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죽지 않길”…차별금지법을 외치는 이유

2021년 12월 31일 14시 30분

2021년 12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는 무지개 빛깔로 알록달록한 천막이 하나 있다. 2021년이 지나기 전에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외치는 공간이다. 차별금지법안(장혜영 의원 대표발의), 평등에 관한 법률안(이상민 의원 대표발의) 등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는 일명 ‘차별금지법’은 성별과 나이, 출신 지역,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등 20가지가 넘는 어떤 사유로도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07년에 처음 발의됐지만,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정되지 못했다.
지난 11월 8일, 사람들은 결국 길바닥으로 나왔다. 지지율 1, 2위를 다투는 거대 양당의 대통령 후보들이 차별금지법에 대해 ‘사회적 합의’만을 강조하고 있을 때였다. 연내 제정은커녕 다음 정부에서도 법 제정이 어려워 보이는 상황. 차별금지법제정연대에 참여하는 163개 전국 시민사회단체, 차별금지법을 지지하는 여러 단체들은 한나절 또는 하루씩 번갈아가며 농성장을 지켰다.
뉴스타파는 12월 20일부터 일주일 동안 농성장을 찾았다.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차별금지법 연내 제정’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무지개빛 농성장에서 15번째 새해를 맞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제 2, 제 3의 변 하사님이 나오지 않도록…”

2021년이 열흘 남짓 남은 어느 날, 차별금지법제정충북연대(충북 차제연)의 조장우 집행위원장과 유진영 집행위원은 충북 청주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차별금지법을 만들겠다며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까지 서울 국회에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두 사람은 3년 전 치러진 6.13 지방선거를 떠올렸다.
천막 농성 43일차인 2021년 12월 20일, 차별금지법제정충북연대의 유진영 집행위원(왼쪽)과 조장우 집행위원장(중간)이 전날 농성장을 지킨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일부 정치인과 보수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지역의 인권조례가 동성애를 옹호한다”는 주장이 전국으로 퍼져가던 시기였다. 인권조례가 있는 지역의 지자체, 의회 홈페이지는 ‘동성애 옹호’를 언급하며 인권조례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게시글로 도배되곤 했다. 군의회 의원 만장일치로 통과됐던 충북의 ‘증평군 인권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는 제정된 지 6개월 만에 폐지됐다. 조례안에는 성소수자, 동성애와 관련된 문구조차 없었다. 조장우 위원장은 “그냥 ‘인권’ 자만 붙으면 ‘다양성’ 붙으면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유진영 위원을 비롯한 활동가들은 노동인권, 여성인권, 청소년인권이 따로 없다고 판단하고 힘을 모으기로 했다. 고용, 교육, 재화·용역, 공공서비스 등 모든 영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차별과 혐오를 막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력을 다하기로 했다. 그렇게 충북지역의 인권사회단체들은 2018년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연대체를 구성했다.
조 위원장은 “결국 (차별금지법이) 제정은 가능하다고 보지만 그 시간들이 좀 아깝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전환수술을 이유로 군에서 강제전역을 당한 뒤 지난 3월 생을 마감한 고 변희수 하사 얘기를 꺼냈다. 변 하사는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청주에서 사망했다. 당시 충북 차제연은 애도 성명을 내고 길거리에 변 하사를 추모하기 위한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시민들은 “제 2의, 제 3의 (변희수) 하사님이 나오지 않도록. 차별 없는 세상으로”, “더 이상 죽지말고 함께 싸웁시다” 같은 추모의 글을 남겼다.
변희수 하사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바랐다. 충북 차제연 주최 행사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차별금지법이 있었다면 이게 바로 차별이라고 호소할 수 있고, 변 하사도 조금 더 버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조장우 위원장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트랜스젠더 청소년’이 여대에 다니며 군인을 꿈꾸는 사회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가정과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성인인 성소수자보다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다.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송지은 상근변호사와 아델 활동가는 이들이 어떤 단계를 거쳐 얼마나 심각한 고통에 직면해가는지를 하나씩 설명해줬다.
2021년 12월 21일,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송지은 상근변호사(왼쪽)와 아델 활동가(오른쪽)가 국회 농성장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청소년 성소수자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들킨 뒤 집 안에서 부모에게 폭행을 당할 확률이 높다. 상당수 부모는 동성애를 질병으로 보고 이성애로 바꿔준다는 전환 치료를 강요한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성소수자임을 숨기기로 마음먹은 청소년은 학교에서도 혐오 발언과 각종 차별을 감내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퀴어문화축제 가지 마라, 더럽다”고 하고, 사회 수업시간에 ‘성소수자를 존중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찬반 토론을 시키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쌓인 고통을 교내 상담교사에게 털어놓으면 부모도 이 사실을 알게 돼 가정폭력이 반복되는 등 악순환이 이어진다.
탈가정, 탈학교 이후 가게 된 청소년 쉼터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쉼터 직원과 또래 청소년들의 정신적 폭력이 계속되고 아예 입소 자체를 거부당하기도 한다. 교육권을 사실상 박탈당한다. 게다가 청소년 성소수자는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한 직업인으로 활동 중인 ‘성인 성소수자’를 찾기도 어렵다. 미래를 꿈꾸지 못하고 희망을 잃고 만다. 마지막에는 어디에도 도움을 구하지 못한 채 혼자 끙끙 앓는다. 실제 이런 과정을 거친 몇몇 청소년 성소수자는 스스로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
‘띵동’ 센터 한편에는 이렇게 세상을 떠난 청소년 성소수자의 사진이 놓여 있다. 송지은 변호사는 “누구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송 변호사는 인터뷰 내내 울먹였고 때때로 먼 곳을 바라보거나 고개를 떨궜다. 아델 활동가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그게(소식이) 부고”라고 덧붙였다. 곁에 있는 성소수자의 부고를 받고 주변인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돌리고 같이 조문을 가고 조의금을 내는 일이 일상이라고 했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송 변호사와 아델 활동가는 차별금지법을 ‘청소년 성소수자를 살게 하는 법’이라고 정의내렸다. 전환 치료를 당하지 않는 안전한 가정, 혐오 발언이 없는 학교, 트랜스젠더로서 여대에 다니며 군인이 되는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회. 차별금지법이 이 모든 것을 이뤄가는 시작점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조용한 학살’을 멈추기 위해

최근 20대 여성의 자살률이 유례 없이 증가한 현상을 ‘조용한 학살’이라고 부른다. 비정규직으로 저임금에 시달리는 등 노동시장에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코로나19라는 악재까지 만나 죽음을 선택하는 현실을 말해 주는 표현이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아무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이렇게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학살되고 있는데, 어떤 대책이나 정책도 나오지 않는 현실이 조용한 학살”이라고 말했다.
2021년 12월 27일,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중간)가 농성장 방문 일지를 작성하고 있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주된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 성차별로 인해 발생한 결과다. 한국은 1996년부터 줄곧 OECD 회원국 중 성별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였다. 취업 과정은 물론 직장 안에서도 차별은 계속되고 있다. 남성 중심의 직종에 들어가려고 하면 면접 자리에서 “남자보다 힘도 약하지 않냐. 언제 결혼하고 출산할 거냐”는 질문이 날아온다. 배 대표는 “지속할 수 있어야 하고 존중받아야 하며 그 안에서 보람과 희망을 찾아야 하는 노동은 90년대생 여성 노동자들의 것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금전적 빈곤과 정신적 모멸감으로 좌절한 이들의 절반 이상이 10년 뒤 반려 동물과 단둘이 살아가는 미래를 그리고 있다. 배우자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은 꿈꾸기 어려운 현실임을 보여주는 통계다.
배진경 대표는 “차별금지법이 다른 어떤 사회적 소수자보다 여성 노동자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법”이라고 강조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여성 노동자가 면접 때 들을 수 있는 성차별적 발언들, 직장에서 겪은 성희롱 등에 대해 지금보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고 또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 현재 국회에 발의돼 있는 각종 이름의 ‘차별금지법’에는 ‘고용영역에서 어떤 게 차별에 해당하는지’, ‘차별을 당했을 때 어떻게 구제받을 수 있는지’가 자세히 규정돼 있다. 한국여성노동자회가 12월 27일밤 국회 앞에서 밤새 농성을 이어가기로 한 이유였다.

이재명 “사회적 합의 필요” 윤석열 “평등만 강제돼선 안 돼”

이렇게 많은 이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외치며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사이, 또 다시 대통령 선거가 찾아왔다.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된 2007년 이후 네 번째 맞는 대선이다. 하지만 유력 대선 후보들은 차별금지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한국교회총연합회를 방문한 뒤 “차별금지법의 일방통행식 처리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신중론으로 돌아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출처 : 팩트TV)
“반드시 필요한,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 긴급한 사안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우리 사회의 앞으로 가야 될 방향을 정하는 지침 같은 것이어서 이런 문제를 놓고 일방적으로, 일방통행식의 처분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별금지법은) 충분한 논의와 토론을 통해서 얼마든지 사회적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2021.11.8. 한국교회총연합회)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했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보수 기독교계 인사들과 만난 뒤 “일방통행식 처리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신중론으로 돌아섰다. 차별금지법 반대 입장도 들어보자며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에 참여하는 김회재, 박완주 의원을 중심으로 차별금지법 찬반 토론회를 지난 11월에만 두 차례 열었다. 심지어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측 패널로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동성애 문제를 성 도착증으로 판정했다”는 혐오 발언으로 비판받았던 이요나 탈동성애인권센터 홀리라이프 대표를 부르기도 했다. 12월 16일에는 이재명 후보가 “성소수자 차별을 제외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까지 나왔다. 이 후보 선대위 측은 사실 무근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관훈토론회에서 “평등만이 강제돼선 안 된다”며 포괄적 차별금지 법안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밝혔다. (출처 : SBS)
선진국조차 어떤 포괄적이고 일관된 기준으로 해서 차별 금지라고 하는 것을 사회 전체적으로 강제하지는 않고요. 구체적 사안마다 어떤 법원의 판결과 법 조항을 통해서 이것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헌법에서 자유와 평등을 어떻게 조화할 것이냐에 대한 것이지 평등만이 그냥 강제돼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2021.12.14. 관훈토론회)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해외 법 사례를 들어 차별금지법 제정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관훈토론회 8일 후인 지난 12월 22일 전북대에선 “헌법과 합치가 안 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고도 발언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혜인 변호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는 윤 후보의 주장에 대해 “굉장히 잘못된 이야기이고 예전 이야기”라고 말했다. “해외에서도 한국의 남녀고용평등법, 장애인차별금지법처럼 각각의 차별금지 사유에 맞는 개별 법들을 먼저 제정한 건 사실이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차별들을 효과적으로 규제하려면 성적 지향이든 장애든 가족 형태든 여러 가지 사유를 한꺼번에 다루는 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 조 변호사의 말처럼 현재 영국과 독일, 미국 등 대다수 선진국은 ‘포괄적 차원의 차별금지법’을 두고 있다.
얼마 전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도 “포괄적인 평등법안의 채택이 시급하며, 이미 그 기한을 넘겼다”며 우리 국회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한 바 있다. 30개 국제인권단체도 같은 내용의 공동 서한을 발표했었다. 유엔인권조약기구는 2007년 이후 이 같은 권고를 이미 10번이나 한국 정부에 보냈다.

임시국회 2022년 1월 10일까지…“이미 14년을 놓쳤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주장해 온 사람들에게 21대 국회, 특히 2021년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였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을 비롯한 4명의 국회의원이 차별금지법을 잇따라 대표발의했고, 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민청원에 1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동참했을 정도로 분위기가 달아 올랐다.
하지만 정치권은 보수 기독교계 등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세력의 눈치만 살폈다. 차별금지법 제정 청원에 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심사는 2024년 5월 29일까지로 미뤄졌다. 박광온 국회 법사위원장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심도 있게 심사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내놨다.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에는 아예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계 인사인 이정화 선린교회 목사가 ‘기독인지원본부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참여하고 있다. 차별금지법 찬성 여론이 과반을 넘겼다는 다수의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보수 기독교계가 과잉 대표되고 있다. 이들에게 정치인들이 휘둘리고 있다”는 비판도 쏟아지고 있지만 분위기는 여전하다. 대선 후보들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은 점점 깊어간다.
2021년 12월 21일 저녁, 농성장 앞에서 진행된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 세상을 바라는 개신교 기도회’에서 설교하고 있는 김희헌 향린교회 목사.  
조혜인 변호사는 차별금지법의 핵심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차별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 기준을 정해놓는 것. 둘째, 차별이 일어났을 때 구제받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 셋째, 정부와 지자체 등이 일상의 차별들을 시정하고 예방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적시하는 것이다. 조 변호사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2007년도에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한국 사회에서 모든 차별과 불평등이 다 없어지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차별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이 배우고 그걸 없애 나가기 위해서 각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부는 무엇을 해야 되고 기업은 무엇을 해야 되고 교육 기관들은 무엇을 해야 되는지에 대한 사회적인 진도가 굉장히 많이 나갔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14년이나 이미 놓친 거예요.

조혜인 변호사(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
12월 임시국회는 2022년 1월 10일 끝난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임시국회 내에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킬 것을 촉구하고 있다. 천막 농성도 1월 10일 즈음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대선까지 72일이 남은 2021년의 마지막 날, 무지개빛 농성장의 불은 여전히 밝게 켜져 있다.
제작진
취재박상희
영상 취재김기철 이상찬
편집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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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