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와 뉴스타파함께재단은 다양하고 더 나은 언론 생태계를 위해 독립PD와 독립감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박동덕 독립감독의 이 다큐멘터리는 ‘2020년 독립다큐 공모전’에 선정된 작품으로 강원도 삼척시의 한 대안학교에서 생활하는 17명 학생들의 성장과 배움의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부터 촬영을 본격 시작했는데, 학교의 협조를 얻고 강원도교육청, 삼척시보건소의 방역 지침을 지키며 진행했습니다 - 편집자 설명
이상한 학교에서 열린 특별한 졸업식 – 존재의 선언
우연히 알게 된 삼무곡청소년마을(삼무곡)에서 졸업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졸업식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강원도 응봉산 골짜기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찍기 시작한 영상이 어떤 다큐멘터리가 될 것인지 알 순 없었지만, 이리저리 잴 것도 없었습니다. 속된 말로 '촉'이 아주 강하게 왔습니다.
삼무곡의 졸업식은 저에겐 특별한 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배움을 다짐하는 뜻으로 서로에게 올리는 삼배, 비로소 배울 수 있게 된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 그리고 선배와 후배가 함께 꾸민 축하 공연까지. 삼무곡을 알고 얼마 안 된 저로서는 신기하기만 한 졸업 행사였습니다.
졸업한 학생은 삼무곡의 나이로 막 한 살이 됩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라도 배울 수 있는 한 살짜리 학생이 됐다는 뜻이죠. 그래서 삼무곡에선 졸업식을 ‘‘존재의 선언식’ 또는 ‘성인식’으로 불립니다. 이런 졸업식을 보고 나니, 삼무곡이 아주 이상한 학교라는 확신이 더 들게 됐습니다.
삼무곡 한 학생의 졸업식(존재의 선언식 또는 성인식)
매일 ‘하루 인생’을 사는 학생들 – 삼무곡청소년마을
삼무곡청소년마을(삼무곡)은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응봉산 자락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2008년 첫 문을 열었는데, 처음엔 ‘삼무곡자연예술학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습니다. 곧 '삼무곡청소년마을'로 이름을 바꿨죠. 학생인 청소년이 스스로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삶의 모델을 만들기 위해, 학교라는 간판을 떼고 대안 공동체로 새롭게 태어난 겁니다. 삼무곡엔 배움과 학생은 존재하지만, ‘학교'라는 명패는 따로 없습니다. 현재 삼무곡에는 모두 17명의 학생이 3명의 교사와 함께 통나무집에서 생활하며 삶을 배우고 있습니다.
배우는 법을 배우는 곳 - 삼무곡
어느 날 통나무집 본관 2층으로 올라가 봤는데, 마치 PC방 같았죠. 한 학생이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노는 게 아니었습니다. 삼무곡의 독특한 교육 커리큘럼인 ‘내 맘대로 살기’ 과정을 체험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곳은 '국영수' 같은 특정 교과목이 아닌, 삶 그 자체를 배우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배우는 법’을 배웁니다. 삼무곡에선 '학교'와 '스승'의 정의가 색다릅니다. ‘배움이 일어나는 모든 자리’가 학교이고, ‘배움을 주는 모든 사건과 사람’이 스승이라고 말합니다.
삼무곡청소년마을 통나무집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하루 인생’은 삼무곡의 배우는 삶을 표현한 생활 철학입니다. 한 번에 하나씩 하나하나 배우며 살아가고, 밤에 잠들 땐 한 움큼의 힘도 남겨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루 인생을 실천하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 예술과 축제입니다. 졸업식이 끝나고 며칠 뒤, 축제가 열렸습니다. ‘월동 축제’입니다.
월동 축제
삼무곡에선 겨우살이를 준비하는 일을 축제라고 부릅니다. 월동 축제 때는 김장과 겨울 땔감을 마련하는 장작 패기를 합니다. 학생들이 함께 모여 김치를 담그고 땔감을 준비하는 데요, 처음으로 도끼질을 하고 고무장갑을 끼고 배춧속을 버무립니다. 마지막에 알맞게 삶은 돼지 수육에 갓 담근 김치를 곁들여 먹었는데요. 그 맛은 어디서도 쉽게 얻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배움이 될까 궁금했습니다. 도끼질을 하던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그 학생은 이것이 ‘수행 명상’이라고 답했습니다. 마치 선문답 같은데, 수행 명상을 하면서 내면의 고요함을 만나곤 하는 걸까요? 학생은 도끼질로 몸을 쓰는 수행 명상을 통해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삼무곡의 17명 학생들은 이렇게 '생활 속에서 각자의 그릇만큼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무곡의 월동축제, 학생들이 김장을 담그고 있다
마법의 인문학 시즌 2 – 마을에 산다
‘마법의 인문학 시즌 2’는 삼무곡의 올해 상반기 프로젝트 수업의 명칭입니다. 지난해 가을 학기에 ‘마법의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수업을 했는데, 경주시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원효대사의 자취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 프로젝트 수업의 연장선이 ‘마법의 인문학 시즌 2’입니다.
삼무곡에선 삶을 바꾸어내는 힘을 ‘마법’이라고 부릅니다. 그 마법이 곧 배움이 되는 것이죠. 진정한 배움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자연스럽게 그 변화는 세상으로 퍼질 것이니, 어디에서도 무엇에게서도 배울 수만 있다면 마법을 부릴 수 있는 힘을 갖추는 것이며 그것이 진정한 배움이라는 것'입니다. 공식을 외우듯 암기한다고,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네요. 이곳에서 1년 가까이 취재하면서 떠오른 생각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학생과 마을주민이 함께하는 '마법의 인문학' 축제 현장
올해 '마법의 인문학 시즌 2'는 역사 속의 원효대사가 아닌 현재를 살고 있는 ‘마법사’를 찾는 과정입니다. 마법사는 가까이 있는데, 바로 삼무곡 주변에 사시는 마을 주민입니다. 조를 짠 학생들이 주민분들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습니다. 누구나 낯선 사람을 만나는 건 두렵고 소통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더욱 그럴 겁니다.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에 학생들은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이야기도 듣고, 일도 함께 하고 식사도 하면서 배움을 넓혀 나갔습니다.
텃밭에서 쟁기를 끌어 이랑과 고랑을 만들어 씨앗을 뿌리고, 계란찜을 만들어 같이 점심을 나누는 이 모든 일상이 깨우침의 과정이 됩니다. 거창하게 '무엇을 배우겠다'가 아니라, 마을 어르신들을 찾아가 말씀을 경청하며 노동과 여가를 함께 나누는 것이죠. 이런 게 공부가 될까 싶지만, 배움은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학기가 끝날 무렵, 학생들은 마을 주민분들과 어울려 보낸 일상을 촬영해 동영상으로 제작하고, 노래도 만들어 마을주민들과 함께 어울리는 축제를 열었습니다. 학생들의 연주와 노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사곡리 마을 어르신들에겐 근래 가장 흐뭇한 마을잔치가 됐을 겁니다. 짧은 봄밤 하늘에 웃음이 퍼집니다.
삼무곡청소년마을에서 생활 중인 학생들. 17명의 학생들이 카메라 앞에 섰다.
막 봉오리가 핀 꽃도 / 조금씩 피어나는 꽃도 / 활짝 만개하는 꽃도 / 마지막 과정을 겪는 꽃도 / 어떠한 과정 속에 머물러 있어도 / 꽃은 꽃이다 / 꽃은 아름답다 / 우리와 같다
노래 : 봄꽃 / 작사 : 삼무곡청소년마을, 작곡 : 바람길, 상화, 연우
1년을 촬영했던 제게 삼무곡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처음엔 아주 이상한 학교라고 여기고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니, 삼무곡은 이상한 학교가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배우는 법을 배우는개성 있는 학교였습니다. 배우는 법을 배운다는 것, 그것이 가장 본질적인 배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무곡청소년마을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은 아닐까요? 학생들이 지은 노랫말처럼, 아이들은 저마다 커가는 과정에 있는 '꽃봉오리'입니다. 어떤 향과 생김새든, 피어 날 꽃봉오리는 다 가치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