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과 중간층 1부: 프레임

2014년 08월 27일 18시 02분

 

미국의 인지 언어 심리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주장한 ‘프레임 이론’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낯설지 않은 개념이다. 언론에서도 수차례 소개가 되었고 정치인들의 발언에서도 ‘프레임’이란 말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정치적 프로파간다로서만 강조되어 그저 사회적 이슈를 어떤 프레임에서 바라봐야 어느 정치세력에게 유리한가 혹은 사람들을 어떻게 속여(?)먹을까의 수준에서만 회자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조지레이코프가 말하는 ‘프레임’이란 단순히 프로파간다적 개념이 아니다. 그가 언어인지 심리학자인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레임은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에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가 듣고 말하고 생각할 때 우리 머릿속에는 늘 프레임이 작동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쉽게 말해 정치적 프로파간다든 아니면 아주 일상적인 것이든 우리의 생각 자체가 프레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우선 그가 정의하는 프레임은 다음과 같다.

프레임특정한 언어와 연결되어 연상되는 사고의 체계(들)

예를 들어 ‘의사’라는 말을 듣거나 머릿속으로 생각했다고 해 보자. 이 때 연상되어지는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 연상되어지는 건 아마도 환자일 것이다. 그에 더해 간호사, 병실 등 의사와 연결된 다양한 개념들이 함께 떠오르는데 이러한 것들의 집합체가 다름 아닌 ‘병원’이다. 즉 병원은 ‘의사’라는 언어와 연결되어 연상된 사고의 체계로써 ‘의사’라는 언어의 ‘프레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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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우리는 ‘의사’라는 말을 떠올릴 때 굳이 ‘병원’이라는 사고 체계, 즉 ‘프레임’을 연상하게 되는 걸까?

조지 레이코프는 그 이유를 언어습득과정에서 찾는다. 우리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말을 처음 배우던 시절에 처음으로 ‘의사’라는 개념을 이해했다고 치자. 대개의 경우 ‘병원에서 일하고 환자의 병을 고치는 사람’ 정도로 파악했을 것이다. 즉 애초에 ‘의사’란 언어의 의미를 환자, 간호사, 병실 등이 포함되어 있는 ‘병원’이란 체계와 연결시켜 함께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체계를 함께 이해하지 않고서는 ‘의사’라는 개념만을 따로 떼어서 이해할 수 없다.

이처럼 언어를 처음 배울 때 언어와 연결되어진 (사고)체계, 즉 ‘프레임’을 함께 이해해야만 했기 때문에,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의사’라는 말을 듣거나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병원’이란 체계를 연상하게 된다. 결국 각각의 언어들은 애초부터 그와 연결된 프레임(들)과 함께 우리의 머릿속에 자리 잡는 것이다.

언뜻 굉장히 복잡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꼭 ‘프레임’이라고 지칭하지 않아도 우리가 특정한 언어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 언어와 연관되어진 다른 언어, 혹은 그 언어가 속한 범주, 나아가 그 언어와 관련된 배경지식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만 한다. 처음 접하는 언어를 배경지식 없이 사전만 찾아봐서 이해하기가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처음 언어를 배울 땐 다소 번거롭지만 일단 머릿속에 언어와 프레임이 연결되어 함께 입력되면 이후 생각을 하거나 의사소통에 있어 큰 도움이 된다. 마치 ‘홍대 앞’이라는 말만 들으면 그 위치가 어디인지, 어떤 교통편을 이용하면 좋을지, 거리는 어떤 분위기인지, 어떤 맛집들이 있는지 등등이 금방 떠올려지는 것과 같다고 할까? 만약 언어에 프레임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마치 처음 여행을 간 장소에서 자기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매번 지도를 펴 봐야 하는 것처럼, 언어를 들을 때마다 매번 그 언어가 속한 범주와 연관된 다른 언어들에 대해 일일이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프레임은 인지언어학적으로 ‘진화의 결과물’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엔 한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특정한 언어에 연결된 프레임은 우리가 그 프레임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기존에 연결된 프레임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려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선택의 수고로움이 없어 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프레임을 능동적으로 제어할 수 없게 된다. 나아가 누군가 언어를 바꾸게 되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바뀐 언어의 프레임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의사’를 지칭하면서 ‘의사’라는 언어보다는 ‘고소득자’라는 말을 강조했다고 치자. (혹은 ‘의사’라는 말을 소득범주로 나뉜 통계자료 안에서 고소득자 칸에서 발견했다고 치자) 아마 우리는 의사에 연결된 ‘병원’이란 프레임 보다 고소득자에 연결된 ‘돈’이라는 프레임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두 프레임의 차이는 매우 크다. 의사가 병원이란 프레임으로 연결될 땐 그저 ‘직업’이나 ‘역할’로 받아들여지지만, ‘돈’이라는 프레임으로 연결될 땐 계급 혹은 계층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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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수평적’ 느낌을 주고 후자는 ‘수직적’ 느낌을 준다. 수직적 프레임 안에서의 의사는 부러움이나 시기의 대상이 되어 환자를 고쳐주는 좋은 사람이라는 일반적 의미로부터 벗어나 다르게 해석된다. 언어를 바꿈으로써 프레임까지 함께 바뀐 것으로 일종의 ‘프레임 전환’이 된 셈이다.

이러한 ‘프레임 전환’은 정치권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데 가장 최근의 예 중 하나가 ‘경제민주화’와 관련하여 박근혜 대선 후보가 사용한 방식이다. 원래 경제민주화는 야권이 주장했던 것으로 소위 ‘좌클릭’이라고 하는 이념 프레임과 연결된 언어다. 당연히 보수적 성향의 유권자를 전통적 지지층으로 둔 박근혜 후보 입장에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언어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워낙 MB 정권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이 널리 퍼져 있는데다, MB와의 차별성이 필요했기 때문에 박근혜 후보는 과감하게 ‘경제민주화’를 자신의 공약으로 받아들인다.

단 그대로가 아니라 프레임을 바꿔서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게 다름 아닌 ‘김종인’이라는 인물이다. 대선 이전만 해도 크게 회자되지 않던 김종인은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 공약을 받아들이게 되는 시점과 발맞춰 언론에 집중적으로 소개가 되는데 소위 ‘경제민주화의 원조’라는 게 언론이 소개하는 주요 접근 방식이었다.

언뜻 보면 별다른 의도가 없는, 그저 ‘원조’에 대한 언론의 경쟁적 보도 같지만 프레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경제민주화’라는 언어에 ‘김종인’이란 인물을 연결시키는 일종의 ‘프레임 전환’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경제민주화는 ‘좌클릭’ 이라는 ‘이념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 김종인이라는 ‘인물 프레임’으로 전환되고 박근혜 후보 입장에선 ‘좌클릭’이란 부담을 최소화 해서 경제민주화 정책을 흡수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언론은 박근혜 후보가 김종인을 얼만큼 수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보도를 하는데, 이는 경제민주화를 박근혜 후보의 (상대방의 정책까지도 수용하는 통 큰)‘리더십’으로 연결시키는 또 다른 ‘프레임 전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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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경제민주화는 좌클릭이란 ‘이념 프레임’에서 김종인 이란 ‘인물 프레임’으로, 그리고 다시 김종인을 통크게 수용하는 박근혜 후보의 ‘통 큰 리더십 프레임’으로 변형 된다. 특히 ‘통 큰 리더십 프레임’의 경우 (좌우 이념이 아닌 전통적 의미에서)‘보수적 프레임’에 가깝기 때문에 보수성향의 전통적 지지층은 경제민주화를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기존의 좌클릭이란 이념 프레임으로 경제민주화를 이해하고 있는 진보적 성향의 유권자들은 비록 정책이 아닌 김종인만 강조하는 상황이 뭔가 의심스럽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머릿 속엔 경제민주화란 언어는 여전히 좌클릭이란 ‘이념 프레임’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찌됐든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수용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면에서 박근혜 후보의 전략은 이념 프레임을 무조건 회피했다기 보다는 ‘인물 프레임’을 통해 좌클릭 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논쟁을 회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경제민주화는 추상적인 범주로 억제 되어 보수와 진보는 각각 자기가 선호하는 이념 프레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는 마치 ‘노사화합’이란 추상적 언어가 노사의 대립 관계를 완전히 회피하진 못하지만 대립을 억제하는 동시에 노와 사가 각각 자기 유리한 대로 해석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2009년 민주당 역시 ‘이념 프레임’을 벗어나고자 ‘뉴민주당 플랜’을 발표한다. 뉴민주당 플랜의 주요 설계자였던 김효석 전 의원은 다음과 같이 기획의도를 밝힌다.

"이념적 색깔을 빼야 중원(중산층, 수도권 및 충청권, 무당파)을 얻을 수 있고, 재집권할 수 있다"

박근혜 후보가 ‘좌클릭’을 천명 했다면, 2009년 민주당은 ‘우클릭’을 천명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다. 여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프레임이란 관점에서 보면 보수우파 프레임과 진보좌파 프레임을 기계적으로 절충했기 때문이다. 기계적 절충은 뉴민주당 플랜의 기조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포용적 성장’과 ‘기회적 복지’가 뉴민주당 플랜의 주요 기조였는데, 일단 ‘성장’이란 언어나 ‘복지’란 언어는 그 자체가 여전히 ‘이념’ 프레임과 강력하게 연결된 언어들이다. 이념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하면서 정작 여전히 이념 프레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물론 심지어 이념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자극한다. 당연히 사람들은 뉴민주당 플랜을 보면서 가장 먼저 ‘이념 프레임’을 떠올리게 되고, 둘 다를 기계적으로 명시한 것에서 왼쪽을 말하는 건지 오른쪽을 말하는 건지 궁금증을 느끼게 된다. 쉽게 말해 ‘정체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를 염려해 ‘포용적’이나 ‘기회적’이라는 언어를 함께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성장’과 ‘복지’라는 언어와 의미적으로 별다른 연결점을 지니고 않아 성장과 복지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프레임을 전혀 전환시키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전통적 지지층(상대적으로 진보적인)의 입장에서 보면 과거에 비해 ‘성장’이란 용어가 전보다 강화된 것으로 여겨져 반발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결국 뉴민주당 플랜은 전통적 지지층에겐 우클릭 논란을, 그 외 사람들에겐 정체성 혼란을 일으키며 시작부터 논란에 휩싸이게 되고 이후 반복적인 수정이 가해지며 흐지부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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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당시 뉴민주당 플랜에 가장 열광적으로 환영을 표명한 주체가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층과 민주당을 이간질하거나 민주당의 내분을 일으키기 위해서라는 피상적 수준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프레임이란 관점에서 보면 ‘보수우파적 프레임’이 사회 전반적으로 강화되어지는 게 그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경제를 생각할 때도 ‘분배’와 같은 진보좌파적 프레임보다 ‘성장’과 같은 보수우파적 프레임에 입각해서 생각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고 언론 역시 경제와 관련되어 이야기할 땐 주로 ‘성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된다. 그에 대해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어쨌거나 ‘성장’이란 프레임 안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게 한나라당에겐 유리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왜 민주당은 자신들에게 불리할 가능성이 높은 소위 ‘우클릭’을 시도했던 걸까? 왜 비슷한 전략을 취한 박근혜 후보의 ‘좌클릭’과 전혀 다른 결과로 귀결된 것일까? 그 답은 바로 ‘중도층’이라고 하는 개념에 대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이해도 차이에 있다.

사실 중도층을 잡아야 한다는 목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그리고 지금의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 역시 마찬가지다. 지지층만 가지고 50% 이상의 득표를 할 수 없으니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목표다. 다만 새누리당은 자신들의 ‘보수적 프레임’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소위 ‘무늬만 좌클릭’을 했고, 민주당은 보수와 진보 그 중간 프레임이 진짜 존재할 것이라 믿고 ‘진짜 우클릭’을 했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전자는 성공했고 후자는 그렇지 못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한 걸까?

여기에 대한 답은 ‘중도층’에 대한 조지 레이코프의 주장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조지 레이코프는 소위 ‘중도층’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중도(중간층)처럼 보이는 유권자들은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가치관을 둘 다 가지고 있으며

사안에 따라 적용하는 가치를 달리 하는 이중 개념주의자일 뿐이다.”

‘이중 개념주의자’. 즉 우리가 흔히 보수와 진보 그 중간쯤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믿는 ‘중도층’은 사실 중간쯤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때론 보수적으로 때론 진보적으로 생각을 할 뿐이라는 의미다. 다만 사안 별로 이쪽이었다 저쪽이었다 번갈아가며 선택을 하다 보니, 각 사안들을 모아 그 ‘평균값’을 내면 중간쯤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는 마치 ‘평균의 함정’과 같은 것으로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나,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나 소득 수준의 평균 값만 놓고 보면 같은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인 셈이다.

조지 레이코프의 중도에 대한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중도층’에게도 어찌 됐든 보수우파와 진보우파 어느 한쪽의 프레임을 선택해서 접근해야 한다. 아니면 최소한 제3의 프레임을 제시하여 양 쪽이 각자 자신의 프레임에 맡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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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민주당 플랜은 바로 이런 면에서 ‘중도층’에 대한 매우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이념 프레임’으로 승부하고 불리하거나 부족한 부분에 제한적으로 프레임 전환을 시도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제3의 프레임을 띄워 논의의 본질을 희석하는 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적어도 ‘정치 전략’이란 면에선 ‘진짜 우클릭’보다는 훨씬 더 효과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결론을 짓게 되면 뭔가 대단히 허전하다. 특히 절충과 협력을 선호하는 이들, 그것이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믿는 이들이라면 그럴 것이다. 마치 양극단만 존재해서 모 아니면 도를 선택해야 하거나, 기껏해야 프레임 전환 같은 속임수(?)를 써야만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게 정치라면 이들에게 정치는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행히 ‘합리적 방법’이 전혀 없는 게 아니다. 그러한 합리성을 지닌 ‘중간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한 사회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합리적 사고’를 하는 너무나 중요한 중간층이 존재한다. 다만 이 중간층은 보수우파와 진보좌파라는 ‘이념 프레임’에서 일컬어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허상 같은 ‘중도층’은 아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2부에서 소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