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14일 오전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해 4박 5일의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빈자들의 벗’으로 불리며 스스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개혁적 행보를 보이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적극적인 사회 참여도 동시에 강조해왔다.
그런 만큼 세월호 유가족을 비롯해 약자들의 고통이 외면당하고 있는 우리 사회를 향해 어떤 메시지를 던질 것인 지를 놓고 비단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해 3월 즉위한 이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관심을 몸소 실천하는 파격적 행보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물인 프란치스코 교황.
그가 이번 방한을 결정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지난해 10월 20일 천주교 대전교구 유흥식 주교가 보낸 편지 한 통이었다.
교황께서 참석했던 브라질 세계청년대회 참가자는 300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내년에 한국에서 열릴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자는 불과 2천 명, 한국 참가자를 제외하면 천 명입니다. 그래도 와 주시겠습니까?
교황은 “이 편지를 읽고 가슴이 뛰면서 꼭 가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미 2014년 공식 일정이 모두 확정된 상태였음에도 자신의 휴가 기간을 조정해 한국 방문을 추진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와는 별도로 청와대도 교황 방한을 추진하고 있었다. 청와대는 지난해 3월 26일 교황 즉위식에 사절단을 보내 방한을 요청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고, 지난해 10월 9일엔 청와대를 찾은 교황청 추기경을 접견하면서 재차 교황 방한을 요청했다.
이후 유흥식 주교의 편지로 방한이 확정되자 청와대는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청와대의 적극적인 교황 방한 추진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특수성 속에서 종교 지도자의 화해와 평화 메시지를 필요로 한다는 외면적 명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해석을 낳을 여지가 충분했다.
바로 정권 출범과 동시에 불거진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이 정권의 정당성을 위협하고 있던 국면이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첫 해부터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 의혹이 엄청나게 커지고 있던 상황이었죠. 그래서 교황이라는 상징적 인물이 방문해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는 모습을 통해 정부의 정통성 문제를 해소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30년 전 전두환 대통령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한국 방문을 적극 추진했던 것과 유사한 전략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합니다. [한상봉 / ‘가톨릭 뉴스 지금여기’ 주필]
청와대는 지난 3월 10일 교황 방한을 직접 발표했다.
마땅히 천주교 측에서 발표해야 할 사안을 기자단 엠바고까지 요청하면서 청와대가 발표하는 모양새를 취한 것 역시, 교황 방한에 대해 정권 차원의 기대감이 높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그런데 불과 한 달여 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면서 청와대의 기대감은 걱정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교황 방한이 임박한 시점까지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작업은 지지부진하기만 했고, 결국 유가족들이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되는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했는데, 문제는 그 장소가 교황이 미사를 집전해야 할 광화문 광장이라는 것이었다.
여야가 느닷없이 13일까지 특별법을 처리하자고 합의한 데는 이유가 있었던 거죠. 박근혜 정부 입장에선 14일에 교황이 오기 전에 세월호 특별법 논란을 어떻게든 타결을 하고 싶었던 거예요. 어떤 내용으로든 타결만 하면 세월호 유족들을 광화문 앞에서 철수시키고 깨끗이 정리된 상태에서 교황을 맞이하고 싶었다고 봐야 겠죠. [한상봉 / ‘가톨릭 뉴스 지금여기’ 주필]
그러나 여야의 ‘밀실야합’이라는 비난 여론이 강하게 일며 특별법 처리는 결국 무산됐다. 이러자 정부가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 농성 중인 유가족을 강제 퇴거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그러나 천주교 측은 “눈물 흘리는 사람을 내쫓고 예수님께 사랑의 성사인 미사를 거행할 수는 없다”며 농성장을 그대로 유지할 방침을 분명히 했다.
결국 교황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된 세월호 유가족들은 절실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 사건은 저만의 사건이 아닙니다. 생명보다 이익을 앞세우는 탐욕적인 세상, 부패하고 무능하며 국민보다 권력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부라는 인류 보편의 문제입니다. 교황께서 관심을 가져주시고 우리 정부를 압박해 주십시오. 그래서 힘이 없어 자식을 잃고 그 한도 풀어주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구해주십시오. [김영오 / 세월호 참사 희생자 김유민 학생 아버지]
이러자 다급해진 건 집권 여당이었다. 새누리당 이군현 사무총장은 지난 12일 원내대책회의에서 “25년 만의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세월호 특별법투쟁의 계기로 삼으려 하는 등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며 미리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늘 현실 참여를 강조해 왔던 교황은 기꺼이 정치적 논란의 한복판에 뛰어들 것임을 분명히 했다. 세월호 유가족 말고도 국가권력이 외면한 우리 사회의 여러 사회적 약자들과의 만남을 약속한 것이다.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과 용산참사 유가족들, 평택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그리고 탈북자들.
하나 같이 우리 사회의 아픔을 대변하는 사건의 당사자들, 그러나 망각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던 사람들이다.
용산 참사 직후엔 정부와 정치인들이 모두 나서서 모든 걸 바꿀 것처럼 얘기했지만 6년이 지난 지금 바뀐 건 하나도 없어요. 정부가 교황님의 메시지를 잘 실천해서 이제는 좀 다른 모습으로 바뀌길 바랍니다. [이충연 / 용산참사 유가족]
온갖 탄압 속에서 쫓겨나는 형태의 삶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데 대부분의 국민들이 제대로 알지 못 하고 계세요. 이번 기회에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삶들을 모두가 돌아볼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고권일 /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대책위원장]
우리 정치가 저희 같은 노동자들이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해온 현실이 너무나 분노스럽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에 맞춰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편지도 쓰고 만남을 준비해 왔습니다. [김득중 /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장]
국가로부터 외면당한 사회적 약자들이 교황의 권위에 의지해서라도 절박함을 타개하려는 현실은 그만큼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적 시스템이 취약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방한 기간 중 교황의 발언과 행보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사회가 어떤 수준에 와 있는 지를 돌아보고 성찰하도록 하는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교황이 전달할 메시지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이 모든 문제를 풀어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아픈 문제들은 누가 뭐래도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역량과 지혜로 풀어야 합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숙제가 남아 있고, 그걸 풀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오창익 / 인권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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