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국100년 특별기획] 족벌사학과 세습① 대학교는 망해도 설립자는 잘산다
2019년 06월 27일 20시 24분
스위스 출신의 교육자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1827)는 교육이 불평등을 해소하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높은 교육열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동력이었다. 하지만 이제 한국에서 교육은 불평등 해소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기제가 됐다.
2000년 대에 들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자사고 등 이른바 ‘특수목적’ 고등학교가 대거 등장했다. 다양한 교육 수요를 담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외국어고, 과학고, 자사고 등은 ‘특수목적’이라는 취지와 달리, ‘SKY’로 불리는 서울 유명 대학과 의대 진학 등에 초점을 맞춘 입시전문 기관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른바 금수저와 흙수저가 본격적으로 갈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 뿐이 아니다. 최근 10여 년 동안 사법고시 폐지를 전제로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이 도입되고, 외무고시 폐지와 함께 외교아카데미를 졸업해야 외교관이 될 수 있도록 제도가 변경됐다. 이런 제도 변화와 경쟁 위주의 교육은 결과적으로 ‘불평등의 제도화’를 초래하고 있다. 극빈층과 차상위 계층의 자녀들은 사교육 비용을 대지 못해 대학 진학에서 절대 불리해지고, 이것이 학교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는 걸림돌이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이동(계층이동: social mobility)이 거의 불가능해지는 제도와 구조를 고착시키고 있는 것이다.
교육의 변질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진행됐다. 예로부터 학교를 설립하거나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보다는 ‘명예’를 중시하는 이들로 여겨졌다. 실제 ‘명예를 먹고 산다’고 말하는 사학 설립자나 종사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많은 사학 설립자나 그 가족들이 국회 등 정계에 진출해 정치 권력의 중심부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아버지 나채성(전 공군 조종사)씨가 1973년 설립한 홍신학원(홍신유치원, 화곡중학교, 화곡고등학교, 화곡보건경영고등학교)의 이사를 10년 이상 지냈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남편은 김재호(1963년생) 판사다.
최근 자유한국당을 탈당해 대한애국당(최근 ‘우리공화당’으로 이름을 고침) 공동대표가 된 홍문종 전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사무총장은 경민학원(경민대학교, 경민고등학교, 경민비즈니스고등학교, 경민IT고등학교, 경민중학교, 경민여자중학교, 경민유치원)의 설립자이자 민정당(자유한국당의 전신) 국회의원(11-12대)을 지낸 홍우준(洪禹俊: 1923.04.23.-2018.03.17.)의 아들이다. 홍우준은 1968년 경민학원을 설립해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가 1981년 전두환의 5공화국 첫 국회인 11대 국회에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입성하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홍문종 의원도 아버지가 설립한 경민학원 이사장, 경민대 학장 등도 지냈으며 아버지 지역구였던 의정부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현재 홍문종 의원의 어머니인 이연신 씨가 경민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장제원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의 아버지는 부산의 동서대를 설립한 장성만(張聖萬: 1932.11.02.-2015.12.06.) 전 국회부의장(목사)이다. 고 장성만 의원은 1970년 선교재단의 자금 지원을 받아 학교법인 동서학원을 설립해 경남전문대를 운영해오다 1992년에 동서공대를 세워 4년제 대학 설립의 꿈을 이룬다. 1995년엔 이 대학을 종합대학인 동서대로 개편해 총장직을 맡았다.
그는 1981년 전두환의 민정당 시절 11대 국회의원 선거 때 부산(북구)에서 당선해 정계에 진출했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재선(1구 2인제)해 민정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2대 국회에서 국회 부의장에 사실상 단독 출마해 당선된다.
전두환의 5공화국 시절 집권당(민정당)과 정부의 관계는 지금의 당정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당(黨)이 우위에 있었다. 민정당에서 사무총장, 원내총무, 정책위 의장(이른바 당3역)의 위세는 장관은 말할 것도 없고, 부총리, 총리에 못지 않았다. 민정당에서 장관이나 부총리 등을 ‘호출’하면 바로 장차관을 비롯한 각료들이 당사 등으로 달려가 당의 요구를 듣거나 당정 협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장제원 의원의 아버지 장성만 의원은 정책위 의장으로 정부 각 부처와 정책에 직간접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1997년 4월, 학교법인 동서학원과 동서대의 비자금 조성 및 횡령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장성만 전 총장과 장형부 재단 사업국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 조사 결과, 장성만 씨는 이사장 자리를 자신의 부인인 박동순 씨에게 넘겨주고, 6촌 동생인 장형부 씨를 재단 사무국장에 앉히는 등 족벌체제를 구축한 뒤 1993년부터 학교공금을 빼돌려 무려 55억여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가 드러났다.
장 씨는 경남전문대 진입로 건설 관련 5억5천만 원, 교육문화센터 신축공사 관련 10억 원 등 공사비 과다계상을 통해 비자금 29억9천만 원을 조성했으며, 동서대 인문사회관과 경남전문대 본관 신축공사의 시공업체인 남도개발에서 12억 원의 리베이트를 받기도 했다고 당시 검찰은 발표했다. 1996년 10월에는 교수들이 기업체에서 받은 연구 용역비 2억3천만 원을 교수들의 동의도 받지 않고 유용했으며, 그해 3월에는 학생들의 등록금인 학교운영자금 8억6천만 원까지 비자금으로 빼돌린 것으로 검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검찰은 장 씨가 비자금에서 큰아들(장제국)의 서울 여의도 89평짜리 아파트 구입비로 4억3천5백만 원, 둘째 아들(장제원)의 출판사 운영비로 8억4천4백만 원, 부인의 골프회원권 구입비로 6천2백만 원, 생활비로 5억2천9백만 원을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한 달이 넘도록 폭넓은 수사를 펴 구체적인 범죄 사실을 밝혀내고도 신병처리 단계에서 장 씨가 총장직을 자진사퇴하고 고령인데다 횡령한 돈을 모두 갚았다는 점 등을 들어 그를 불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횡령액이 많고 돈세탁을 통해 범행을 감추려 한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검찰이 불구속 기소했기 때문에 ‘봐주기 수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구속 수사가 보편적이던 당시, 막대한 비자금 조성과 횡령으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가 드러났음에도 구속 대신 불구속 기소한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학교 운영에 이런 난맥상이 드러났지만 동서대는 해마다 정원이 늘어났고, 정보화 우수대학으로 선정돼 교육부에서 지원금까지 받고 있다. 현재 동서대 이사장은 장제원 의원의 어머니 박동순 씨가 맡고 있고, 친형인 장제국 씨는 동서대 총장이다. 18대 국회에 진출한 장제원 의원은 동서학원 이사, 경남정보대 학장, 동서대 부총장을 지냈다.
인촌 김성수(金性洙:1891.10.11-1955.02.18)는 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일제 때 행적을 두고 그만큼 논란이 많은 인물도 드물다. ‘음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고 주장하지만, 공개적으로 청년학생들의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을 창당하고 2대 부통령(1951.06-1952.05)을 지냈다. 1962년 3월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나 56년 만인 2018년 정부는 서훈을 박탈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김성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했다.
그는 호남의 만석꾼 지주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다. 규장각 직각(요즘의 서울대 도서관장 격)을 지낸 장인 고정주(高鼎柱: 1863-1943)가 설립한 창평 영학숙(英學塾: 창평의숙)에서 공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14년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했다. 이듬해인 1915년 4월 중앙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했고, 1932년 3월에는 자금난에 빠졌던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를 인수하여 재단 주무이사를 지내다 그해 6월 보성전문학교 제10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이용익이 설립한 이래 계속 재정난을 겪다가 천도교 교주 손병희 선생이 맡았으나 재정난이 계속되자 김성수에게 넘어 간 것이다. 보성전문은 1946년 종합대학 고려대학교로 승격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인촌 김성수의 출발은 기업인이었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했다. 김성수는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는 해방 다음 달인 1945년 9월 미 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고, 10월에는 미 군정청 한국인 고문단 의장으로 활동했다. 김성수는 정치에 본격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소유·지배하던 기업(경영)은 동생인 김연수(金秊洙: 1896.08.25.-1979.12.04.)에게 맡겼다. 김연수의 아들과 손자 가족들이 지금 삼양사와 경방을 비롯한 삼양그룹을 소유지배하고 있다. 동생 김연수는 기업을 경영하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장을 지냈다. 김연수는 정부 수립 이후에는 한국경제협의회(지금의 전경련의 전신) 초대회장도 지냈다. 동생 김연수 역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다.
김성수가 정계에 뛰어들어 부통령까지 지냄으로써 그의 일가는 돈(재벌), (정치)권력, 명예(사학재단)라는 세 가지 세속적 가치와 수단을 동시에 갖게 됐다. 김성수가 두 명의 부인과 사이에 낳은 9남 4녀와 동생 김연수의 7남 6녀와 후손들은 우리 사회 각 분야의 기득권 세력과 거대한 혼맥을 형성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대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인 고려중앙학원 현 이사장은 증손자 김재호(1964년생,채널A대표 이사)다. 김성수(인수자), 김상만(장남) , 김병관(손자)에 이어 세습이 4대째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독립한 후 김구, 조소앙, 신익희 등 임시정부 지도부 인사들이 멀리 내다보고 민족 지도자를 길러낼 필요가 있다는 데 합의해 설립한 대학이 국민대학이다. 1946년 9월 1일 서울 창성동에 국민대학관으로 설립한 국민대학의 초대학장으로 신익희(申翼熙: 1894-1956.05.05.)가 취임했다.
김성곤은 8.15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 경북지부에서 활동했으며, 1946년 미군정의 친일경찰의 횡포에 자극받아 일어난 대구 10.1 사건에서 친구 박상희(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형), 황태성(나중에 북한 무역성 차관으로 ‘특사’로 남파됐으나 박정희 정권이 ‘간첩’으로 몰아 처형)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후 사업을 하다 1958년 고향인 달성군(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4.19 혁명 후 한때 정계를 은퇴했으나 5.16 쿠데타 후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6대부터 8대까지 내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김성곤은 민주공화당 내에서 박정희 친위대를 자처하면서 3선 개헌에 회의적이던 김종필계와 대다수 공화당 인사들을 강하게 압박해 3선 개헌을 성사시켰다. 그는 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의원과 함께 이른바 4인방(체제)으로 불리며 박정희를 대리해 공화당을 사실상 ‘관리’했다. 특히 재벌에게 해외차관과 정부 발주공사 금액의 10%를 자신을 통해 정치자금으로 상납하게 하면서 정권의 정치자금 창구를 자신으로 단일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과 재벌,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는 그가 쌍용그룹 회장(재벌총수), 동양통신 사장(언론인)이면서 공화당 재정위원장(정치인)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성곤은 1959년 국민대학을 인수했다. 현재 국민대학교 학교법인 이사장은 김성곤의 손자인 김지용(1973년생) 태아산업 부사장이 맡고 있다. 김성곤은 1952년 설립한 뉴스통신사 동양통신의 회장을 역임했고, 국회의원과 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동양통신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당시 우리나라 뉴스 통신사는 합동통신과 동양통신 두 개가 주축이었으나 전두환의 1980년 언론통폐합 때 두 통신사를 강제합병하여 연합통신(현재 연합뉴스로 개명)으로 탄생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성곤 사망 후 그의 장남인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이 아버지의 지역구인 대구 달성군에서 1996년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부자(父子) 국회의원이 됐다. 김석원은 회사가 경영위기에 빠지자 1998년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경영에 복귀했고, 달성 지역구는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요청으로 입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어받았다. 박정희-김성곤 사이에 시작된 ‘특수관계’가 대를 이어 자식 사이의 ‘주고받기’로 이어진 셈이다. 김석원 회장은 1997년 말 외환 위기를 전후해 분식회계로 수십억 원의 회사재산을 빼돌린 혐의로 2005년 구속기소되기도 했다. 동생인 김석준 당시 쌍용건설 회장은 같은 혐의로 불구속기소됐다.
지금은 교수들과 학생들의 끈질긴 투쟁으로 상지대가 정상화됐지만, 상지대(총장 정대화)는 한 때 세종대, 수원대와 함께 ‘사학비리의 상징’이었다. 김문기(金文起: 1932년생) 상지대 전 이사장은 가구공예점을 경영하다 1974년 상지학원을 인수했고, 1980년 전두환이 민정당을 창당할 때 창당발기인으로 참여,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이 됐다. 이어 13-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향인 강원도 명주·양양 지역구에서 민정당 공천으로 내리 당선, 3의원을 지냈다. 그가 정계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의 상지학원은 설립자 가족들의 각종 비리와 불법 의혹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김문기 이사장 가족은 무소불위의 권력자처럼 학교 정상화와 사퇴를 요구하는 교수와 학생들의 목소리에 눈도 깜짝하지 않고, 이들을 무자비하게 해고하고 징계했다.
김문기가 상지대를 장악했던 배경은 다음과 같다. 그는 1972년 종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선된다.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민관식 씨의 지원으로 그는 강원도 원주대학 임시이사로 파견된다. 교육과는 아무 관련이 없던 그가 갑자기 대학의 관선이사가 되면서 상지대학 사학비리의 서막이 열렸다. 1974년 1월 원주대학 설립자인 원홍묵 씨로부터 대학을 인수한 그는 상지대로 이름을 바꿔 이사장에 올랐다. 그의 나이 42살 때였다.
김문기는 여러 차례 자신이 설립자라고 주장해 왔지만 지난 2004년 대법원은 상지대 법인은 원홍묵 씨가 설립했고 운영권만 이전됐을 뿐이라고 판결했다. 원 씨는 문교부 장관이던 민관식의 압박 속에서 원주대 운영권을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김문기에게 넘겼다고 주장해 왔다.
상지대 이사장에 오른 1974년부터 구속된 1993년까지 2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김문기의 사업체는 강원상호신용금고(현 강원저축은행)와 가구점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무슨 돈으로 100건에 이르는 부동산을 매입했을까. 그의 부동산 매입 자금 출처를 가늠케 하는 사례들이 있다.
교육부는 1992년 10월부터 1993년 상반기까지 상지대에 대한 특별감사를 벌였다.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 지급 규모를 축소한 점, 1990-1992년 사이에만 1억2천만 원 상당의 수의계약이 이뤄진 점, 실험실습비와 장학금을 유용한 점 등이 감사에서 적발됐다. 특히 도서구입비를 건축비용으로 유용한 뒤 청계천 상가에서 헌책을 톤(t) 단위로 사다가 도서관에 비치한 일이나 당시 도서관에 정기간행물이 하나도 없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재산 축적 과정을 잘 아는 상지대 관계자들은 그의 왕국이 ‘권력유착과 비리로 쌓아올린 바벨탑’이라고 비판한다. 그가 부동산 재벌이 되는 과정은 대표적 사학비리의 주인공이 돼 가는 과정과 맞물린다. 교육과 무관했던 가구업자가 정치 연줄을 이용해 대학을 인수한 뒤 학교에서 빼낸 돈으로 땅을 넓히고 건물을 높여온 경로와 고스란히 겹치기 때문이다.
상지학원에서 일했던 한 직원은 “김문기 씨의 재산 가운데 절반 이상은 상지대 이사장을 지낼 때 학생들 등록금으로 산 부동산들”이라고 증언했다.
1960년대 후반 김문기는 당시 종로가 지역구이던 민관식 의원의 선거운동을 도운 것을 계기로 정부에 가구를 납품하면서 재력을 키운다. 1967년에서 1970년 사이 그는 인사동, 숭인동 땅 외에 도봉구(현 강북구) 우이동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에도 눈길을 돌렸다. 등기부등본엔 그가 우이동 226번지와 228-233번지 대지 8727㎡(2644평)와 길 건너 산8-15번지의 임야 4만5045㎡(1만3650평) 등 1만6천여 평의 땅을 1967년 9월14일에 집중 매입한 것으로 나온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967년 12월 4일, 서울시는 40만 평에 달하는 우이동유원지 개발사업을 발표한다. 이후 거짓말처럼 김 씨가 매입한 터에 우이동유원지가 들어섰다.
김문기는 1972년과 1981년 임야와 대지를 추가 매입해 지금도 우이동 일대 6만2932㎡(1만9071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인근 임야와 대지의 가격은 올 2분기 국토부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200억 원대에 이른다. 1971년 그린벨트로 지정됐다가 1998년 취락지구로 변경된 이곳에 그는 5개 음식점을 임대해주고 있다. (2016.07.16.일자 한겨레 토요판: ‘사학비리의 끝은 1조원대 부동산 왕국’에서 인용)
김영삼 정권 출범 첫해인 1993년 ‘문민정부 사학비리 1호’로 교육계에서 퇴출된 김문기 일가가 한때 상지대의 운영권을 다시 장악하기도 했다. 김 씨의 둘째아들 김길남 씨가 2014년 3월 말 상지대 이사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출됐던 것이다.
상지대는 김문기 일가의 일자리이자 축재 수단이었다. 김문기 씨는 부인 김옥희(1934년 생) 씨와 4녀 2남을 두고 있다. 부인은 상지대 이사와 상지문학원 이사장을 지냈고, 사위가 총장 비서실장, 매제는 전문대학장, 8촌은 교무과장·한방병원 총무과장을 지내는 등 김문기 가족이 학교를 완벽하게 ‘사유화’ 했다.
김문기의 장남 김성남(金晟南: 1965년생)은 건설회사 사장으로 있으며, 상지대의 상임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의 장인이 국회 법사위원장을 지낸 조찬형(趙贊衡: 1938년생) 전 평민당 의원(13, 15대)이다. 김문기와 김성남은 모두 상지대 이사진 명단에 빠졌지만, 현재 김문기의 며느리(김성남의 부인) 조민정 씨가 법인 이사로 선임돼 이사직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교육 분야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개혁 저항이 거센 영역이다. 왜 그럴까?
한국 사회에서 상승이동(계층이동: social mobility)은 누군가의 ‘하강이동’을 통하거나, 빈곤층과 상대적 약자들의 희생을 통해서 가능했던 현실, 제도, 관행과 무관하지 않다. 사학 설립자 가족들이 학교와 학생들에게 오롯이 써야 할 등록금과 국가 예산지원을 가로채 자신들의 사익을 채워도 이를 감시해야 할 정부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2004년 박근혜 대표 지휘 아래 노무현 정부가 내걸었던 4대 개혁입법 중 사립학교법 개정 철회를 요구하며 53일간 사활을 걸고 ‘일사불란’하게 벌인 장외투쟁은 사학법 재개정 논의 약속 등을 얻어내고 마침표를 찍었다. 그들이 그렇게 일사불란한 투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2004년 당시 박근혜의 한나라당이 노무현 정부의 사학법 개정 방침을 좌절시키고 몇 년이 지난 뒤 모 국회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사학 재단의 이사(장)를 지냈거나 지내고 있는 한나라당 소속 전·현직 국회의원이 30명 정도였다.
박근혜(영남대 이사장), 정몽준(현대학원 이사장), 강석호(벽산학원 이사장), 고흥길(경원학원 개방이사), 김태환(성일학원 이사), 김호연(서강대 개방이사), 여상규(신진학원 이사), 이은재(진명전진학원 개방이사), 조진형(송도학원 이사), 장제원(동서학원 이사), 정해걸(삼영학원 이사), 나경원(홍신학원 이사), 김충환(세명학원 이사), 고승덕(유신학원 이사), 이강두(한국승강기대학 이사장), 김정숙(단국대학 개방이사), 박재욱(경북학원 이사장), 김일윤(경흥학원/원석학원 이사장), 홍문종(경민학원 이사), 홍우준(경민학원 이사장), 김찬진(가톨릭학원 개방이사), 현승일(국민학원 이사), 강창희(거붕학원 이사), 정창화(근영학숙 이사), 김영덕(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고려학원 이사), 이해구(두원학원 이사), 현경대(대광학원 이사), 신영국(남북학원 설립자/이사), 나경수(우송학원 이사), 이상희(일광학원 이사). <이상 2006-2010년 통계> |
취재: 신학림
데이터 시각화:임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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