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태형'에 사망한 조선 청년의 '마지막 소원'

2022년 02월 28일 19시 05분

1919년 5월 25일.
평안북도 선천군 미동병원에서 식민지 청년 2명이 숨졌다. 각각 19세, 20세였다. 
평안북도 강계 토박이인 두 젊은이는 1919년 4월 중순 강계 읍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돼 신의주감옥에 투옥됐다. 이들은 5월 1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5월 17일부터 3일간 태형 형틀에 묶여 일제 경찰에게 하루에 30대씩 모진 매질을 당했다.
▲ 일제는 태형 집행을 위해 십자가 모양의 형틀을 제작해 전국에 배포했다.
두 사람은 장로교 선교사 샤록스가 운영하던 선천 미동병원에서 치료 받았으나 태형 후유증으로 끝내 숨지고 말았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의 3·1절 특집 다큐 <일제 ‘태형'에 사망한 조선 청년의 마지막 소원>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의 야만적 태형에 의해 젊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두 청년의 기록을 찾아나선다. 

일제 태형 피해자 사진 최초 공개

▲ 영국 국립공문서관과 미국 장로교역사연구소에 보관돼 있는 3.1 독립운동 당시 일제 태형 피해자 사진.
영국 런던에 있는 국립공문서관에서 ‘F.O. 371’, 즉 ‘영국 외무성(Foreign Office) 371’로 분류돼 있는 외교문서군에는 ‘Japan Files 1919-20’이라는 제목이 붙은 문서철이 있다. 한국에서 3·1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시기에 서울 주재 영국 외교관이 본국에 보고한 문서다. 3·1 독립운동의 전개 상황과 일제가 만세시위 참가자들을 체포해 태형을 집행한 기록이 주를 이룬다.
이 영국 외교문서에는 태형 피해자들의 상처 부위를 촬영한 사진도 12장 포함돼 있다. 태를 맞은 부위가 심하게 손상되거나 상당 부분 살점이 떨어져 나간 모습이 확인된다. 이 사진들은 당시 태형 피해자들을 치료한 외국인 의료선교사들이 촬영하거나 수집한 자료다. 대표적으로 세브란스의전 소속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와 알프레드 러들로 박사, 그리고 선천 미동병원의 알프레드 샤록스 박사 등이 있다. 뉴스타파가 수집한 태형 피해자 사진 가운데 상당수는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영국 국립공문서관 이외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장로교역사연구소에서도 3·1 독립운동 당시 일제의 태형 만행 기록을 추가로 입수했다. 취재진은 이 기록에서 일제 태형으로 사망한 평안북도 강계 청년 2명의 사진과 인적사항을 찾아냈다.
103년 전 평안북도 강계 읍내 거리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다 태형에 희생된 이 두 청년의 이름은? 마지막 모습은? 이들의 마지막 소원은? 그리고 일제는 왜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인 태형 제도를 도입했을까.
뉴스타파 3·1절 특집 다큐 <‘일제 ‘태형’에 사망한 조선 청년의 마지막 소원>은 바로 이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 뉴스타파 취재진이 추적한 강계 만세시위로 일제에 태형을 당하고 사망한 두 청년의 사진. 
아래는 태형을 당해 입원한 강계 청년의 마지막 모습과 그의 소원을 기록한 병원 간호사의 기록.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외교문서철에 담겨있는 내용이다.  
19세 김 군의 엉덩이는 심각하게 감염돼 있었고, 괴사한 조직을 많이 제거해야 했습니다. 마취에서 깨며 그는 쉴 새 없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김 군은 회복하는 기미가 보였지만 이후 패혈증이 발생했습니다. 사망 당일 오후 내내 김 군은 손가락 끝을 물어뜯으려 했습니다. 그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던 나는 그의 입에서 손을 떼어놓았습니다. 물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는 마시지 않았습니다.“제가 죽는 것은 상관없지만 우리나라의 자유를 보고 싶습니다.” 그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는 이내 숨을 거뒀고, 나중에서야 그가 연신 손가락을 물어뜯은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앞서 간 애국자가 그러했듯 그도 자기 손가락 살점을 뜯어 피로 ‘독립선언’을 쓰려 했던 겁니다.

선천 미동병원 간호사 증언 중
제작진
CG정동우
디자인이도현
웹출판허현재
내레이션김정
삽화최국호
해외자료수집국회기록보존소 전갑생
영상취재최형석 이상찬 신영철 김기철 정형민
편집박서영
취재이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