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만찬은 회의야. 알았죠? 우리가 안 깨지려면 일단 그렇게 하셔야 돼요.

2024년 04월 22일 10시 18분

2024 KBO, 한국 프로야구리그에 ABS(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 이른바 로봇 심판이 도입됐다. 스트라이크/볼 판정을 기계에 맡긴 것이다. 세계 최초로 1군 리그에 로봇 심판을 도입한 것인데, 역설적이게도 논란을 일으킨 건 인간 심판이었다.
“우리가 빠져나갈 구멍은 그거밖에 없는 거예요. 음성은 볼이야. 알았죠? 우리가 안 깨지려면 일단 그렇게 하셔야 돼요.”
지난 14일, ABS에 스트라이크로 기록된 공을 심판이 볼로 선언하는 오심이 나왔다. ABS에는 스트라이크/볼 판정이 자동으로 기록되는데, 심판은 이어폰으로 '음성'만을 들은 뒤 판정을 내리는 구조다.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한 심판이 스트라이크로 나온 ABS 화면과 다르게 볼 판정을 내린 상황이었다. 판정에 불이익을 받은 수비팀이 항의를 하자 심판들이 모여 회의를 했는데 이때 심판조장이 다른 심판에게 한 말이 방송에서 고스란히 중계된 것이다. 
'음성은 분명 볼'이었다고 우기라는, 즉 본인들의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라고 지시하는 듯한 정황이 생생하게 전달됐다. 만약 방송사가 심판들의 현장 음성을 중계하지 않았다면 실수는 은폐됐을지 모른다. 이번 논란은 로봇 심판이 도입되기 전, 심판들이 얼마나 많은 실수를 무마해 왔을지까지도 의심하게 만들었다. 
만약 ABS 판정 결과를 전광판에 즉시 표시하는 시스템이었다면 어땠을까? 혹은 볼 판정을 15~20초 뒤가 아니라 즉시 더그아웃(Dugout)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면? 그래도 기계 탓을 할 수 있었을까? 투명하게 공개되는 시스템에는 실수를 가리고 싶은 유혹이 깃들 자리가 없다. 반면 공개되지 않는 시스템이라면, 바깥에서는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허용되는 구조라면 어떻게 굴러갈까.

“만찬간담회”를 “정책 회의”로 포장한 검찰의 업무추진비 공개 내역

공공기관은 기관장의 업무추진비 사용내역을 국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각 기관 홈페이지에 공개해야 한다. 검찰총장 또한 대검찰청 홈페이지에 기관장 업무추진비를 분기마다 공개하고 있다. 사용일자, 내역, 금액을 하나의 표로 정리해 공개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각지대가 있다. 영수증이나 증빙자료는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구의 ABS와 달리 검찰총장의 업무추진비 공개 시스템에는 유혹이 깃들 곳이 없는 걸까?
뉴스타파 취재진은 3년 7개월의 소송 끝에 검찰총장 업무추진비 집행 내역의 세부 증빙 자료, 카드 영수증을 공개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검찰은 공개할 정보의 양이 많다며 지난 10개월 동안 자료를 찔끔찔끔 내놨다. 자료 공개가 지연되는 건 검찰이 모든 증빙자료를 한 장씩 복사해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끈으로 묶인 종이 서류를 풀지 않고 그대로 눌러 복사하면 종이의 가장 윗 부분은 복사되지 않아 까맣게 가려진다. 검찰총장 업무추진비 집행내역도 표 맨 위 행은 까맣게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상기하자면 가려진 곳엔 유혹이 깃들기 마련이다. 
가려진 행을 확인하기 위해 검찰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내역을 들여다봤다. 뭔가 이상했다. 내친 김에 검찰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윤석열 대통령의 총장 시절 업무추진비 내역과 뉴스타파가 소송을 통해 확보한 원자료를 모두 비교해봤다. 그러자 ‘청렴 검찰’이 감춰왔던 관행이 드러났다. 같은 날 같은 금액을 결제한 것이 분명한데 대검 홈페이지에 기재된 명목과 원자료에 기재된 명목이 조금씩 달랐던 것이다. 
⏶대검찰청이 2020년 홈페이지에 게재한 검찰총장 업무추진비 집행내역과 행정소송을 통해 입수한 윤석열 검찰총장의 직인이 찍힌 증빙자료를 비교했다.
예를 들어 보자. 뉴스타파가 소송을 통해 확보한 원자료에 따르면 윤석열 검찰총장은 2020년 4월 27일 저녁식사 만찬을 하고 업무추진비 45만 원을 지출했다. 원자료에는 명목이 "인권부장 전출 만찬간담회"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수권 대검 인권부장이 서울동부지검 검사장 직무대리로 가게 된 것을 기념하는 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대검 홈페이지에는 이 45만 원 결재의 명목이 "인권부장 소관 정책회의"라고 적혀있다. 전출기념 만찬이 정책회의로 둔갑한 것이다. 이수권 인권부장에 대한 인사발령은 다음날인 4월 28일자였다. 다음날 아침 동부지검으로 출근해야하는 검사가 바로 전날 저녁식사 만찬 자리에서 어떤 정책 회의를 소관할 수 있었을까.

14건 중 12건 '마사지'

윤석열 검찰총장의 업무추진비 내역이 바뀐 건 이날 하루만이 아니다. 대변인이 배석한 "오찬 간담회"는 “공보 관련 정책 회의"가 됐고, 공공수사부 선거지원팀과 함께한 "만찬간담회"는 “공공수사부 선거지원팀 회의", 사무국과 함께한 아침식사는 “수사권조정 관련 회의"가 됐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면 그 누군가 소관하는 회의가 됐다. “오찬", 점심식사는 그대로 공개한 반면 “만찬", 저녁식사는 수정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중에게 공개되는 문서에 ‘검찰총장 만찬'은 기록될 수 없었다. 만찬은 저녁식사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걸까. 원자료에 가장 많이 나오는, ‘간담회'라는 단어 역시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문서에서는 자취를 감췄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지금까지 누구도 검찰총장 업무추진비의 결재 원본이나 증빙 영수증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로는 총장의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상시 공개'하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누구도 원본을 본 적 없다는 점을 이용해 '마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2020년 4월 검찰총장의 업무추진비 지출 내역 14건 중 12건이 이렇게 '마사지'됐다. 1건은 복사 과정에서 까맣게 가려져 확인할 수 없었다. 고치지 않은 경우는 단 1건에 불과했다.
업무추진비는 기관장의 직무수행에 드는 비용으로 소속기관의 임직원에 대한 격려 또는 식사를 제공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물론 업무추진을 위한 각종 회의와 간담회, 행사 등에도 사용할 수 있고 관계자에게 식사를 제공하는데도 쓸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만찬', ‘간담회' 등으로 사용한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대검찰청은 굳이 내역을 수정해 공개해 왔다가 이번 행정소송으로 그간의 밑작업이 드러나게 됐다. 세간의 평가에 과민한 담당자의 과잉 충성이었을까 검찰청의 오랜 관행이었을까.

'사각지대'가 있다는 자신감

검찰의 이상한 '업무추진비 내역 마사지'는 검찰 예산의 또다른 사각 지대인 특수활동비를 떠올리게 한다.
검찰의 특수활동비 집행 자료는 그동안 ‘수사 기밀'을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다. 자료가 세상에 공개된 건 작년 6월 23일, 행정소송을 시작하고 3년 7개월 만이었다. 그나마도 수령인은 물론 수령 부서까지 모든 정보를 가렸고 공개된 건 집행 날짜와 금액뿐이었다. “특활비 수령자의 성명과 수령 일시, 집행 명목 등이 공개된다면 정보를 조합해 특정 사건의 정보취득 경로, 수사진행 상황, 수사 경위 및 경과 등을 유추하거나 추측하여 불필요한 논란과 오해를 발생시킨다"는 주장이었다.
뉴스타파가 이후 약 10개월간 검찰이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전국 검찰청 특수활동비 집행 실태를 취재한 결과는 참담했다. 기밀수사에 쓰여야 할 특활비를 공기청정기 대여, 휴대폰 요금, 기념사진 촬영, 국정감사 대응검사의 격려금으로 지급하는 등 예산 오남용은 물론 세금 부정 사용이 곳곳에서 확인됐다. 절차적 정의를 지키면서, 절제의 덕목을 갖추어 국민의 아픔을 치유하겠다던 검찰 역시 공개되지 않는 시스템 뒤에는 온갖 유혹과 눈감음이 있었다.
검찰의 예산 집행이 지금보다 일찍 검증받을 기회가 있었다면 14초 차이로 특정업무경비 카드와 업무추진비 카드로 나눠 결제하는 검찰은 보지 않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음악동호회, 전입 검사 회식에 수사 실비에 쓰여야 하는 특정업무경비를 쓰는 일은 없어야 했다. 검사들이 장어집에서 85만 원어치 식사와 술을 마시고 업무추진비 50만 원 이상 사용할 경우 참석자 명단을 남겨야한다는 규정을 피하고자 수사 실비에 쓰여야 하는 특정업무경비 카드로 쪼개 결제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적어도 업무추진비 한도가 있어 모자라니 특정업무경비도 직원 격려에 쓸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전임 고양지청장, 현 서울고검 형사부장의 해명은 듣지 않을 수 있었다. 모두 세상에 공개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만든 유혹, 관행, 뻔뻔함이다.

KBO보다 불투명하고 공놀이보다 느린 검찰 

그렇다면 행정소송에서 이기고도 확인할 수 없게 검찰이 가려버린 결제시각, 참석자 명단, 구매내역에는 어떤 말못할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 궁금하다. 3년 7개월 만의 행정소송 승소로 2017년의 집행자료를 2023년에야 처음 확인할 수 있었다.
2024년 한 해 검찰에 배정된 특수활동비 예산은 72억 원. 검찰청은 행정소송 패소 이후에도 작년에 쓴 검찰 예산 집행 자료를 정보공개청구하자 또다시 비공개 결정을 반복하고 있다. 다시 소송을 제기하면 얼마나 지연될지 알 수 없다. 숱한 예산 오남용 사례에도 “답변드릴 사항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는 검찰은 반성 없이 여전히 공개되지 않는 그들만의 세상에 살고 있다. 나라의 곳간을 쓰는데 검찰의 양심은 다른 어느 공공기관보다 탁월하게 믿을만한 것일까.
KBO는 하루만에 심판 세 명을 업무에서 즉각 배제시켰다. 논란 발생 5일만인 19일, KBO는 오심 은폐 논란을 일으킨 심판조장에 대해 역대 최고 징계인 계약해지를 결정했다. 사실상 해고다. 함께 논의한 다른 심판 2명에 대해서도 정직 3개월을 처분했다. 양팀 더그아웃(Dugout)에는 심판과 동시에 판정음을 들을 수 있도록 23일까지 음성 수신기를 배치할 예정이다. 공놀이보다 느린 검찰이다.
제작진
취재연다혜
데이터 시각화김지연
디자인이도현
웹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