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회] 투표권을 잃은 사람들

2012년 12월 15일 06시 51분

지난 12일 새벽 5시 40분. 덤프트럭을 운영하는 한 중소건설회사 사무실에 불이 켜집니다.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직원들이 출근합니다. 세종특별자치시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건설 노동자들입니다. 대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대선후보들의 소식이 주요 화제입니다. 투표에 대한 관심도 뜨겁습니다.

[유선걸 덤프트럭 운전사] (이번 대선 때 꼭 뽑고 싶은 후보가 있으세요?) “없어도 해야 되겠죠. 우리나라를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 만든다는데 어떻게 해요. (투표) 해 줘야죠. 그래도 일을 많이 만들어 주는 대통령이 최고가 아닌가..”

하지만 건설 노동자들이 투표에 참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투표시작 시간인 오전 6시 이전에 출근해 투표가 끝나는 오후 6시 무렵 일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OOO 작업에서 나온 토사를 운반하는 김양진 씨도 다르지 않습니다.

[김양진 덤프트럭 운전사] “실제적으로 업무를 하는 것은 10시간 정도 지금 하고 있고요 집에서부터 퇴근까지, 출근해서 서부터 퇴근까지는 12시간 정도가 거의 소모돼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투표를 하기 위해 생업을 포기해야 합니다.

[김양진 덤프트럭 운전사] “오늘 일 하다가도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요. 건설사들 측에서 하고자 하는 부분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저희가 계획성 있게 일을 하지 못합니다.

유통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도 투표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백화점과 대형마트들이 투표일에도 정상영업을 하기 때문입니다.

[대형 유통업체 비정규직 직원] “직원분들 중에서는 (집에서) 두 시간 이상 걸려서 오시는 분들 같은 경우에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셔서 오시는 분들도 있잖아요. 그런 분들 같은 경우에는 6시부터 투표가 시작익니 해도 이렇게 일반적으로 다니는 그런 출근 시간에 맞춰서 오기에도 버거운 시간이 있긴 한데 투표까지 하고 오면 시간적인 여유가 조금 어렵지 않을까...”

근무 시간 동안 잠시 짬을 내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투표 하겠다고 자리를 비웠다간 어떤 불이익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위기의식 때문입니다.

[대형 유통업체 비정규직 직원] “아무래도 자리를 오래 비우게 되면 그런 부분에서 압박감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심리적인 압박감이 들고 그런 게 있어요.”

학계와 노동계에서는 비정규직 양산이 투표율 하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2003년 460만 명이던 비정규직 노동자는 2007년 570만명으로 늘어나면서 대선 투표율은 6% 넘게 하락했다는 겁니다.

중앙선거 관리 위원회가 지난해 6월 한국정치학회를 통해 조사한 연구 보고서에서는 70~80% 이상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참정권을 근본적으로, 또 구조적으로 제약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김준석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난 10월 인터뷰)] “비정규직 참여 실태를 봤을 경우에 정규직과 비교했을 때 투표 참여율이 훨씬 낮습니다.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데 법에서 이 분들의 투표권을 보장해 주고 있고 이를 사용자에게 요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장할 수 있는 보완적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돼 있지 않다는 점이 아무래도 비정규직 노동자분들의 투표권을 침해하는 원인 중에 하나겠죠.”

민주노동 서비스연맹 조합원들은 지난 11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지하 출입구에서 투표권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했습니다.

[강규혁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위원장] “백화점 같은 데서 대책을 내놓는 게 본인들 직영 직원에 한해서는 2교대라든가 아니면 자율 근무라든가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런데 본인들 직원들은 5% 밖에 안 된다는 말이죠. 95%에 있는 우리 협력업체 노동자들은 투표 권한이 아예 봉쇄되고 있습니다.”

영업시간이라도 줄여 직원들의 투표권을 온전히 보장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 “백화점 영업 시간이 10시 반입니다. 오픈 시간이요. 그러면 투표 시간이 10시 반부터는 아니지 않습니까? 출근 전에 투표를 하도록 독려를 하고 있고요 출근 이후에는 반차를 사용하면서 (투표를) 진행할 수 있도록 그렇게 독려하고 있기 때문에 백화점 쪽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이 되고요.”

[강규혁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위원장] “예를 들어서 ‘조금 일찍 투표하고 출근하면 되지’ 이렇게 의사표현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반문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조금 일찍 출근해서 은행도 문 열고 조금 일찍 출근해서 구청이나 시청도 문 열고 조금 일찍 출근해서 대기업도 문 열고 이게 맞는 것이죠. 유독 유통 매장에 있는 노동자들만 선거권이 봉쇄돼 있다, 이건 정말 잘못돼도 대단히 잘못돼 있는 거죠. 예를 들어서 투표 당일 날은 ‘12시에 우리는 문을 열겠습니다.’ 그러면 아침에 따뜻할 때 가서 투표하고 출근할 수 있는 것이죠. 저는 이런 작은 양보도 못하는 대기업들 정말 도저히 저희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정부가 사용자인 이른바 관급공사 현장에서도 투표시장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800여 개 사업장에서 공사가 진행중인 세별특별자치시. 공사를 발주한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노동자들의 투표권 보장을 반대합니다.

[이연호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대변인] “행정기관에서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업무지시나 이런거는 옳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게 공식적인 답변입니다. 그게 공식적인 답변입니다. 제가 선관위에 전화를 해봤어요 해봤는데 그 어떤 기관이나 이런데서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런 업무지시나 이런 건 하면 안 된다 이렇게 전화통화를 했어요. 세종시 선거관리위원회에서도.” (투표율을 높이는 업무도 하지 말라는 뜻인가요?) “죄송한데 우선 카메라좀 꺼주실래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표시간연장요구는 새누리당의 반대로 이번 대선에선 불가능해졌습니다. 게임 중에 룰을 바꿀 수 없다는 게 새누리당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논리로도 취약계층의 투표기회를 박탈하고 헌법에서 보장한 참정권을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김양진 덤프트럭 운전사] (지금까지 투표를 몇 번 정도 못하셨나요?) “글쎄요 세어보진 않았지만 대부분 못하는 경우가 많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해야 될 의무와 또는 (투표에) 참가해서 저의 의견이나 소견을 한 표로 이렇게 이어주고 싶은데 본의 아니게 되지를 않아가지고 좀 서운한 마음이 있죠.”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