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2주기] ① 우리는 아직, 보내지 않았다

2024년 10월 31일 20시 00분

2022년 10월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한 골목에서 시민 158명이 죽었다. 이후 생존자 1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부분 이태원에서 열린 핼러윈 축제를 즐기러 온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이제 누군가는 '다 끝난 것 아니냐'고 말한다. 그러나 아직이다.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 참사의 상흔도 여전하다. 피해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진상규명은 이제 첫발을 뗐다. 그래서 아직이다. 뉴스타파는 이태원 참사 2주기를 맞아 호주인 유가족과 한국인 유가족, 생존자, 목격자, 시민을 만났다. 

1. 아직 모른다 : 이태원 참사 호주인 유가족을 만나다

이태원 참사 호주인 희생자 고 그레이스 라쉐드(Grace Rached) 씨는 1998년 11월 호주 시드니에서 태어나 쭉 살았다. 세 자매 중 맏이였다. 그레이스 씨의 꿈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며 미디어 분야를 전공했고, 이후 'electrimlime'이라는 영화 제작사에서 일했다. 그레이스의 어머니 조안 라쉐드(Joan Rached) 씨는 뉴스타파와 인터뷰에서 "그레이스는 부당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강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었어요. 또한 여성의 권리에 대해 매우 열정적이었죠. 여성들이 더 많은 리더십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미디어 산업에서 일했어요"라고 말했다.
영화업계에서 일하길 약 1년, 2022년 10월 그레이스 씨는 여행을 떠났다. 한국에 정착한 대학 동기 네이슨(Nathan)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한국에 처음 왔던 그레이스 씨는 가족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은 정말 안전한 나라예요."
그레이스가 저에게 '엄마, 여기는 정말 안전해요. 가방을 열어두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아무도 눈독 들이지 않았어요'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여기 있으면 정말 편안하고 사람들도 너무 친절해요'라고 했어요. 그게 한국에 대해 그레이스가 처음 했던 말 중 하나였어요.

조안 라쉐드 /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그레이스 라쉐드 씨의 어머니
'이태원 참사' 호주인 희생자 그레이스 라쉐드(Grace Rached) 씨의 모습. 사진은 참사 직전인 2022년 10월 그레이스 씨가 한국으로 여행을 왔을 때 찍은 것이다. 
10월 29일, 그레이스 씨가 네이슨 등 친구 3명과 함께 핼러윈 축제를 갈 거라고 가족에게 말했다. 조안 씨는 "호주에서는 핼러윈 때 집에서 작은 파티를 열긴 하지만, 큰 행사는 없어요. 그레이스에게도 한국의 핼러윈 파티는 매우 새로운 경험이었을 겁니다. 그레이스가 정말 기대하고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조안 씨가 딸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통화 화면 속 그레이스 씨는 열심히 옷을 입고 있었다. 엄마가 물었다. "뭐로 분장할 거야?" 딸이 장난스럽게 답했다. "엄마, 비밀이에요." 딸은 통화를 종료하고, 곧장 핼러윈 축제로 향했다. 결국 엄마는 시간이 지나서야 딸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날 그레이스 씨는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온 배우 오드리 햅번 같은 모습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핼러윈 축제를 맞아 '이태원 참사' 호주인 희생자 그레이스 라쉐드 씨(오른쪽)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나오는 배우 오드리 햅번(왼쪽)처럼 옷을 입었다. 
10월 30일 새벽, 그레이스 씨의 동생 레베카(Rebecca) 씨가 가족들을 깨웠다. "엄마, 한국에서 뭔가 일어났어요" 가족은 바로 TV를 켰다. 핼러윈 축제가 한창이던 서울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가 났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피해자 수는 점점 늘어났다. 레베카가 말했다. "언니가 저기 있는 것 같아요."
엄마와 동생들은 계속 전화와 문자를 했지만, 그레이스 씨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옆에서 아빠는 "아마 자고 있을 거야. 지난밤 동안 신나게 놀았을 테니 지금쯤 푹 자고 있을 거야"라며 가족을 다독였다.
연락을 시도하길 몇 번, 드디어 통화 연결에 성공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건 그레이스가 아니었다. 한국 경찰관이었다. 가족은 물었다. "그레이스와 함께 있나요?" 경찰관이 답했다. "아니요. 사고가 있었습니다. 저희도 그레이스를 찾고 있습니다." 가족은 "그레이스를 찾으면 꼭 연락을 달라"고 말했다. 그 순간 전화기 너머로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경찰관은 '이제 가봐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연락은 다시 오지 않았다.
가족은 네이슨 씨에게 연락했다. 전화에서 네이슨 씨는 '그레이스가 죽었다'고 말했다. 
네이슨이 '정말 미안해요, 그레이스가 세상을 떠났어요'라고 했어요. 제가 '무슨 뜻이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고 했어요. 그는 무언가에 덮여져 있는 그레이스의 마지막 모습을 봤고, 그게 그레이스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어요. 저희는 영사관에도 이 사실을 알렸죠. 영사관에서도 그레이스의 여권 사진을 확인한 결과, 그레이스가 사망했다고 했어요.

조안 라쉐드  /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그레이스 라쉐드 씨의 어머니

연락 끊은 한국 정부... 유가족협의회 있다는 사실도 안 알렸다

11월 1일, 가족은 그레이스 씨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그레이스 씨는 경기도 일산 동국대학교 병원 영안실에 있었다. 슬퍼하는 것도 잠시, 영안실에 온 경찰관들은 가족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레이스가 왜 한국에 왔고 이태원에 갔는지, 정신 상태가 어땠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레이스 씨가 약물을 복용한 적이 있는지도 물었다고 한다. 어머니 조안 씨는 "질문들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그 일이 발생한 것과 그 질문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어요. 다양한 핑계를 대고 희생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 같았어요. 통역사가 몇 가지 질문에 대해선 경찰관에게 '이들이 이걸 대답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라고 설명했다.
여러 의문이 그레이스 가족을 휘감았다. 안전 조치는 왜 없었던 걸까. 경찰이 아니어도 인파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던 걸까. 왜 아무도 교통 통제를 하지 않은 걸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계속 한국에 있을 수는 없었다. 하루빨리 그레이스 씨를 호주로 데려가야 했다. 가족은 한국에 온 지 사나흘 만에 호주로 돌아갔고, 그레이스 씨를 호주 땅에 묻었다. 이태원 참사 호주인 희생자는 그레이스 씨가 유일했다.
한국 정부는 그레이스 가족이 돌아가자 연락을 끊었다. 외교부나 주호주 한국 대사관 등 어떤 한국 정부기관에서도 그레이스 가족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어머니 조안 씨는 "한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말을 듣지 못했어요. 아무도 우리에게 연락해서 '조사하고 있다'거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의 무시는 2년 동안 계속됐다. 그 사이 한국에서는 국회 국정조사가 있었고, 책임자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진행됐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도 제정됐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그레이스 가족에게 지난 2년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단 한 번도 설명하지 않았다. 호주 언론은 곧 이태원 참사를 잊었고, 그레이스 가족은 한국 언론 보도를 찾아보며, 드문드문 소식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저는 정보를 알아내려고 개인적으로 온라인에서 기사를 읽고 관련된 부모님의 이름을 찾고, 스스로 조금씩 조사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한국 정부에서는 아무도 우리에게 정보를 주지 않고, 업데이트를 주기 위해 연락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마치 이 일이 그냥 잊힌 것 같았어요. 저는 한국 정부가 최소한 연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사건은 한국에서 발생했잖아요. 피해를 당한 이 아이들은 한국 시민들과 외국인이고, 이들이 당신의 도시를 방문했어요. 당신들은 보호 의무가 있어요.

조안 라쉐드 /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그레이스 라쉐드 씨의 어머니
지난 25일 뉴스타파와 인터뷰하고 있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그레이스 라쉐드 씨의 어머니 조안 라쉐드 씨. 
심지어 한국 정부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가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알려주지 않았다. 유가족협의회는 지난 2022년 12월 결성됐다.
조안 씨가 유가족협의회와 접촉한 건 우연이 겹친 결과였다. 올 초 조안 씨는 인터넷에서 이태원 참사를 검색하다가 유가족·생존자들을 인터뷰한 기록집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조안 씨는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냈고, 이후 조안 씨의 연락처는 이태원 참사 작가 기록단을 거쳐 한국인 유가족 강민하 씨(희생자 고 이상은 씨 이모)에게 전달됐다. 그렇게 그레이스 가족은 처음으로 다른 유가족과 연락했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고 1년 8개월이 지날 무렵이었다.
강민하 씨는 "호주 희생자는 그레이스 한 명이잖아요. 너무 외로우셨던 거예요. 그래서 외국인 유가족 중에 연락되는 사람이 없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스티네 로아크밤 씨(노르웨이인 희생자)의 엄마가 있다고 얘기했고, 연결해 드렸죠"라고 말했다. 강민하 씨는 그레이스 가족의 외로움이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강 씨는 "그게 우리 유가족들이 맨 처음에 겪은 상황이거든요. 참사가 발생하고, 다른 유가족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1주, 2주... 그게 1년 8개월이라니. 이해가 가죠, 얼마나 힘들지"라고 했다.

왜 CCTV를 볼 수 없는가?... 호주인 유가족의 질문

그레이스 가족은 지난 24일, 이태원 참사 2주기를 맞아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그레이스와 작별하기 위해서였다. "그레이스의 마지막 순간은 한국에서였으니까요. 그래서 이번엔 동생들도 데려왔어요. 저희는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가 없었거든요"라고 조안 씨가 말했다.
참사가 일어난 이태원 골목도 처음 걸어봤다. 참사 직후에는 모두 폴리스라인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조 씨는 "너무 일상적인 뒷골목 같다. 참사가 일어난 곳 같지 않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말했다. 
지난 25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 그레이스 라쉐드 씨 가족은 처음으로 참사 골목 안으로 들어와 봤다. 
조 씨는 아직 모르는 게 많다. 분명 압사를 경고하는 신고는 이른 저녁부터 있었는데 왜 더 일찍 대응하지 않았는지, 관계기관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특히 참사 당일 골목 일대를 비추던 CCTV는 10대가 넘었다. 그중에는 용산구청에서 운영하던 CCTV도 있었다. 조 씨는 "참사 골목을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CCTV였어요. CCTV 영상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아직 CCTV 영상은 유가족에게도 공개된 적이 없다. 경찰은 참사 직후 상점 십수 곳을 돌아다니며 CCTV 영상을 모두 수거해 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론 등에 CCTV 영상을 주지 말라'고.
경찰의 수사 결과를 넘겨받은 검찰, 법원도 CCTV 영상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정부와 서울시청, 용산구청도 마찬가지다. 현재까지 CCTV 영상은 수면 아래에 있다. 희생자들이 어디서 어떻게 쓰러졌는지, 이후 어떤 조치를 받다가 사망에 이르렀는지 아는 유가족은 거의 없다. 
왜 그걸 볼 수 없나요? 그 정보를 왜 공개하지 않습니까? 왜 안 되죠? CCTV에서 우리가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게 무엇인가요? 그 영상이 그날 밤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마도 저희가 원하는 더 많은 답을 찾아줄 수도 있어요. 저희는 답이 필요해요. 그래서 왜 영상이 공개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조안 라쉐드 /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그레이스 라쉐드 씨의 어머니

뉴스타파, 그레이스의 '마지막 모습' 일부 발견

뉴스타파는 참사 당일 그레이스의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 취재 과정에서 확보한 영상들을 살폈다. 이태원 인근 상점에서 어렵게 입수한 CCTV 영상 1건과 시민들이 SNS에 찍어 올린 참사 당시 영상, 소방 구조대가 촬영한 보디캠 영상 등이었다. 이중, 보디캠 영상에서 사고를 겪은 그레이스의 마지막 모습을 일부나마 발견할 수 있었다. 취재진은 그레이스 가족과 함께 직접 이태원 골목을 찾아 그레이스의 마지막 행적을 설명했다. 앞서 확보한 그레이스의 소방 구급일지도 참고했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이태원 참사' 당일 촬영된 소방 구조대 보디캠 영상에서 희생자 그레이스 라쉐드 씨의 마지막 모습을 찾아냈다. 사진은 취재진이 유가족에게 그레이스 씨의 참사 당일 행적을 설명하는 모습.   
뉴스타파가 파악한 그레이스의 참사 당시 동선은 다음과 같다. 그레이스는 10월 29일 밤 11시 25분경 이태원 골목의 '108 클럽' 앞 인파 더미에서 발견되고, 구조됐다. 취재진은 그레이스가 참사 당일 착용했던 검은 장갑과 목걸이, 드레스 모양으로 그를 특정했다.
이후 그레이스는 골목 뒤편으로 옮겨졌고, 11시 30분경부터 심폐소생술(CPR)을 받았다. CPR은 소방 구조대원이 아니라 일반 시민 2명이 했다. 한 명은 두꺼운 목걸이가 그레이스의 기도를 압박하지 않게 목걸이를 잡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이 가슴을 압박했다. 11시 37분경 근처에 있던 소방 구조대원이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CPR을 그만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레이스 주변에는 다른 희생자 약 10명도 함께 누워 있었다. 구조대원들은 여기저기서 담요를 가져와 그레이스를 포함한 희생자들을 덮어줬다. 
11시 50분경 구조대원들이 참사가 일어난 골목 옆 건물 공실(1층)을 임시 영안소로 쓰기로 결정했다. 30일 새벽 0시 1분경, 그레이스가 들 것에 실려 건물 앞으로 옮겨졌다. 구조대원들은 길가에 눕혀져 있던 희생자들을 순차적으로 건물 안으로 옮겼다. 그레이스는 0시 15분경 옮겨졌다. 
건물 안에서 그레이스는 약 2시간가량 눕혀져 있었다. 소방 구급일지에 따르면, 서울 서초소방서 구급대는 새벽 2시 35분경 그레이스를 태워 또 다른 임시 영안소인 용산구 원효로체육관으로 옮겼다. 또 거기서 약 3시간을 있던 그레이스는 새벽 6시 10분경 일산 동국대 병원 영안실로 이송됐다. 
취재진의 설명을 들은 조안 씨는 "이런 설명을 들어본 건 처음입니다. 당신이 말해주기 전까지 저는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냥 그레이스가 바로 병원 영안실로 간 줄 알았어요"라고 말했다.
뉴스타파 취재진이 확인한 '이태원 참사' 그레이스 라쉐드 씨의 참사 당일 행적. 소방 구조대가 촬영한 보디캠 영상과 소방구급일지를 참고했다. 
지난 25일, 그레이스 가족은 '10.29 이태원 참사 진상조사와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를 방문했다. 그리고 외국인 유가족 중 처음으로 특조위에 조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조 씨는 "그날 그레이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안전 조치가 부재했는지, 그 아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게 맞는지, 또 왜 이런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는지 알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또 조사 신청서에는 "이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한 조사를 원합니다. 책임자들이 반드시 책임을 지기를 바랍니다. 이 도시의 부주의와 계획 부족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우리 딸을 위해 정의를 원합니다. 한국 정부는 그레이스가 이 나라에 들어왔을 때부터 돌봐야 할 의무가 있었고, 당신들은 그 일을 다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적었다.

2. 아직 아프다 :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김초롱 씨는 작가이자 이태원 참사 생존자다. 지난해 1주기를 맞아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라는 책을 썼다. 2022년 10월 29일, 핼러윈 축제에 참여했던 초롱 씨가 직접 본 것과 느낀 것, 그리고 참사 이후 겪은 일들과 생각을 담은 책이다. 초롱 씨는 집필 이유에 대해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고 싶었다'고 했다. 참사의 원인이 '놀러 간' 피해자에게 있다고 탓하고 욕하는 '2차 가해'를 더는 견딜 수 없었다. 특히 2차 가해에 고통스러워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159번째 희생자 이재현 군도 있었다.
놀러 가서 죽었는데 뭐 자랑이라고 떠드냐, 시체 팔이 한다, 뭐 고통 팔이 한다, 일하다가 죽은 사람도 가만히 있는데 또는 나라 지키다가 죽은 것도 아닌데 유난이다. 저는 2차 가해성 댓글이 우리 사회의 편견을 응축해서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성실 근면만이 정답이고 유흥은 너무 나쁜 것이고. 이런 것들이 응축돼 있는, 오래전부터 쌓여 있던 사회적인 편견들이 2차 가해성 발언으로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김초롱 / 작가, 이태원 참사 생존자 
초롱 씨는 책을 낸 이후 자신의 책을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자기 스스로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솔직한 감정, 초롱 씨의 표현으로는 '치부'가 책에 들어있었다. 초롱 씨 책 서두에는 이런 글이 있다. "책을 쓰면서 가장 고민한 건 내가 과연 어디까지 솔직해져야 하는 것인가였다." 
'이태원 참사' 생존자이자 작가인 김초롱 씨가 쓴 책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지난해 참사 1주기를 맞아 출판됐다. 
하지만 초롱 씨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초롱 씨는 "결국 책을 썼던 이유는 아무것도 안 하고 도망치고 싶지 않았고 기록물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마음이었어요. 아는데 어떻게 외면을 해요.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록집이 있지만, 현장에 없던 분이 많잖아요. 저는 현장에 있었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얘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라고 전했다.
참사 당일엔 10만 명이 조금 넘는 인원, 2017년에는 20만 명의 인원... 사람이 산처럼 쌓여 죽어간 2022년과 달리 2017년의 참사와 같은 공간은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정도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이 넓었다. 

참사의 원인은 피해자가 그곳에 갔기 때문이 아니라 정부가 군중 밀집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

어떤 할머니가 ‘놀다가 죽은 걸 뭐 어쩌라는 거냐'라고 말했다. 할머니, 트로트 좋아하세요? 임영웅 같은 사람이요. 임영웅이 무료 트로트 축제를 열었대요. 놀러가고 싶으시죠? 거기 놀러 갔다가 깔려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할머니에게 대놓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생존자가 말했다. '그때 나에게 왜 백화점에 갔냐는 사람은 없었다'고. 

김초롱 씨 책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중 일부 발췌
1주기에 책을 내고, 약 10개월 동안 여러 지역을 돌며 북토크와 강연을 했다. 여러 시민을 만났고, 그중에는 한때 2차 가해자였던 사람도 있었다는 게 초롱 씨 설명이다. 초롱 씨는 "북토크에 딱 갔는데 어떤 중년 여성분이 엄청 울고 계시는 거예요. 질의응답 시간에 말씀을 들어보니까 너무 부끄럽게도 2차 가해성 발언을 내가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책을 읽기 전에는 진짜 몰랐다. 그래서 사과하기 위해 북토크에 찾아왔다라고 하더라"고 덧붙였다. 책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참사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느리지만 결국에는 옳은 방향"이라는 게 초롱 씨 생각이다.

다시 발현된 PTSD... 참사가 바꾼 '나'

2년이 지났으니 상처는 다 사라졌을까. 아니다. 씻긴 줄 알았던 상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다시 똬리를 틀고 일어난다.
다시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생뚱맞게 집에 가는 길을 잃어버린다거나 여기가 어딘지 갑자기 모른다거나 그래서 경찰서에 몇 번 전화도 하고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마치 치매 환자처럼. 그리고 집 도어락 비밀번호가 생각이 안 난다거나. 하루에도 몇 번씩 지갑, 핸드폰, 노트북을 잃어버렸는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내가 잃어버렸는지도 전혀 기억이 안 나고... 선생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전쟁을 겪은 병사들이 흔히 겪는 PTSD가 갑자기 길 한복판에서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하는. 그래서 다시 PTSD가 발현이 됐구나.

김초롱 / 작가, 이태원 참사 생존자
참사는 초롱 씨의 자아와 성격을 바꿔놨다. 모르는 사람과도 대화를 즐기던 초롱 씨는 이제 사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다고 한다. 초롱 씨는 "북토크가 불특정 다수의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 거다 보니까. 어떤 사람들이 찾아올지 일단 모른다는 불안감이 너무 몇 개월간 수없이 쌓였어요. 특히 질의응답 시간을 꼭 갖잖아요. 그러면 어떤 분이 질문을 하겠다고 딱 손을 들면 그게 그렇게 무서웠어요. 무슨 질문이 저 사람의 입에서 나올지 모르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모르는 사람 만나면 재밌고, 호기심도 있었고 그랬는데 지금은 전혀 관심도 없어요"라고 덧붙였다.
또 초롱 씨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협소한 인간관계를 추구하기도 했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에게서조차 2차 가해를 입은 뒤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지난해 참사 1주기 때 책을 낸 초롱 씨에게 한 가족이 연락했다. 초롱 씨 설명에 따르면, 이 가족은 "네 메시지에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뭘 잘했다고 대통령 나오라 그러고 일하다가 죽은 애들도 가만히 있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온라인상에서 숱하게 이어지던 2차 가해에 무뎌질 때쯤, 가족의 직접적인 2차 가해는 또 다른 상처를 남겼다. 
이런 말을 실제로 진짜로 입에 닿는 사람이 실제 하는구나. 그것도 내 가족이 그러는구나. 지난 1, 2년 동안 사람을 안 만나게 되는 이유도 그런 것 같아요. 괜히 상처받을까 봐. 그래서 나의 입장과 같거나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만 만나게 되는 그런 경향성이 짙어졌죠. 스스로 그냥 고립시키는 거죠. 굳이 상처를 받을 일을 안 만드는 건 사람을 안 만나는 거더라고요. 

김초롱 / 작가, 이태원 참사 생존자
지난 22일, '이태원 참사' 생존자 김초롱 씨가 뉴스타파 취재진과 인터뷰하는 모습.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이태원 참사의 생존자는 334명이다. 하지만 이중 자신이 생존자라는 사실을 밝힌 사람은 거의 없다. 언론에 나온 것도 초롱 씨를 포함해 서너 명에 불과하다. 초롱 씨는 "제가 인터뷰 거절하면서 제일 많이 했던 말이 '혹시 저 말고 다른 생존자분들 섭외가 됐을까요'였어요. 다른 사람이 인터뷰를 해줬으면 좋겠는 거예요, 저도 너무 힘드니까.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도 있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해도 돼요. 나서는 것 자체가 본인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죠. 그때 참사 때에 이태원을 방문한 사람이 10만 명이 넘잖아요. 가끔 이런 생각도 해요. 그 10만 명 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고 덧붙였다.

책임자는 풀려나고 죄책감은 피해자를 향했다

지난 10월 17일,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이 1심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김 전 청장은 핼러윈 축제 당시 이태원에 인파가 밀집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않은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다.
초롱 씨는 김 전 청장에 대한 첫 공판기일(4월 22일)을 앞두고, 재판 출석 요청을 받았다. 재판부가 생존자 진술을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유가족과 변호사들도 출석을 부탁했지만, 초롱 씨는 가지 못했다. 차마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초롱 씨는 발언문을 서면으로 재판부에 제출했다. 참사 이후 자신이 어떤 피해를 입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왔는지와 함께 참사 책임자들에 대한 엄벌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김 전 청장이 무죄를 받자 초롱 씨의 마음에는 죄책감이 하나 더 떨궈졌다. 초롱 씨는 그날 법정에 나가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재판이 김광호의 무죄로 끝났잖아요. 그러니까 정말 마음이 무너지더라고요. 내가 조금 더 용기가 있었다면, 직접 가서 얘기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내가 가서 직접 증언을 했으면 조금 달라졌을까. 글로 전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던 걸까. 

김초롱 / 작가, 이태원 참사 생존자
지난 17일,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이 1심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진은 무죄 선고 직후 한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법정을 나와 울며 분노하는 모습이다. 
초롱 씨는 뉴스타파 카메라 앞에서 재판부에 냈던 발언문을 읽겠다고 했다. "이런 생생한 증언에도 무죄가 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인터뷰를 통해서 알릴 수 있다면, 제가 조금이라도 죄책감이 덜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라며 낭독을 시작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10.29 이태원 참사 당사자이자 목격자이자 생존자 김초롱입니다.

참사는 다양한 형태로 인간의 삶을 짓밟습니다. 한겨울에도 온몸에서 땀이 나 애꿎은 보일러만 자꾸 끄기를 반복하고, 침대에서 잘 수가 없어 참사 이후 몇 개월은 침대를 거부한 채 앉아서 쪽잠으로만 자기도 했습니다. 그마저도 잠깐 잠이 들었다 싶으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깨어나는 형태입니다. 먹은 것이 없지만 구토를 수없이 하기도 했고, 어쩐 일인지 씹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져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스스로 버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갑자기 집에 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여기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어서 두렵고 어지러운 마음에 서른이 넘은 나이에 길바닥에서 그만 어린아이처럼 오줌을 싸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곳에 놀러 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가지 말 걸 너무 후회돼요'라고 말하던 저에게 '아니에요 놀러가서 죽은 게 아니라 일상을 살다가 참사를 당한 겁니다. 우리 모두는 어디를 가도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국가가 지켜주는 게 맞아요'라는 말을 심리 상담사가 아닌 국가로부터 듣고 싶습니다.

이태원 참사의 유일한 원인은 군중 밀집 관리의 실패입니다. 2017년 핼러윈 당일 참사 현장과 동일한 장소에서 찍은 저의 사진은 사진 자체가 증거였습니다. 20만 명이 모였던 2017년 참사 현장은 사람 간의 거리가 충분했고 담소를 나눌 정도로 거리가 확보되어 있었습니다. 2022년 10만 명이 모였던 때보다 인원이 두 배가 많은 날의 현장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진 한 장으로 '그래 나는 정말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펑펑 울었습니다.

더 나은 어른이 있다고 알려주세요. 더 나은 어른들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부디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김초롱 드림.

이태원 참사 생존자 김초롱 씨가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제출한 발언문 중 일부 발췌 

3.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무너지지 않고 계속할 거야"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상처도 여전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다 끝난 것 아니냐'는 편견의 틈바구니에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22일,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사가 이태원에서 열렸다. '이태원을 기억하는 호박 랜턴'이라는 시민 모임에서 기획했다. 서울 용산구 주민이자 호박 랜턴 기획자인 이상민 씨는 "참사에 관해 다양한 측면을 고민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알음알음 모이게 됐어요. 같이 책이나 논문을 읽으며 참사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보자는 시간도 가졌고, 지금은 2주기를 맞아서 다양한 행사들을 준비했어요"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영화 <이태원>(2019년 작)을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이태원>은 이태원에서 살며 일했던 여성 3명의 이야기를 통해 이태원의 역사성과 맥락을 조명하는 영화다. 왜 참사와 무관해 보이는 영화를 이태원 참사 관련 행사에서 상영하는 걸까. 이상민 씨는 이렇게 말했다.
참사 이전에 만들어졌고, 참사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영화이기도 해요. 그런데 참사를 고민하는 데 있어서 이태원이라는 공간의 어떤 역사와 문화와 맥락들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압사 이후에 이어졌던 사회의 반응들까지도 저는 참사로 바라보고 싶거든요. 사람들이 '이태원에서 문란하게 노는 애들 아니냐' 이런 비난을 쏟기도 했었잖아요. 그 비난들이 왜 쏟아졌을까 배경을 생각했을 때 다른 어디도 아닌 이태원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맥락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이 이태원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그래서 '놀러 가서 죽은 것이다' 이런 말과 편견이 나왔다고 생각해요.

이상민 / 서울 용산구 주민
영화 상영이 끝나고, 참사 목격자이자 이태원 주민인 윤보영 씨가 시민들 앞에서 발언했다. 보영 씨는 "참사 이후 2주 동안 집 밖에 못 나왔던 것 같아요. 제가 사랑하는 이태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었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제일 힘이 된 건 이태원 참사를 같이 생각할 수 있는 모임에서 활동한 것이었어요. 지금은 정말 많이 변해서 이제는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 더 적극적으로 말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또 "오늘 되게 기쁜 마음으로 왔어요. 우리가 이렇게 이태원 참사에 대해 이야기할 자리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기쁜 마음이에요"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뉴스타파는 참사 1주기를 맞아 윤보영 씨와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보영 씨는 인터뷰 보도 시 얼굴과 이름을 모두 가려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보영 씨는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얼굴 모자이크 안 해도 괜찮아요." 1년이 흘렀고, 보영 씨는 더 당당한 사람이 돼 있었다. 
지난 22일, 서울 이태원에서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 시민들은 다큐멘터리 영화 <이태원>을 봤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편견과 2차 가해에 맞서, 이태원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10월 26일 낮, 김초롱 씨도 이태원에서 자신의 책인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 관련 행사를 열었다. 북토크와 낭독회 등을 통해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며 또 동시에 핼러윈 축제를 즐기자는 취지의 행사였다. 초롱 씨는 이태원과 핼러윈 축제에 계속 많은 사람이 찾기를 바란다.  
이태원에 한 명이라도 더 왔으면 하는 바람에서 하는 것도 맞아요. 그래서 '핼러윈이 이렇게 다양하고 재미있는 파티랍니다'라는 걸 알려드리고, '참사 골목도 한번 보시고 마음속으로 기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고요. 저는 늘 조마조마해요. 핼러윈이 약간 쉬쉬되고 안 좋은 것이라는 오해가 쌓일까 봐요. 그렇게 되면 하나의 놀이 문화를 세상에 빼앗기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지 않았으면 해요. 오히려 더 핼러윈을 지켜내야 참사가 이태원이 잘못한 게 아니고 핼러윈에 참여한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김초롱 / 작가, 이태원 참사 생존자
비슷한 시각 참사가 발생한 이태원 골목에 유가족들이 모였다. 가족들은 골목에 헌화하며 떠나간 가족들을 그리워했다. 이후 기독교와 가톨릭교, 원불교, 불교 4대 종단 주최 기도회가 이태원 도로에서 진행됐다. 유가족뿐 아니라 여러 시민들도 기도회에 함께 했다. 
기도회가 끝나자 유가족들은 행진을 시작했다. 이태원을 출발해 용산 대통령실을 지나 특조위가 있는 중구 저동을 거쳐 서울시청 광장에 도착했다. 약 2시간 동안 걸으며 유가족들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안전사회 건설을 외쳤다. 
희생자 이상은 씨의 이모 강민하 씨는 "시간이 지나면서 냉정한 현실들을 더 접하게 되잖아요. 당연히 쉽게 해결은 안 되겠구나. 그래도 일단 다시 일어나서 끝까지 가야 된다. 이 생각을 계속 반복하는 것 같아요. 이제 특조위가 구성됐고 곧 조사를 할 거잖아요. 여기서 다 밝혀질 거라고 지금 확신할 순 없지만, 될 거야. 끝까지 잘 되게 계속할 거야. 그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태원 참사' 2주기를 앞둔 주말인 지난 26일,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이태원을 출발해 서울시청 광장까지 행진했다. 1주기 때와 마찬가지였다. 
저녁, 서울시청 광장에서 추모제가 열렸다. 유가족과 시민 수백 명이 추모제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희생자 그레이스 라쉐드 씨의 어머니 조안 라쉐드 씨와 동생들도 있었다. 이날 조안 씨는 무대에 올라 딸을 위해 쓴 편지를 읽었다. 한국에서 떠난 딸에게, 엄마로서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조안 씨는 말했다. 
사랑하는 그레이스에게. 네가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23살, 그 후의 너의 모습은 더 이상 상상할 수 없구나. 나는 네가 우리를 떠날 때의 모습, 행복과 삶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그 모습을 영원히 기억할 거야. 그리고 네가 얼마나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가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느끼게 해주었는지 항상 기억할 거야.

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해 10월 17일 이른 새벽에 공항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을 때였어.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택시를 타는 것이 가장 편하다고 판단해 현관 앞에서 작별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아침 너를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을 거라고 계속 후회하고 있단다.

너는 사랑도, 가슴앓이도 알았고, 실패도, 성공도 해봤고, 긴장감도 행복도 아는 인생을 살았지. 열심히 일했고 보람도 얻었지. 젊은 시절 여러 곳을 여행했고 참 많은 것을 배웠지. 나는 늘 누군가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너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단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단다. 

네가 이걸 들으면 너무 기뻐할 거야. 2023년 2월, 너의 마지막 직장이었던 영화제작사 'electriclime'과 대학에서 너의 이름을 딴 장학금을 만들었단다. 이 장학금은 '그레이스 라쉐드 인턴십'이라고 한단다. 이런 기회를 통해 젊은 여성들이 영화 제작 분야에서 유망한 경력을 쌓을 기회를 얻게 된다니 네가 보았다면 분명 뿌듯했을 거야.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너는 네 이름만큼이나 늘 아름답고 온화하게 삶을 살았지. 그레이스, 너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은 없었을 거야. 네가 많이 보고 싶다.네가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늘 평안하기를 기도한다.

사랑한다, 우리 딸. 엄마가.

조안 라쉐드 /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그레이스 라쉐드 씨 어머니
지난 26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이태원 참사' 2주기 시민 추모제가 열렸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생존자, 목격자, 시민들이 이 자리에 함께했다. 
지난 26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 그레이스 라쉐드 씨의 어머니 조안 라쉐드 씨가 시민 추모제에서 딸에게 쓴 편지를 낭독하는 모습. 조안 씨는 "한국에서 떠난 딸에게, 한국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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