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어둠의 증언자’ 김승효, 스러지다

2020년 12월 31일 10시 00분

고 김승효 (1950.4.16-2020.12.26).사진:강종헌(재일동포 간첩조작 피해자)
나는 무죄야. 한국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려. 박정희 중앙정보부가... 그것이 박정희 정치야 청와대 정치고 중정의 정치야.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이야. ” (영화 <자백> 중에서)
영화<자백>에서 국가폭력의 잔인함을 온 몸으로 증언한 김승효 씨가 12월 26일 별세했다. 향년 70세. 
뉴스타파가 김승효 씨를 만난 것은 2015년, 영화 <자백>을 취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우리는 일본 교토에서 70년대 박정희 유신 시대의 공포의 시간에 갇혀 살고 있는 김 씨를 만났다. 김 씨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된 뒤 고문으로 얻은 정신이상에서 수십 년 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김 씨와 초,중,고를 같이 다닌 친구 강종건 씨에 의하면 김승효 씨는 총명하고 섬세한 젊은이였다고 한다. 김 씨는 일본의 명문 리츠메이칸 대학에 진학한 뒤 한국 유학을 결심했다. 당시 많은 재일동포 유학생이 한국에 왔는데 그 이유는 일본에서 민족적 차별을 받고 자라는 과정에서 고국에서 뿌리를 찾고 한국 문화를 배우고 싶은 욕구가 재일동포 젊은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었다. 
김승효 씨 구속 당시 신문
그러나 재일동포의 한국 유학은 위험성이 큰 모험이기도 했다. 일본은 사회당이나 공산당이 합법이었고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 발언도 얼마든지 허용되는 사회였다. 그러나 한국은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한 박정희와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이 죄가 되는 나라였다. 박정희가 선포한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 유신헌법의 개정을 주장하는 행위,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하고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었다. 
73년 고려대에 유학 중이던 친구 강종건 씨는 하숙생들에게 정치에 관한 발언을 한 것이 빌미가 돼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3일 지난 뒤 훈방된 강씨는 김승효 씨에게 ‘절대 일본에서 하듯이 이야기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승효 씨는 74년 5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 갔고 간첩으로 조작됐다. 74년 6월 28일자 신문에는 ‘학원 침투 조총련 간첩 검거’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가 모국유학을 가장해 서울대에 입학한 뒤 대학생 시위를 선동했다는 내용이었다. 
강종건 씨도 75년 이른바 11.22 사건(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에 끌려 갔고 간첩으로 발표됐다. 
지난 2015년 옛 중앙정보부 지하실을 다시 찾아 인터뷰하는 강종건 씨 모습
마지막에는 때릴 자리가 없을 정도로, 상처에다가 안티푸라민을 바르고 또 그 위에다 또 때리기도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자신이 짐승이 되는 것이죠. 맞는 사람도 짐승이고 고문을 가하는 그들도 짐승으로 돌아가는거 같은 느낌이 들었죠

강종건 ‘조국이 버린 사람들’ 중에서
김승효 씨는 교도소에서 이미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광주 교도소 같은 방에서 지낸 유영수 씨(재일동포 간첩조작 피해자)에 의하면 당시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고 한다.
혼자서 중얼중얼거리면서 왔다갔다 하는거 뿐이야 간수들이나 일반수들도 걔가 뭐 정신적으로 이상하다는거를 알아요 아니까 그냥 놔둬요 다른데 안가게 지켜봤지 본인도 왔다갔다 그냥 중얼중얼거리면서

유영수 ‘조국이 버린 사람들’ 중에서
취재진이 입수한 교도소 서류에는 그가 77년에 이미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 기록돼 있었다. 교도소 목공장에서 일하던 그가 묵묵히 서 있거나 앉아 있다고 했다. 교도관이 보기에도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였고, 갑자기 병세를 일으켜 실신했는데 의무과에 의뢰하니 정상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고에 대해 상급자는 ‘그저 동태를 주시하라’고 지시할 뿐이었다. 이후 그의 정신병 증세에 대한 기록은 없다. 교도소가 그의 증세를 처음 기록한 뒤 81년 가석방될 때까지 4년 이상 그 상태로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출소해서 일본으로 돌아간 뒤 그는 정신병원에서 지냈다. 그는 뉴스타파 취재진과 만날 때까지 가족들에게도 자신이 당한 일을 말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취재진과 만난 날,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처음 들었다고 한다. 
김승효 씨는 친구들의 설득에 재심을 청구하겠다고 승락했다. 그러나 그는 법정 진술을 위해 한국에 가는 것은 한사코 거부했다.  
“재심을 하면 한국 법정에 나와주시라. 나와서 증언해 주시라 그럼 가실 거예요?”
“안 갑니다”
“한국에 간다는 거 자체가 마음이 불편하세요?”
“불편해”
그는 왜 그렇게 완강하게 한국 행을 거부했을까? 당시는 막연히 한국에 대한 거부감과 공포심이 원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친구 강종건 씨는 김승효 씨의 한국행 거부 뒤에 숨어 있었던 사연을 공개했다. 재심을 위해 취재진과의 만남 이후에도 끈질기게 그를 설득했는데 그 과정에서 김승효 씨가 숨겨진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승효가 석방되었을 때 중앙정보부원이 찾아와가지고 “너 일본에 가더라도 언제든지 우리는 잡아올 수 있다. 너 일본 가서도 말조심하고. 여기에서 있던 일에 대해서 입 다물어라.너 김대중이 알지? 김대중이 일본에 있다가 잡혀왔잖아. 그렇게 할 수 있어” 계속 이제 말조심을 하고 한국에 대해서 나쁜 이야기하지 말고 그 사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이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승효는 한국에서 징역 살고 일본에 돌아갔는데 그 공포심에서 그랬는지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 자기가 고문 받고 뭐 좀 수용생활을 한 것에 대해서도 일제 가족들에게 이야기 안 했습니다. 그에게는 아직은 유신시대와 중앙정보부는 지워지지 않는 살아있는 현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친구 강종건 씨 증언
김승효 씨는 결국 끝까지 한국에 오지 않았다. 서울 고등법원은 2018년 궐석재판(피고인이 출석하지 않은 채 하는 재판)을 통해 김승효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고문 받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직접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고문을 받지 않았다면 왜 교도소에서부터 정신 이상을 일으켰다는 것인가. 유신 시대의 대한민국 자체가 고문 공화국이었다는 인식이 모자라는 판결이었다. 
김기춘 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어떤 가해자도 김승효 씨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74년부터 5년 간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역임했고 많은 재일동포 간첩조작 피해자를 만들어 낸 김기춘 씨는 재일동포 간첩조작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부인했다. 그는 자신이 수사 책임자였던 사건들이 재심에서 무죄로 결론난 것에 대해 ‘사법부가 한 일인데 나와는 상관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는 ‘내가 수사한 일은 없다’고도 발뺌했다. 
김기춘은 91년 5.16 민족상을 받았는데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가 재일동포 간첩을 많이 잡았다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수사관 출신인 이기동 씨가 쓴 ‘남산 더 비하인드 스토리’에는 ‘김기춘 국장의 방에 조사실을 볼 수 있는 CCTV가 있었다’는 대목이 있다. CCTV가 있었다면 김기춘은 그 많은 간첩조작 피해자들에 대한 고문 장면을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수사 책임자였다는 자명한 사실조차 부인했다. 
우리는 70년 대에 일어난 간첩조작을 처벌하지 않았다. 그 결과 간첩조작 기술자들은 중앙정보부에서 안기부로 국정원으로 이름만 바꾼 간첩제조공장에서 번성했다. 70년 대에는 재일동포들이 간첩조작의 희생양이었던 것이 2천년대 이후에는 탈북민으로 바뀌었다. 재일동포와 탈북민은 북한과 접촉했다고 조작하기 좋을 뿐 아니라 한국 사정에 어둡고 연고자가 없어 정보기관이 마음껏 고립시키고 간첩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70년 대에는 단기간 내에 육체적 고문으로 간첩을 만들었다면 2천년대에는 독방에 6개월 동안 가둔 채 심리적 고문으로 간첩을 만들어 왔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최근 국정원은 탈북민 위장 간첩사건을 전수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국정원은 이번 기회를 진정한 환골탈태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간첩조작을 밝히고 사죄해야 한다. 국정원 내부의 간첩조작 기술자들을 처벌해야 한다. 그것이 김승효 씨와 많은 간첩조작 피해자들에게 진정한 사죄를 하는 길이다.
김승효 선생님, 그리도 그립고 아름다웠던 조국에 유학 오신 거 후회하지 마시고 하늘나라에서는 꼭 다시 조국을 찾아주세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시고 영혼이라도 이 땅에 오셔서 못다 이룬 청춘의 꿈을 펼치시며 아름다운 조국 땅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고인의 재심 담당 변호사 장경욱
제작진
취재최승호
편집윤석민
촬영최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