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공개 30년] 고위공직자 재산을 시민의 눈높이로 끌어낸 7장면

2023년 09월 08일 10시 00분

1993년 9월 7일, 공직자들의 재산 내역이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 관보에 공개됐다. 이후 30년 동안 ‘공직자 재산공개 제도’는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막고, 공직 기강과 윤리를 바로잡는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뉴스타파는 재산 공개 30년을 맞은 올해, <뉴스타파 공직자 재산 정보> 사이트를 대대적으로 정비해 공직자 재산 30년 데이터를 모두 수집해 공개했다. 뉴스타파는 공직자 재산 30년 치 자료를 바탕으로 공직자들의 재산 축적과 형성 과정에서 확인되는 사회·경제적 함의를 추적하는 연속 보도를 시작한다. - 편집자 주
1993년 처음 도입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제도는 주권자인 시민들의 알권리를 보장하고 권력 감시라는 언론의 역활을 수행하는 중요한 제도적 도구로 자리 잡았다. 공직자 재산공개 제도가 시행된 이후, 김덕주 대법원장(1993년), 이헌재 경제부총리(2005년), 진경준 검사장(2016년),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2019년) 등 숱한 고위공직자들이 재산 축적과 형성 과정에서 이런저런 의혹이 드러나 공직에서 물러났다. 공직자 재산공개 제도가 지금과 같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지난 30년 동안 역사적인 7장면을 꼽았다.

장면 1. 전두환 정권의 공직자윤리법 제정

▲ 1980년 10월 11일 '공직자 재산등록제 실시'를 알리는 조선일보 기사. 출처는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정부는 1980년 9월 출범했다. 정권 출범 한 달 뒤인 10월, 전두환은 사정협의회를 열어 ‘공직자 재산등록제’ 실시를 지시했다. 사정협의회는 감사원, 경찰, 검찰 등 주요 사정기관의 대표와 사정 관계부처의 차관급 인사가 모여 사정 업무의 추진 방안을 논의하는 회의체였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은 “과거 18년간 장기집권 중 각계 지도층의 국가이념 구현을 위한 사명감 결여가 부정부패의 근본 원인이었다”라고 지적하며, ‘사정 업무’의 기본 방향을 ‘체계적인 사전 예방 활동’에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산등록제는 이러한 사정 활동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이듬해인 1981년 12월, 공직자윤리법이 제정됐다. 이후 재산 등록 의무자, 재산의 종류, 신고 방법 등 세부적인 기준을 담은 시행령을 마련하는 데 1년이 걸렸고, 1983년 첫 공직자 재산 등록이 이뤄졌다. 그러나 공직사회는 재산등록제도 시행에 반감과 거부감을 보였다. 
1988년에는 재산등록 마감일까지 자신의 재산을 등록하지 않은 국회의원이 전체 299명 중 121명(40%)일 정도로 공직자들은 저항했다. 여기에 재산을 성실하게 등록하지 않는 공직자도 많아, 전두환 정부의 공직자윤리법은 유명무실해졌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게다가 공직자의 재산은 등록하되, 공개는 하지 않는 ‘반쪽짜리’ 법률에 불과했다. 
전두환의 뒤를 이어 집권한 노태우 대통령은 재산 내역을 공개한 최초의 고위공직자로 기록된다. 노 대통령은 집권 1년 차인 1988년 자신의 재산을 공개했다. 노태우 정부는 차관보급 이상 고위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하겠다고 천명했지만, 임기 중 실현되지 못했다.

장면 2. ‘공직자 재산 공개’ 공론화한 1992년 대통령 선거

▲ 1993년 2월 27일 김영삼 대통령, 본인 재산공개 발표. 출처: KBS 뉴스9
공직자 재산등록제가 실효성 없는 제도라는 비판이 이어지는 가운데,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가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쟁점이 됐다. 당시 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먼저 공직자 재산 공개를 약속했다. 김대중 후보는 1992년 5월 26일 민주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대통령이 되면, 나의 재산부터 공개, 전 공무원에게 나의 모범을 따르게 하는 등 공직자 부패 추방에 앞장서겠다”라며 의지를 밝혔다.
이어 김영삼 민자당 대선 후보도 그해 10월 13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 소정의 절차를 거쳐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국민 앞에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 후보는 각각 1992년 11월 19일(김대중)20일(김영삼)에 직계자손의 재산을 포함한 재산 내역을 공개했다. 김대중 후보가 43억 1,800만 원, 김영삼 후보는 17억 7,000여만 원이었다. 
두 대선 후보가 스스로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깨끗한 정치 풍토 조성을 위한 좋은 선례”(한겨레신문)와 함께 “그들의 생애를 통한 청렴성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될 것”(동아일보)이라고 평가했다. 
▲ 1993년 2월 27일 김영삼 대통령 재산공개 발표 보도자료 중 재산평가조서(총괄)
이후 대선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이틀 만인 1993년 2월 27일, 첫 국무회의에서 대통령 신분으로서 본인의 재산내역을 한 번 더 공개 발표했다. 당시 그의 재산은 대선후보 시절 밝힌 액수와 같은 17억여 원이었다.

장면 3. 1993년 9월 7일, 공직자 재산 내역 관보에 게재

▲1993년 공직자 재산 공개 장면. 주무부처 관계자들이 관보에 실린 재산 정보를 살펴보는 전통은 2023년에도 유지되고 있다. 출처: MBC뉴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공직자 재산공개를 강하게 추진했다. 집권여당인 민자당은 1993년 4월 말, 임시국회에서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겠는 의지를 보였고, 야당인 민주당도 공직자윤리법 개정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여야는 사법부, 군, 지방의원 등을 재산 공개 대상에 포함할지, 법 위반시 처벌 수위 등을 두고 이견을 보이며 법개정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1개월 동안 치열한 협의 끝에 1993년 5월 20일,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에 따라 8월 12일, 김영삼 대통령의 재산이 먼저 공개됐고, 9월 7일에는 정부, 국회, 대법원, 헌법재판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소속 고위공직자 1,167명의 재산이 일제히 관보에 공개됐다. 사회 각계에서는 고위공직자 재산공개를 환영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직업윤리와 투명성을 중요시하는 기대감이 커졌고, 1994년 5월에는 언론사인 CBS가 편집국장 등 간부급 직원들의 재산을 공개하기도 했다.
▲ 1995년 5월 17일 ‘CBS 언론사 첫 재산공개’ 한겨레신문 기사.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장면 4. 2001년 전자관보 도입 - PDF로 공개된 공직자 재산 정보

▲ 2001년 1월 8일 대한민국정부 관보 제14698호. 안내문 ‘2000년 10월 1일부터 관보전문을 열린정부 홈페이지로 5대양6대주에 24시간 공개하고 있으니 많은 이용 바랍니다.’
2001년 김대중 정부는 ‘전자정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전자관보’를 도입했다. 2000년까지 관보는 종이 책자로만 발행됐다. 1999년 기준, 관보는 매일 2만 5천 부 발행돼 각 부처와 공공기관 등에 비치됐고, 일부는 유료로 판매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 국민이 보기에는 발행 부수가 적었고, 접근성도 떨어졌다. 관보에 공직자들의 재산 내역이 기재돼 있더라도 시민들이 직접 찾아 살펴보고, 감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전자관보가 도입되자, 시민들은 어디서나 인터넷으로 전자관보 사이트에 접속해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을 직접 찾아볼 수 있게 됐다. 언론사들도 관보 PDF 파일을 내려받아, 자사 홈페이지에서 열람을 제공하기도 했다. 전자관보의 도입을 계기로 공직자 재산 정보를 비롯한 공공 정보에 대한 시민들의 접근성은 크게 향상됐다.

장면 5. 2006년 재산 자료 ‘재무제표형’ 공개

2002년 대선에서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공직자 재산 형성 과정의 신고·소명 ▲대통령 가족과 4촌 이내 친인척의 재산등록 의무화 등 공직자 재산공개 제도를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공약을 내놨다. 이 같은 개혁안은 시민사회와 언론이 오랫동안 요구한 것이었지만, 끝내 국회 통과라는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는 공직자 재산공개 제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며 현재와 같은 제도적 틀을 만들어 나갔다.
▲  2005년(위)과 2006년(아래) 공개된 노무현 대통령 재산. 2005년에는 재산 증가분(5816만 원)만 공개된 데 반해, 2006년에는 종전가액과 재산 총액이 함께 공개됐다. 출처: 전자관보
노무현 정부 개혁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2006년부터 공직자 재산공개 내용을 ‘재무제표 형식’으로 바꾼 것이다. 그 결과, 그림 아래(2006년 노무현 대통령 재산)와 같이 공직자별로 재산의 과거 평가액과 증감액, 현재 평가액 등이 함께 공개돼 공직자 재산의 증감액과 총액을 쉽게 알 수 있게 됐다.
반면, 2005년까지는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할 때, 처음 한 번만 전체 재산 내역을 공개하고, 그다음부터는 재산 변동 내역만 공개했다. 따라서 그림 위(2005년 노무현 대통령 재산)와 같이 각 재산의 증감액만 표시돼, 전체 재산내역, 현재의 재산총액 등은 알 수 없었다. 2006년 개선된 재무제표 형태의 공직자 재산 표 형식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또한 노무현 정부는 2009년 공직윤리시스템(PETI)을 도입해 재산 등록 및 심사 과정을 전산화했다. 2008년까지는 재산등록 의무 공직자들이 각자 은행 잔고를 확인해 입력했기 때문에 등록 과정도 번거롭고, 입력 오류도 많았다.
그러나 공직윤리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정부 전산망을 통해 각 공직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과 예금 잔액을 자동으로 입력할 수 있게 됐다. 재산등록 대상 공직자의 신고 과정은 더 쉬워지고, 데이터도 정확해졌다. 이전까지는 번거롭다는 이유로 재산 변동을 제대로 등록하지 않고, 변동이 없었다고 거짓 신고하는 공직자들이 적지 않았으나, PETI 도입 이후로는 이렇게 불성실하게 신고하는 경우는 대부분 사라졌다.
노무현 정부는 지방자치단체 공직자의 재산이 공개되는 창구를 한 등급씩 높여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개선했다. 2007년까지는 광역의원의 재산 정보는 광역 지방자치단체의 공보에, 기초의원의 재산 정보는 기초 지방자치단체 공보에 공개됐다. 17개 시도 광역의원들의 재산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17개 시도 공보를 일일이 찾아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2008년부터는 광역의원들의 재산은 정부 관보에, 기초의원들의 재산은 광역 지자체 공보에 공개돼, 지방의원 재산 정보에 대한 접근성은 크게 나아졌다.

장면 6. 2011년 문자 PDF 공개

2010년까지 관보에서 공직자 정기 재산공개 자료는 스캔 파일로 공개됐다. 한글 등 문자로 된 파일을 종이책으로 인쇄한 다음, 인쇄된 책을 다시 스캔해 만든 PDF 파일이었다. 이렇게 스캔해 만들어진 이미지 PDF 파일에서는 데이터를 추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공직자의 이름과 소속 등 기본 정보를 검색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2011년 정기 공개부터 공직자 재산 내역은 문자 정보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문자 PDF’ 형식으로 관보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재산 공개 파일에서 공직자의 이름을 검색할 수 있게 됐고, PDF 파일에서 데이터를 추출(parsing)해 분석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재산 내역을 데이터로써 본격 활용할 수 있게 됐다. 
▲ 문자 PDF로 공개된 2023년 공직자 재산 공개 파일에서 데이터를 추출한 화면. 
▲ 2023년 리뉴얼된 뉴스타파 재산사이트 첫 화면

장면 7. 2016년 뉴스타파 ‘공직자 재산 정보’ 웹사이트 공개

2016년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는 기관별로 산발적으로 공개되던 공직자 재산 내역을 한데 모아 시민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웹사이트(https://jaesan.newstapa.org)를 제작했다. 이를 계기로 공직자 재산 정보에 대한 시민들의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여러 해에 걸친 공직자 재산의 변화를 검색할 수 있게 만들어 공직자의 재산 형성 과정을 감시하는 것도 수월해졌다.
뉴스타파는 수천 명에 이르는 공직자 재산 데이터로 만들기 위해 동명이인을 일일이 구분하고, 공보에 실린 오타를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이렇게 정제한 재산 데이터를 뉴스타파 웹사이트에 공개했고, 이는 시민단체와 다른 언론의 2차 활용으로 이어지며, 뉴스타파 재산 사이트는 공직 감시의 ‘원천 자료’를 제공하는 공적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현재 뉴스타파 재산 사이트에는 정부, 국회, 대법원, 헌법재판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 중앙행정기관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공보에 수록된 기초의원 재산도 등재돼 있다. 뉴스타파 재산 사이트에 재산 정보가 공개된 공직자는 1993년부터 2023년까지 누적인원 6만 7천여 명에 이른다. 
제작진
데이터 및 취재김강민 변지민
디자인 및 출판이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