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선전영상인 '빅 픽처(Big Picture)' 시리즈 중 '한국에서의 심리전'편 진행자는 심리전의 목표는 적의 '정신'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미군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매체와 상황을 동원해 심리전을 전개했다.
▲ 심리전(Psy-War) 관련 영상 촬영이라고 적힌 미군 슬레이트
최악의 전쟁범죄, 민간인 학살도 심리전 소재로 활용
뉴스타파필름이 제작한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2화 심리전'은 민간인 학살 현장에서 출발해 한국전쟁 당시의 심리전 양상을 추적한다.
지난 1999년, 오랜 세월 감춰졌던 18장의 사진이 세상에 공개된다. 1950년 미 군사고문단 애보트 소령이 촬영한 이후 반세기 가량 기밀로 묶여 세상에 나오지 못했던 이 사진들은 대전 골령골에서 대한민국 군경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현장을 담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 정부가 보도연맹원 등 '적으로 의심되는 자' 수천 명을 법적 절차 없이 학살한 사건을 현장에 있던 미군 장교가 촬영한 것이다.
당시 북한 측은 대한민국 군경의 골령골 민간인 학살 등을 비판하는 삐라를 제작해 퍼뜨렸다. 하지만 그들 역시 대전을 점령한 뒤 우익인사 등을 보복학살했다. 잘 알려진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이다. 이 현장도 대전을 수복한 미군이 촬영한다. 미군 통신부대는 긴 분량의 영상도 찍었다.
두 학살 사건을 모두 촬영한 미군, 하지만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골령골 민간인 학살의 증거는 반세기 이상 기밀로 봉인한 반면 북측의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영상은 바로 선전영화 제작에 활용했다. 바로 '한국에서의 범죄(Crime of Korea)'라는 제목의 선전영화다.
미국 재무부는 미군이 만든 '한국에서의 범죄' 영화를 적극 활용해 자국민에게 재무부가 발행한 국방 채권을 사서 애국 행렬에 동참하라고 선전한다. 마침 '한국에서의 범죄'가 나온 1950년 12월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한국전쟁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든 시기였다.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비인간화의 효과
▲ 적을 뱀으로 표현하며 비인간화한 미군 삐라들
'한국에서의 범죄'가 좌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만 부각하고,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 사실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듯 미군이 뿌린 삐라도 반쪽의 사실, 왜곡된 이미지를 담아 한반도를 뒤덮었다.
뉴스타파 제작진은 한국전쟁 당시 남과 북, 양측이 뿌린 삐라를 수천 종을 입수해 분석했다. 상대방을 묘사한 삐라 중에는 적을 비인간화하고 뱀이나 늑대, 문어 등 짐승이나 사악한 괴물로 표현한 삐라도 상당수 있었다. 이런 이미지는 어떤 효과를 낳았을까.
성공회대 이임하 교수는 "아주 사악한 동물을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적을 어떤 방식으로 죽여도 가책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삐라를 통한 비인간화의 효과라고 설명한다.
지게와 마차 vs. B29와 제트기
▲ "지게나 마차로 삐29와 제트기에 대항이 되겠는가"라는 문구가 적힌 미군 삐라
위 삐라는 북한인민군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해 지게와 B-29 중폭격기를 비교했다. 양측의 전력 차이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군의 선전전은 여기에 머문다. 미군이 제작한 삐라와 각종 선전물에서 전쟁의 또 다른 양상, 즉 B-29기와 각종 전폭기의 융단폭격과 네이팜탄 폭격으로 무수한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런 선전물이 주입한 관점은 전쟁 이후에도 계속 됐다. 심리전을 통한 선전선동의 일방성은 규모는 미미하지만 북측도 마찬가지였다.(1화 초토화폭격 참고)
미국이 전파한 심리전 메시지는 전쟁 시기 대한민국 교과서에도 이식된다. 초등학생 1학년을 대상으로 한 읽기 교재 ‘비행기'에서 전폭기는 엄마와 아들의 대화 속에 무해한 존재로 재탄생했다. 엄마는 아들에게 네이팜탄이 주변을 "불바다"로 만든다"는 살벌한 내용을 설명하지만 이들의 대화에서 폭격기에 대한 공포심은 느껴지지 않은 채 미군 항공기를 무조건 우호적인 존재로 부각시킨다.
전쟁이 멈춘 뒤에도 심리전은 계속됐다. 미군이 제작한 '빅 픽처(Big Picture)'나 주한미공보원(USIS)의 '리버티 뉴스' 등은 전후 한국사회에 친미·반공 이념을 확대재생산했다. '빅 픽처' 시리즈 '한국과 당신' 편은 특히 흥미롭다. 이 영상은 한미 친선을 주제로 해 한국을 알아가려는 한 미군의 노력을 그렸다. 하지만 그 구성과 표현 방식은 미국이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빅 픽처'는 미 육군이 제작해 미국 내 수백 군데 방송국에서 방영됐는데, 매 회차 끝부분에 미군 모병 광고 메시지를 넣은 선전영상이다.
심리전의 후예 또는 노예
한국전쟁 때 미군이 전개한 심리전 방식은 최근까지도 한반도에서 끊임없이 되새김질되며 남북 관계를 악화시키곤 했다. 탈북단체의 대북 삐라 살포, 군의 대북 확성기 방송 등도 근원을 살펴보면 결국 한국전쟁 때 미군이 실행한 여러 심리전의 변주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최근까지 이어진 대북 삐라 살포, 확성기 방송 등은 한국전쟁 때 심리전의 변주라고 볼 수 있다. 확성기 방송에 여성의 목소리를 활용한다는 점도 마친가지다.
2021년 오늘날까지 냉전의 세계관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한반도의 현실을 보면, 70여년 전 한국전쟁 당시 상대를 괴물, 꼭두각시 등으로 규정하고 증오와 혐오를 일방적으로 부추긴 그 심리전의 위력이 여전히 우리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2화 심리전'은 한국전쟁 당시 양측의 심리전 양상을 추적해 나가며, 이 심리전이 지난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의 '육체'가 아니라 '정신'에 끼친 끈질긴 영향을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