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법 그 후④ 노후 산단의 '말할 수 없는 비밀'

2022년 06월 09일 20시 00분

산업단지가 위험하다. 예기치 않은 폭발과 화재 사건으로 노동자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석유화학 단지의 경우, 자칫 지역사회 전체를 재난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현장 노동자들과 산업안전 전문가들은 산단 시설의 노후화를 주요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미 한계에 이른 시설, 부품으로 인해 언제 어디서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는 '화약고'가 되어가는 실정이라는 것. 체계적인 관리와 안전 예산 투입이 절실하지만, 일부 기업은 사건 은폐와 땜질식 처방으로 오히려 위험을 키우고 있다. 노후 산단의 시설 관리를 기업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지자체, 시민이 참여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톤 철제 덮개가 사람을 덮쳤다

경기도 광주와 전남 여수를 잇는 17번 국도. 도로의 남쪽 끝인 여수 시내를 앞두고 멀리 하얀 연기가 오른다. 산허리를 돌면 연기에 싸인 회색 공장 지대의 모습이 드러난다. 분양 면적이 2,400만㎡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종합석유화학공업기지, 여수국가산업단지다. 2만 4천 명 노동자가 연간 60~80조 원 규모의 석유화학제품을 생산한다.
△ 여수국가산업단지 전경. 1974년 산업단지 지정 이래 40년 넘게 운영되고 있다.
1974년 산업단지 지정 이래 40년 넘게 운영되고 있다. 산단 안으로 들어서면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세월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난다. 붉은 녹이 굴뚝과 탱크 곳곳에 피어오르고, 공장을 두른 배관에 거뭇한 용접 자국이 가득하다. 사람의 손길이 오래 닿지 않은 듯, 시설에 키가 큰 들풀이 엉킨 곳도 있다. 어디서 새어 나오는지 알 수 없는 악취는 산단의 낡은 풍경을 더욱 황량하게 만든다.  
지난 2월 11일, 이곳 여수국가산업단지 한복판에 위치한 여천NCC 3사업장에 폭발 사건이 일어났다. 열교환기 시설 시험 가동 중 원인 미상의 폭발이 일어나 1톤 무게의 덮개가 튕겨 났다. 이 덮개가 인근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을 덮치면서 4명이 사망하고 4명이 다쳤다. 중대재해 처벌법 시행 이후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참사를 부른 현장의 부실이 속속 드러났다. 사건 당시, 현장 노동자들은 열교환기 시설을 청소한 후 내부의 기압을 높여 결합 상태를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안전 수칙대로라면 시험 가동 전에 시설 인근에 최소 인원만 남도록 조치하고, 방호 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안전 수칙을 무시한 채 작업은 계속 진행됐다. 
△ 여천NCC 폭발 사건 현장. 1톤 무게의 덮개가 인근 노동자를 덮치며 8명 사상자가 발생했다. 
위험의 외주화도 문제였다. 사상자 8명 중 7명은 여천NCC 직원이 아닌 하청 노동자다. 가장 낮은 가격을 써낸 하청업체에 일감을 주는 이른바 '최저가 낙찰제'로 인해 노동자의 안전은 뒷전으로 밀렸다. 적은 인력으로 빠른 시간 내에 작업을 마무리해야 했다. 회사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수압테스트 대신, 가동 중단 기간이 짧은 기압 테스트를 택했다. 이윤 때문이었다.  여천NCC는 DL 케미칼과 한화 솔루션의 합작 회사로, 지난해 연 매출이 6.5조 원에 이른다.

페인트 도장 아래의 진실..."노후화된 부품이 깨진다"

가장 큰 문제는 사건 발생한 지 넉 달이 지났지만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칫 연쇄 폭발이나 대형 화재로 이어져 지역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던 아찔한 사건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원인 규명과 대책 마련이 이뤄져야 하지만, 여천NCC 측은 관할 고용노동청과 경찰의 수사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회사는 시설이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압력을 가했을 뿐인데 기술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평소 시설을 직접 만지며 유지, 보수를 해온 현장 플랜트건설 노동자들의 말은 다르다. 산단 기업들이 오랫동안 침묵해온 시설 노후화 문제가 이제야 터져 나왔다는 것이다. 
현장 노동자들이 전하는 여수 산단 노후 시설의 실태는 심각했다. 매년 새로 칠해지는 페인트 도장 덕분에 외관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내부 사정는 딴판이라고 한다. 페인트 도장을 벗겨보면 붉은 녹이 그대로 드러나고, 화학 물질에 오랫동안 노출된 철제 부품은 손만 대도 바스러졌다. 전면 교체가 필요한 노후 시설도 땜질식 조치만 하고 넘어가는 일이 흔했다. 
△ 사건이 발생한 여천NCC 공장에 걸린 추모 리본. 현장 노동자들은 이 사건이 시설 노후화가 부른 예견된 참사라고 말했다.   
폭발 사건이 발생한 여천NCC도 마찬가지였다. 문제의 열교환기 시설은 가동된 지 30년이 넘은 노후 시설이었다. 석유화학공업 시설 자체는 100년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지만, 시설에 따르는 수많은 부속품은 얘기가 달랐다. 회사 측 설명대로 기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면, 노후화에 따른 부실을 먼저 의심해 봐야 한다는 것이 노동자들의 설명이다. 
뉴스타파 취재 결과, 감독당국 역시 시설 노후화를 폭발의 원인으로 잠정 결론 내린 것으로 파악됐다. 이 사건을 조사한 광주지방고용노동청 측은 열교환기의 덮개를 연결하는 부품이 파손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고온 고압에 의해 노후화된 부품을 그대로 방치했다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파손이 일어나 폭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안전 관리 체계 전반의 문제점도 드러났다. 지난 4월 광주지방고용노동청이 여천NCC에 대해 특별 감독을 진행한 결과 무려 1,117건 위반 사항이 무더기 적발됐다. 방폭 성능 유지 미흡 사항도 26건이었다. 광주지방고용노동청 관계자는 "고온 고압으로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공장의 폭발, 화재 사건은 '설비'가 아니라 '부품'의 노후화로 인해 발생한다"라며 "여천NCC의 자체 관리 시스템이 있긴 했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부족했던 것으로 드러나 시정하도록 감독했다"라고 전했다.

"노후 산단 안전 관리, 노동자-시민이 직접 참여해야"

여수 산단의 중대재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여천NCC 폭발 사건 불과 두 달 전에도 인근 이일산업 공장에서 원인 미상의 폭발이 발생해 3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용접 작업 중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됐지만, 명확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지난 5년간 여수 산단에서 발생한 산업재해는 65건, 총 17명이 숨지고 31명이 다쳤다. 산업 안전 전문가들은 노동자, 시민의 알 권리를 외면한 채 시설 노후화와 사고 실태에 대해 침묵하는 일부 기업들의 '깜깜이 행태'로 인해 중대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단 여수 산단만의 문제가 아니다. 더불어민주당 김회재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6년간 전국 64개 산업단지에서 발생하는 중대재해 사건 사상자 98%는 조성된 지 20년 이상 된 노후 산업단지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안전보다 이윤을 우선하는 기업에게 노후 시설의 안전 관리 문제를 전적으로 맡기는 현행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노동자의 죽음을 막기 힘들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산단 노후시설 안전관리특별법 제정 관련 울산 토론회.  
이에 정치권과 노동계,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산단 노후시설 안전관리특별법 제정 추진에 나선 상황이다. 노후 산단의 안전 관리 문제가 노동자와 지역사회 전반에 위험을 야기할 수 있는 만큼 지자체와 시민이 이 문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다.
제작진
촬영신영철, 이상찬
편집정애주
CG정동우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