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공공기관·공기업 350곳이 한해 쓰는 기부·후원 예산은 1조 원이 넘는다. 주로 소외·취약 계층을 돕는 데 쓰인다. 그런데 ‘낙하산’이 이 예산을 제 마음대로 쓴다. 총선 출마 지역에, 모교에, 자신이 만든 단체에, 취미 생활 등으로 흘러간다. 낙하산 권력의 오작동의 폐단이 공공기관 예산의 사유화, 오·남용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대선이 300일 앞으로 다가왔다. 다음 대통령이 누구든 낙하산의 폐해를 답습하게 놔둬선 안 된다. 뉴스타파가 공공기관·공기업 개혁 프로젝트 [낙하산이 쏜다]를 시작하는 이유이다. - 편집자 설명
그는 바둑을 무척 좋아한다. 2019년 6월에 열린 '국회 기우회장배 바둑대회'에서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아마 5단 이상의 실력을 갖춘 '정가의 바둑 최고수'로 통한다. 17∼19대(2004∼2016년) 국회에서 내리 3선 의원을 지낸 최규성 전 의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최 전 의원은 한국기원의 이사이며, 이창호 9단을 후원하는 단체인 '사단법인 이창호사랑회'(이하 이창호사랑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2015년 단체의 등기 대표가 된 이후, 지금까지 7년째 회장으로 있다.
3선의 최 의원에게 2016년 정치적 위기가 닥쳤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현역 의원 물갈이 대상에 포함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총선후보 공천심사에서 컷오프(공천 배제)됐다. '정치적 학살'이라고 반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여의도를 떠나며 그의 공직 이력도 끝난 듯 보였지만, 다시 기회가 왔다. 2017년 문재인 후보의 대선 캠프에 합류했다. 더불어민주당 중앙선대위에서 농어촌 공약을 총괄한 농민위원회 상임공동위원장을 맡았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9개월이 지난 2018년 2월, 9대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에 취임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낙하산 사장'으로 제2의 공직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2018년 농어촌공사 사장에 취임한 뒤에도 최규성 사장은 '이창호사랑회' 회장직을 계속 유지했다. 공공기관장이면서 동시에 '이창호사랑회' 회장으로 있는 것이다. 2018년 10월, 전주에서 '제20회 이창호배 전국 아마바둑 선수권 대회'가 열렸을 때도, 최 사장은 대회장을 찾았다. 최 사장은 바둑 전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창호사랑회'를 통해, "바둑의 위상을 높이고 더 많은 국민이 바둑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앞장서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 2018년 당시 최규성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은 '이창호사랑회' 회장직도 함께 맡고 있었다.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이창호사랑회' 주최의 바둑 대회를 참관하고 한 달 뒤인 2018년 11월, 최 사장은 돌연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 뇌물수수 혐의 등 검찰의 수사가 자신으로 향하자, 취임 9개월 만에 사퇴한 것이다. 그의 임기는 원래 2018년 2월부터 2021년 2월까지 3년이다.
그런데, 최 사장이 자진 사퇴한지 한 달이 안 된 2018년 12월 20일, 한국농어촌공사는 갑자기 최 전 사장이 여전히 회장으로 있는 '이창호사랑회'에 현금 1천만 원을 기부했다. 공사의 기부·후원 예산에서 집행됐다. 기부한 사유는 '동호인 주말리그 바둑대항전 후원'이었다. '농업 생산성의 증대와 농어촌의 경제 발전'에 이바지해야 할 한국농어촌공사가 뜬금 없이 바둑의 대중화에 힘쓰는 '이창호사랑회'에 기부를 한 것이다. 농어촌공사가 '이창호사랑회'에 기부·후원금을 준 것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뉴스타파는 한국농어촌공사에 당시 '이창호사랑회'에 대한 공사의 기부·후원 행위가 최규성 사장의 요청에 따른 것인지 물었다. 공사 측은 "그렇다"고 시인했다. 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가 시작되고 사장에서 물러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이창호사랑회'에 대한 기부를 잊지 않은 것이다. 세금이나 다름 없는 공공기관 예산을 철저히 사유화한 것이다.
이 같은 '셀프 기부' 과정에서 농어촌공사는 예산 집행 기준을 어긴 것으로 드러났다. 2018년 한국농어촌공사가 제정한 '기부금 집행 관리 기준'을 확인했다. 기부·후원금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집행 기준을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수혜 대상 1순위는 농·어업인 단체, 2순위는 농어촌공사 본사 소재지인 광주·전남의 사회복지 단체, 3순위는 군경, 농어촌 관련 학술 및 일반 사회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이창호사랑회'는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 한국농어촌공사의 '기부금 집행 관리 기준(2018년)'
우리나라공공기관의 기부·후원금은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소외·취약 계층을 지원하는 데 쓰이는 공적 부조 성격의 예산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농·어민 단체에 가야 할 기부금 예산이 엉뚱하게 낙하산 사장의 '취미 활동'을 지원하는 데 쓰인 것이다. 사기업 CEO가 회삿돈(공금)으로 이 같은 일을 벌였다면, 배임 혐의로 고발될 수 있는 중대 비리다.
한국농어촌공사는 현재 이런 식의 기부금 집행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유명무실한 '기부금 집행 관리 기준'만 만들어 놨을 뿐, 정작 기부·후원처 선정위원회 등 내부 심사 또는 통제 시스템은 마련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극소수 경영진이 기부·후원처를 임의로 결정하는 구조 그대로다. 언제든 공공 예산의 오·남용이 일어날 수 있다.
보통 이제 우리 결재 라인에 (선정)위원회나 이런 것은 없습니다. 위원회는 없고, 처장, 그 다음에 상임이사 정도에게 보고를 하고, 여기서 판단을 해서 결정을 합니다.
한국농어촌공사 관계자
이렇게 오·남용된 예산을 환수할 방법도 현재로선 마땅히 없다. 뉴스타파는 한국농어촌공사에 최 전 사장의 취미 활동에 잘못 쓰여진 예산을 돌려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답변은 간단했다. "(잘못은 인정하지만) 내부 규정이 없어 (환수가) 불가하다"였다.
현재 최 전 사장은 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LED 가로등 사업 수주를 도와주는 대가로 업체로부터 수억 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 달(2021년 5월) 구속됐다. 그에게 자신의 '취미 생활 증진'에 쓰인 예산 1천만 원을 반납할 의향은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만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