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남과 북의 대표단이 만나 회의하는 곳' '한국을 찾는 외국 관광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
이 정도가 대다수 사람이 알고 있는 판문점이다. 판문점이 남과 북, 두 개의 주소를 가지고 있고 그래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소수만 알고 있다.
판문점이 언제 어디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판문점의 변천사는 무엇인지, 판문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뉴스타파필름이 제작한 4K 다큐멘터리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3화 판문점'은 전쟁의 참상과 증오 속에서도 대화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던, 우리가 몰랐던 판문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 (왼쪽부터 순서대로) 김일성, 팽덕회, 마크 클라크가 서명한 정전협정문. 한국군 대표는 서명을 거부했다.
한국전쟁 당시 끝이 없는 살육전을 멈추기 위해 유엔군과 북한군이 대화와 협상을 처음 시작한 시점은 1951년 7월이었다. 같은 해 봄 이미 전선은 38선 인근에 고착된 상태였다. 6.25전쟁 발발 1년 만에 전쟁을 끝낼 첫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그러나 51년 7월 끝날 수 있던 전쟁은 2년 더 계속된다. 양측이 정전협정문에 서명하기까지 모두 765차례나 회담이 열릴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1951년 7월 유엔군과 북한군 대표가 정전회담을 위해 처음 만난 장소는 '내봉장'이라는 개성의 한 고급 식당이었다. 하지만 한반도에 주둔한 외국 군대 철수와 군사분계선 설정을 두고 양측이 격렬히 맞서며 협상은 표류했다.
그해 9월 양측은 회담 장소를 옮기기로 합의하고 개성 아래 '널문리' 벌판에 천막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아는 판문점의 시작이다. 1951년 10월 25일부터 양측은 판문점에서 협상을 재개한다. 새 회담장에서 양측은 협상에 큰 진전을 봤다. 잠정적인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정에 합의했다. 하지만 결국 포로교환 문제를 두고 충돌했다.
제네바 협정은 전쟁이 끝난 뒤 모든 포로를 원래 소속 국가에 무조건 돌려보내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유엔군 측과 북한군 측이 주고받은 포로 명부에 따르면 교환할 포로 수에 큰 차이가 있었다. 유엔군 명부에는 공산군 포로 13만 명이었던 반면 공산군 측이 전달한 명부에는 유엔군 포로가 1만 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포로교환을 심리전의 일부로 여긴 미군은 여기서 승리할 방법을 꾀했다. 제네바 협정에 따른 무조건 송환이 아닌 자원 송환 제도를 시행해 체제 우위를 선전하려 한 것이다. 중국과 소련 역시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협상이 난항을 겪는 동안 전쟁은 계속됐다. 교착 상태의 전선에는 젊은 병사의 시신이 쌓여만 갔다. 이 기간 양측은 정전 협상의 실패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는 삐라를 제작·살포한다.
▲ 협상 타결 시점이 다가오자 북한이 정전협정 서명식을 진행할 조인식장을 판문점에 세웠다.
오랜 진통 끝에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 모인 유엔군 측 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북한·중국군 측 대표 남일 대장은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서명 12시간 후인 그날 밤 10시, 마침내 정전협정이 발효되고 한국전쟁의 포성은 멈췄다. 하지만 그날 이후 완전한 전쟁의 종식이 아닌, 정전 상태가 무려 68년이나 이어지고 있다.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3화 판문점'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군사분계선이 확정되며 판문점은 공동경비구역 안으로 다시 한번 이전했다. 또한 초기에 1,292개의 표지판으로 구획됐던 점선 형태의 군사분계선은 이후 한반도 동서 250km를 가로지르는 선형의 철책으로 바뀌었다.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3부 판문점'은 전쟁을 멈추기 위해 남과 북이 머리를 맞댔던 곳이자 분단 이후 대결과 대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던 공간, 판문점의 이야기를 미공개 영상 자료 등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