당시 손해사정을 담당한 직원에게 전화를 해 보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는 답변이 전부였습니다.

보험금 부(不)지급 고속도로 '셀프 손해사정'

보험 소비자를 보호할 것 같아 보이는 손해사정사는 왜 보험사의 편에서 일을 하는 걸까요. 전체 시스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위 강경자 씨의 사례에 등장하는 손해사정사가 속한 업체의 이름은 ‘삼성생명 서비스 손해사정 주식회사’입니다. 회사 이름에 삼성생명이 들어가지요. 이 업체가 입주해 있는 건물은 서울 당산동 삼성생명 건물입니다. 아시겠지요. 손해사정을 하는 업체가 삼성생명의 자회사입니다.

제3자가 공정하게 보험금 지급 여부를 판단하도록 하자고 해놓고 보험사 자회사 직원이 손해사정을 맡는 황당한 상황이 된 겁니다. 비유를 하자면 의료사고를 중재하는 기관인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병원에서 자회사로 운영하는 꼴이라는 거죠. 이 황당한 일은 30년 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손해사정사는 '이해관계를 가진 사건에 손해사정을 해서는 안되지만, 보험사의 자회사는 예외'라는 기이한 법령 때문입니다.

보험업법과 보험업법 시행령에서는 분명히 손해사정을 통해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보험업법 189조 3항)과 이해관계를 가진 자가 보험사고에 대해 손해사정하는 행위(보험업법 시행령 99조 3항)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행령에서는 자회사 손해사정회사가 모회사인 보험사의 계약 건을 손해사정하는 것은 ‘예외’로 한다는 단서 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공정성을 저해해서는 안 되지만 자회사 손해사정은 허용한다'는 역설적인 법령입니다. 이런 ‘셀프 손해사정’은 가뜩이나 보험사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1970년 대 손해사정 제도가 도입되던 시절에는 보험 관련 전문 인력을 보험사 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기형적인 ‘셀프 손해사정’이 예외로 인정됐다는 거죠. 하지만 지금은 2만 명이 넘는 손해사정사가 활동합니다. 현재 시점에는 필요없는 예외조항이라는 말입니다.

보험사들은 이런 법의 허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국내 주요 생명·손해보험사들은 자회사로 손해사정업체를 두고 있습니다. 7개 대형 보험사(교보생명, 삼성생명, 한화생명, DB화재, 삼성화재, KB손보, 현대해상)가 12개의 손해사정회사를 자회사로 두고 있습니다. 보험사들은 손해사정 10건 중 9건을 자회사에 맡깁니다.

다른 중소 보험사 역시 보험사 직원 출신이 주축이 된 위탁 손해사정업체를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실상 업계 전반에서 '셀프  손해사정'이 이뤄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보험사의 일방적인 보험금 부지급을 막을 안전장치인 손해사정이 무력화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손해사정 비용은 누가 지불하는지 아십니까. 보험계약자, 그러니까 소비자입니다. 소비자가 내는 보험료에 이미 손해사정 위탁 비용이 포함돼 있기 때문입니다. ‘소비자가 내는 돈을 받고 일하는 손해사정사가 보험사의 편에서 일한다.’ 현재 한국의 보험시장의 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죠.

손해사정사들, “착한 고객이 당한다”

무력화된 손해사정의 자리에는 소비자 몫으로 돌아갈 보험금을 줄이기 위한 편법과 탈법이 만연합니다. <뉴스타파>는 전현직 자회사 손해사정업체 직원들을 만나 손해사정 일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백태 만상을 들어봤습니다. 그간 ‘보험의 배신 시리즈’에서 취재한 주요 부지급 피해 사례들의 이면에는 어김없이 자회사 손해사정의 불공정 행위가 숨어 있었습니다.

# 착하면 당한다

손해사정사 A:고객이 순해 보이고 민원 성향이 없어 보이면 별도의 확인 절차 없이 그 자리에서 '이것 이것 때문에 지급이 안됩니다'하고 말해버립니다. 손해사정 직원들이 약아지다 보니 고객의 눈치를 보면서 타이밍을 잡는 거죠. 부지급에 동의하는 분위기면 아예 확인서를 들고 가서 서명까지 받아옵니다. 고객 입장에서는 정당한 보험금임에도 불구하고 '지급이 안 될 수도 있겠구나, (확약서) 써 드릴게요'라고 말하게 되는 거죠.

손해사정사 B: 큰 목소리 내는 소비자에게는 보험금이 안 나가야 할 상황인데도 민원이 우려되면 자료까지 만들어 가면서 보험금을 줍니다. 그런데 고객이 민원 성향이 없고 손해사정사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소위 '착한 고객'이면 '어머니, 보험금 지급이 안됩니다'라고 그 자리에서 바로 얘기를 합니다.
# '복·붙' 의료자문 (관련기사)

손해사정사 A: 공공연한 사실인데, 손해사정사가 (의사에게) 의료자문을 구할 때 아예 결과지를 만들어서 USB에 담아 가요. 보통 1장짜리 서류를 만드는데 서류 윗부분에 '이 서류는 환자를 직접 보지 않고 작성돼서 법률적인 증거가 되지 않는다'고 써넣죠. 그래야 의사 선생님도 부담 없이 쓰니까요. 의사 선생님도 (우리가) 이렇게 써간 서류를 그대로 '복사하기, 붙여넣기' 합니다. 손해사정 담당자가 원하는 대로 받아올 수가 있는 거죠. 제가 근무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안돼'가 없었습니다.

손해사정사 B :어쩌다 자문의로부터 면책(보험금 전면 부지급)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와도 보험사 심사과에서 이 자문은 넣지 말라고 합니다. (소비자에게)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손해사정 과정에서 보험사에 불리한 자료는 안 보여줍니다. 저도 회사 다닐 때는 많이 그랬는데, 아마도 모든 자회사 손해사정 직원이 그러고 있을 것입니다.
▲’보험의 배신’ 취재 중 만난 전직 손해사정사는 ‘착한 고객에게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보험업계의 비밀을 털어놨다.
# 고객 불이익의 원칙 (관련기사)

손해사정사 A : 예를 들면, 갑상선암의 경우 림프절 전이가 없으면 소액 암으로, 림프절 전이가 있으면 일반 암으로 보험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보험사 입장에서는 모호한 약관을 이용해 어떻게 해서든 소액 암으로 분류하려고 하죠.

손해사정사 B : 약관도 판례도 분쟁도 실제 자회사 손해사정에서는 그저 참고 자료일 뿐이에요. 약관에 대한 해석이 모호하면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약관의 규제에 대한 법률 5조 2항, 뜻이 명백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되어야 한다)인데 실무 상에서는 금감원이나 법원이 보험금 지급을 강제하는 건이 아니면 적용되는 일이 없다고 봐요.
# '진짜 손해사정서’는 못준다

손해사정사 A : 보험사가 손해사정 보고서 내용 자체를 관리하기 때문에 손해사정사가 쓰긴 하지만 사실 보험사가 얘기한 것을 쓰는 것밖에 안돼요. 약관에 없는 내용을 부지급이 나오도록 맞춰 쓴 이상한 보고서가 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고객이 전화하면 못 드린다고 당당하게 얘기하죠. 금감원에서 문의해서 받을 수 있다고 하면 그때 줘요. 그것도 수정 다하고 보내주죠. 사실 (소비자가) 받아도 별 의미가 없어요.

손해사정사 B : 저는 자회사 손해사정업체 다닐 때 손해사정 보고서를 고객에 줘야 한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손해사정 보고서를 환자가 열람할 수 있다, 환자가 요청하면 이걸 줄 수 있다는 내용의 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월초에 청구한 보험금이 잘 나오는 이유

자회사 손해사정사들의 평가 시스템은 가혹하기로 정평이 나있습니다. 손해사정사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평가 시스템으로 '일일 평가'와 '보험금 누수 방지 평가'를 꼽습니다.

‘일일 평가’는 하루 치의 업무 할당량을 정하고 매일 그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보험사고에 대한 조사는 부실해지고 보험소비자의 목소리가 반영될 여지는 줄어듭니다. 시간에 쫓기면서 임의적인 면책(부지급)도 왕왕 생긴다고 합니다.

다수의 선량한 보험 가입자들에게 지급돼야할 보험금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누수 방지'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보험금 누수 방지 평가’는 실상 보험사에서 할당한 보험금 부지급 목표치에 다름없다는 것이 일선 손해사정사들의 설명입니다. 취재진과 인터뷰한 한 의료부문 손해사정사의 경우, 한 달에 1억 5천만 원의 보험금을 부지급하거나 줄여야 했다고 합니다. 또 한 달 처리 건수 29건 중 12건을 면책(부지급) 또는 합의(보험금 삭감)를 해야 했습니다.

이유 불문하고 목표치만큼 보험금 지급을 줄여야 하다 보니 소비자들은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같은 조건이어도 월초에 청구한 보험금은 잘 나오는 데, 월말에 청구한 보험금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부지급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월초에는 비교적 공정하게 손해사정을 할 수 있지만, 목표치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는 월말에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지급 보험금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회사 손해사정사들은 할당된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보험 소비자의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증언했다.

"하루아침에 고쳐질 금융 적폐...정부는 왜 안 고치나?"

시민사회와 정치권에서는 자회사 손해사정 구조를 개선하자는 논의가 이미 수 년째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6월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소비자가 독립손해사정법인(자회사 또는 보험사 위탁이 아닌 별도의 손해사정법인)을 선임했을 때 그 비용을 보험사가 부담하도록 하는 보험업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하지만 보험료가 오르고 보험사기 위험이 증대될 수 있다는 보험업계의 주장에 막혀 1년 넘게 상임위에 계류 중입니다.

시민단체에서는 박용진 의원의 개정안보다 더 강도 높은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회사에 대한 손해사정 위탁 비율을 제한하거나, 아예 제도의 취지를 살려 선진국에서 시행 중인 ‘공공 손해사정사’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지속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개선을 촉구해온 금융소비자연맹은 정부 당국에서 조금만 의지를 가져도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는 금융적폐라고 말합니다. 금융위원회 소관인 보험업 감독규정에서 계약자가 손해사정사 선임할 수 있는 조건을 '보험사의 동의를 얻은 때'로 국한하고 있어 이미 보장되어 있는 소비자의 손해사정사 선임권을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상임회장은 사실상 보험금 지급 문제를 둘러싼 모든 갈등의 이면에 자회사 손해사정 문제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당국이 최우선적으로 나서 개선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취재 : 오대양
촬영 : 신영철, 김남범
편집 : 정지성
CG : 정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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