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6일에 방송한 ‘목격자들’에는 오래전 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담겨져 있다. 바로 1991년 우리나라에서 일본군의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최초로 고백을 한 김학순 할머니다.
나는 지난해 연말, 한일 정부 사이에 진행한 ‘위안부 협상’ 결과를 보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러던 상황에서 생각난 것이 바로 김 할머니와의 20년 전 인터뷰였다. 당시 나는 지금 <목격자들>제작을 함께하고 있는 안해룡 감독의 사무실에서 PD 일을 배우던 학생이었다. 안 감독에게 전화를 해서 그때 촬영 테이프가 존재하는 지 확인했다. 다행히 찾을 수 있었다. 영상을 확인한 후 2주 후에 방송을 내보냈다.
할머니의 육성이 담긴 영상은 1997년 7월, 김학순 할머니가 계시는 서울 월계동 임대 아파트에서 촬영한 것이다. 그때 나는 대학교 4학년 재학 중이었다. 당시 홈비디오로 많이 쓰던 8mm 카메라로 촬영했다. 김 할머니는 몸이 많이 안 좋아 거의 누워 계셨는데, 인터뷰를 간 날은 빳빳하게 풀을 먹인 삼베옷을 깨끗하게 다려 입고 나를 맞이했다. 김 할머니는 꼿꼿하게 앉아 약 1 시간 20분 간 촬영을 응해주셨다.
20년 전 촬영된 영상이지만, 마치 어제 인터뷰를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SD 화질과 화면 비율이 4:3인 것 외엔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당시 인터뷰의 주 내용은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민간 기금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에도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는 없었다. 다만 일본 민간에서 조성한 기금으로 보상을 하겠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김 할머니는 이 소식에 역정을 내셨다. 돈이 아닌 진실을 담은 일본 정부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전 홀로 지내셨던 김학순 할머니는 집안에 거북이를 키웠다. 거북이 키우는 일은 유일한 소일 거리였던 셈이다. 할머니는 인터뷰하는 그 날도 거북이에게 파리채로 잡은 파리를 먹이로 주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거북이)가 오래 사나, 내가 오래 사나, 한번 보자.” 아직도 이 목소리가 생생하다.
김 할머니는 그러면서 “100살이든 110살이든 살아서, 끝까지 살아서 내 귀로 일본 정부와 일왕의 사과를 듣겠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그러나 김 할머니는 끝내 이 말을 듣지 못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5개월 뒤, 1997년 12월 할머니는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이날 촬영한 김학순 할머니의 영상은 생전에 하신 마지막 영상 인터뷰가 됐다.
김학순 할머니를 인터뷰했던 20년 전 모습과 2016년 지금의 상황은 별반 다를 게 없다. 지금도 돈 몇 푼으로 할머니들을 입막음하려 하고, ‘불가역적인 합의’라며 윽박지르는 상황이니 말이다. 김 할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한 달이 넘도록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영하 15도의 날씨에도 노숙을 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교차 시켜 방송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프로그램을 방영한 후 PD 선배들에게 들은 얘기가 있었다. 김학순 할머니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수많은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방송국 테이프 보관실에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90년대 초중반 지상파 방송사에서는 ‘위안부’ 할머니들에 관한 프로그램이 수 없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금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영상은 거의 없다. 지상파 방송국 지하 창고에도 충분히 자료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저작권에 걸려 정작 필요한 상황에서는 쓸 수 없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자료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가지고 있던 출처를 모르는 짧은 필름 몇 개와 일본 저널리스트들에게 사용 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진 자료 몇 장이 전부였다. 우리 땅에 살고 있던 그리고 살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이지만 우리는 그 할머니들의 기록을 사용하려면 일본 저널리스트의 기록을 얻어 써야 하는 현실이다.
쓸 수 있는 기록과 영상은 ‘공익적 가치’에서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할머니의 마지막 육성을 20년이 지난 2016년 다시 공개할 수 있었던 것은 저작권이 정대협과 당시 내가 속해 있었던 아시아프레스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독립PD 활동을 하면서 김학순 할머니처럼, 출연자들의 마지막 음성을 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과거 MBC에서 ‘W’를 만들던 시절, 아프리카에서 에이즈 환자들의 마지막 인터뷰를 했고, 지뢰 피해자들의 인터뷰도 그렇다.
▲ W제작 시절, 인터뷰했던 에이즈 환자들.
그리고 “세계는 지금”의 제작에 참여하면서 2010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우 윈틴 선생을 인터뷰했다. 언론인이기도 한 우 윈틴은 미얀마의 군사독재정권에서 19년 동안 구금된 미얀마 최장기 양심수였다. 우 윈틴은 2014년 4월, 향년 86세 일기로 숨졌다.
2014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의 ‘자유언론실천선언’ 40주년을 맞아, 뉴스타파에서 ‘동아투위’ 특집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이 프로그램 제작에 내가 참여해 제임스 시노트(한국명 진필세) 신부님과 2014년 9월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그게 신부님의 마지막 영상 인터뷰였다. 시노트 신부님은 2014년 12월 23일 선종했다.
▲ 고 성유보 선생 (1943.6.28- 2014.10.8)은 1968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해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참여했다고 1975년 해직됐다. 이후 동아투위를 결정해 언론자유 수호를 위해 헌신했다.
10여 년 전 조연출 시절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출연하신 분들까지 생각하면 수많은 어르신들의 마지막 음성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촬영했던 영상과 화면이라도, 정작 필요할 때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대부분 ‘카피라이트’ 라는 것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카피 레프트’를 해 볼 생각이다.
사실 인터뷰에 응해주시는 어르신들이 몇 시간 씩 증언 하시는데 방송에서 기껏 몇 마디 잘라 쓰라고 인터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올해 <목격자들>을 통해 이 사회의 어르신들이 이 땅에 남은 사람들에게 남기는 말씀을 담아 공익적인 차원에서 공유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다. 100년이 흐른 후에도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는 인터뷰 영상기록을 ‘아카이빙’하는 작업이다.
기록은 그 기록이 공유되고 재생산 될 수 있을 때 기록으로 가치를 지닌다. 지하 창고에 처박혀 있는 기록은 죽은 것이다. 살아있는 기록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