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들] 리영희 연작 다큐멘터리 3부 〈진실〉

2020년 12월 11일 17시 35분

12월 5일은 우상과 권력에 맞서 진실을 추구한 언론인이자 지식인이었던 리영희 선생의 10주기입니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는 리영희의 삶과 그의 글쓰기를 다시 비춰보는 연작 다큐멘터리를 방송합니다. 이성의 힘으로 평생 진실을 좇았던 그의 삶이 가짜 뉴스가 난무하는 '탈진실'의 언론 생태계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세 번째,  기자로서 삶을 다룬 <진실>편입니다.

1. 14년의 기자, 2번의 강제해직과 1번의 구속기소 

1957년 리영희는 합동통신사 기자로 언론의 첫 길을 걷습니다. 1964년 조선일보로 직장을 옮겼고 1971년 군부독재, 학원탄압 반대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강제 해직됩니다. 처음부터 기자를 지망했다기 보다는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리영희의 기자 생활은 그의 비판 정신과 올곧은 품성을 실천하는 ‘운명’이기도 했습니다. 진실 보도를 좇았기에 '고난'이었습니다. 약 14년 동안 기자로 있으면서 2번의 강제해직과 1번의 구속기소를 겪었습니다. 

2. 검소 

리영희는 가난했습니다. 젊은 기자 시절,  서울에서 가장 집값이 싼 변두리 제기동의 미나리밭 주변에 두 칸 전셋집을 겨우 얻었습니다. 1995년 한양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직한 후에야 온수가 금방 나오는 주택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리영희는 기자가 가져야 할 덕목으로 ‘검소함’을 꼽습니다. 기자가 꼭 부유하거나 가난할 필요는 없지만, 권력에 이용당하지 않고 돈에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선 '검소하고 청빈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꼭 가난한 게 좋다는 뜻은 아니지. 검소하지 않으면 돈의 유혹이 들어온 단 말이야, 권력의. 언제나 그렇지만. 그 권력은 기자를 하수인으로 쓰고자 하는 많은 세력들에 이용 당하기 마련이거든. 그런데 검소하게, 가난하게. 가난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청빈한 자세를 가지면 그런 것이 두렵지 않단 말이야. 거부할 수 있는 저력이, 생활 기초 철학이 있으니까.

리영희 , 한겨레창간 20돌 특집대담 (2008.5.15)

2. 오프 더 레코드 OFF THE RECORD

1963년 가을, 리영희는 주한 미 대사관의 그레고리 핸더슨 참사관을 만납니다. 그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습니다. “박정희가 케네디와 약속한 민정 이양을 지키지 않고 있어, 미국 정부가 2천만 달러 규모의 식량 원조를 보류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태풍 사라호가 덮치면서 식량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리영희는 지체없이 이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물론 케네디 정부도 큰 충격을 받습니다.   
보도가 나가자, 핸더슨은 사적인 대화로 ‘오프 더 레코드’에 해당하고, 국가간 기밀이기에 당장 기사를 삭제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핸더슨과 친분이 있던 리영희는 인간적으로 괴로웠지만 그의 요청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핸더슨은 곧 송환명령을 받고 미국으로 귀국합니다. 그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더니 당신의 펜은 나의 직업적 생애를 망쳤다”는 편지를 남깁니다. 핸더슨은 얼마 뒤 면직됩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리영희는 핸더슨의 사망 소식을 듣고 1989년 1월 1일, 한겨레신문에 <25년전 마음의 부채 갚고 싶었소>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 리영희 칼럼 <25년전 마음의 부채 갚고 싶었소> (한겨레신문, 1989.1.1)
오프 더 레코드로 얘기한다고 그랬는데, 이게 오프 더 레코드 거리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오프 더 레코드는 두 가지가 있어요. 예컨대 취재원이 자기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얘기를 하면서 '이거는 개인적인 건데 사실 이래.’ 이런 건 쓰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야, 이거 오프 더 레코드야. 그런데 미국 정부가 너네 죽일 거야.’ 이런 것들을 안 쓰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최영묵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3. 공부

 리영희는 철저하게 공부를 하는 기자였습니다. 기자는 사실을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전후관계와 맥락을 파악해 진실을 포착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리영희의 기사 쓰기에는 자료 조사와 연구가 밑바탕을 이뤘습니다. 
미국의 외교문서를 입수해 읽어가며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파악했기에 미국 중심이 아닌, 편견없이 베트남 민족의 입장에서 부도덕한 전쟁을 보도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에 가서 우호적인 기사를 써달라며 거액의 취재비를 제시했지만 거절합니다. 
한일 양국이 수교회담을 하기 전, 리영희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경험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어떻게 일본과 수교협상을 진행했는지 사례를 분석 연구합니다. 그 결과 일본은 개별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하는 게 아니라 그 나라 정부에 현물 보상이라는 방식으로 뭉뚱그려 제공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리영희는 외무부 공무원을 만나 한국도 동남아 국가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수교협상이 이뤄지고 있다는 답변을 받아내 기사를 씁니다. 철저한 사전 분석이 있었기에 가능한 보도입니다. 탐사보도의 전형입니다. 리영희는 기자로서 공부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공부를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러지 않으면 그냥 모르고 아무것도, 내용도 본질도 물론 모른 채 덤벙덤벙 지나가버려. 취재를 한다고 하지마는. 그냥 그날 아침 출근해서 국장실, 장관실 문 열고 들어가서 ‘오늘 뭐가 있습니까?’ 이러고 나오는 기자는 관리들이, 담당 공무원들이 말하자면 속으로는 멸시를 해.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들이 그냥 모르면서 그런다고.

리영희 , 한겨레창간 20돌 특집대담 (2008.5.15)
▲ 리영희 (1929 - 2010)

4. '언론생태계 팬데믹' 

세계는 지금, 우리는 지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몸의 아픔을 넘어 정신과 공동체의 아픔이 소용돌이치는 그 흙탕물 속에서 저희는 또 다른 결의 팬데믹을 뒤늦게나마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거짓과 혐오와 패거리 놀음으로 짓밟혀가는 이른바 ‘언론생태계의 팬데믹’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편견에 호소해 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합리적 이성으로 한 사람을 설득하기보다 훨씬 쉽다”고까지 말합니다.  

김중배 뉴스타파함께재단 이사장 (2020.9.10)
배타적, 독점적 출입처에 의지한 ‘떼거리 저널리즘’, 검증없는 미확인 정보의 확산, 주르륵 ‘컨트롤 C, 컨트롤 V’를 반복하며 보도자료를 받아 베껴쓰는 언론 적폐는 여전합니다. 오히려 '클릭수 장사'의 부추김에 더 극성을 부립니다. 공적 가치로서 저널리즘은 설 자리를 잃어갑니다. 55년 전, 리영희의 기자정신을 돌아보게 하는 이유입니다.
제작진
취재작가이경은
글 구성정재홍
촬영 이광석
연출김성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