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법 위반자' 김영호는 어떻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을까

2023년 07월 12일 14시 00분

● 전두환 정권 때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극우 뉴라이트로 급선회
 미국 유학? ‘김영호의 동지들’은 여권도 못 만들었다
 ‘노태우 비서 노재봉’이 ‘김영호 신원보증’ 섰다는 말이 돌았다
 김영호, 저서에 “노재봉 선생님께 커다란 지적 영감을 받았다”
 ‘박근혜 탄핵 부정’ 김영호, ‘박근혜 탄핵 세력’과 손잡다
윤석열 대통령이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를 신임 통일부 장관 후보로 지명했다. 국회 인사청문회는 오는 21일 열린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에 보낸 인사청문 요청사유서에 이렇게 적었다.
“후보자는 통일문제 및 국제관계 전문가로서의 학문적 지식, 현 정부 통일정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통찰력을 바탕으로, 정부의 통일 정책과 남북관계를 책임있게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음.”
또 이렇게도 썼다.
“통일비서관으로 재직하면서 통일정책 및 남북관계 전반에 대한 전략 및 정책 수립에 관여하는 한편, 북한의 계속된 도발과 위협에 대해서는 원칙있고 일관된 입장으로 대처함으로써 자유와 인권 등 보편적 가치에 기반을 둔 남북관계 정상화를 위해 맡은 바 소임을 다했음.”
김영호 내정자가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재직한 건 남북관계가 역대 최악이던 이명박 정부때였다. 그가 통일비서관이던 2011년의 남북관계는 특히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2011년 2월, 남북군사실무회담이 아무런 합의없이 종료됐다. 5월에는 북한의 국내 금융기관 전산망 해킹 의혹이 불거져 남북관계가 경색됐다. 6월에는 북한 국방위원회가 ‘남북 비공개 접촉’ 사실을 공개해 이명박 정부를 국제적으로 망신줬다. 북한은 “2011년 5월 9일부터 북남이 비밀접촉을 진행했는데, 남한이 천안함·연평도 사건과 관련 ‘북측에서 볼 때는 사과가 아니고 남측에서 볼 때는 사과처럼 보이는 절충안을 만들자’고 북한에 애걸했고, 장관급회담과 정상회담도 구걸했다”고 했다.
그 해 7월에는 북한이 금강산국제관광특구 내 모든 남한 자산을 처분한다고 선포했고, 다음 달 관련 법률 시행 사실을 발표했다. 10월에는 대북방송 문제가 터져 갈등이 커졌다. 12월 김정일이 사망한 뒤 남북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 들었다. 김정일이 사망하고 2주쯤 후인 12월 30일, 북한은 국방위원회 성명을 통해 “이명박 역적 패당과는 영원히 상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통일정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통찰력’, ‘소임을 다했다’ 같은 윤석열 대통령의 립서비스와는 하나같이 어울리지 않는 일들이었다.
통일부장관에 내정된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 (사진:연합뉴스)

국가보안법 위반자에서 뉴라이트로 전향

김영호 후보 관련 지금까지 나온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극우적 대북관’과 ‘음주운전 전력’이다. 김영호는 일단 음주운전 전력에 대해서는 시인하고 사과했다.
김영호는 오랫동안 남북관계를 적대적 관계로 규정하며 북한 체제 파괴를 통한 북핵 문제 해결, 남한 자체 핵무장론 등을 주장해 왔다. 2019년 4월 18일 인터넷 매체 ‘펜앤드마이크’ 기고 내용은 그의 대북관을 잘 보여준다. 그는 기고문에 이렇게 썼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북한이 주장한 현실성 없는 ‘1국가 2체제’ 연방제 통일방안에 휘둘려왔다. 2000년 6월 남북공동선언은 북한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과 남한의 국가연합제안이 유사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실현가능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선전과 선동에 완전히 놀아난 것이었다…김정은 정권이 타도되고 북한 자유화가 이루어져서 남북한 정치체제가 ‘1체제’가 되었을 때 통일의 길이 비로소 열리게 된다.” (‘펜앤드마이크’ 기고문 중 일부 / 2019. 4. 18)
‘김정은 정권 타도’와 ‘북한 자유화’, 사실상의 ‘강압적 흡수통일론’이다. 김영호는 2000년대 중반 뉴라이트 학자 모임인 ‘뉴라이트 싱크넷’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식민지 근대화론’ 등을 골자로 한 ‘대안 교과서’ 집필 세력인 ‘교과서포럼’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1980년대 20대 청년 김영호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자다.
1984년, 김영호는 사회과학출판사 ‘녹두’를 설립해 대표를 맡았다. ‘녹두’는 세계철학사, 그람시의 혁명 전략, 계급론, 그리고 무크지 ‘녹두서평’ 등을 내던 진보 성향의 출판사였다.
1987년 4월 김영호는 제주 4.3항쟁을 다룬 시 ‘한라산’(시인 이산하)을 녹두서평 1호에 게재하고, 소련 과학원철학연구소가 발간한 세계철학사 일본판을 번역해 출판한 ‘용공이적’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됐다. 세계(대표 윤후덕), 동녁(대표 이건복), 사계절(대표 김영종), 거름(대표 강경철) 같은 사회과학출판사 대표들과 함께였다. 같은 해 10월 김영호는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지검 공안부는 28일 좌경서적에 대한 일제 수사에 나서 도서출판 <세계>사 대표 윤후덕 씨(30) 등 5개 출판사 대표 또는 편집인 등 5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이적표현물제작배포) 혐의로 구속했다.
◇구속자 ᐃ윤후덕 ᐃ이건복(33, 동녁대표) ᐃ김영종(32, 사계절출판사대표) ᐃ김영호(27, 녹두출판사대표) ᐃ강경철(26, 기획출판거름사 편집인)

동아일보 / 1987.4.29
서울형사지법 박병휴 판사는 19일 <세계철학사>, <녹두비평> 등 이념 서적을 출판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녹두출판사 대표 김영호 피고인(28)과 전무 신형식 피고인(28)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 각각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과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에 집행유예 3년씩을 선고했다.

경향신문 / 1987.10.20
1987년 10월 20일 김영호 녹두 출판사 대표 등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선고 내용을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
집행유예로 출소한 이후 김영호는 미국으로 출국해 보스턴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버지니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귀국해 세종연구소 상임객원연구위원(1998~1999년), 성신여대 교수(1999~현재)를 지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출판·사상의 자유가 없던 시절, 국가보안법으로 실형을 선고 받았던 김영호는 어떻게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자’가 ‘미국 유학’을 떠나다

지금도 그렇지만, 1980년대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에게는 ‘자격정지’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사회생활을 못 하게 손발을 묶는 형벌이었다. 이 처분을 받은 사람은 기업의 임원도, 공무원도 될 수 없었고, 선거에 나갈 수도 없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자들에게는 이 조항이 더욱 가혹하게 적용됐다. 공무든 여행이든 해외에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1987년 김영호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감옥에 갈 당시 ‘출입국관리법’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대한민국 국민의 출국을 금지할 수 있었다.
제4조 (출국의 금지) ①법무부장관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에 대하여는 출국을 금지할 수 있다.
1. 그 출국이 대한민국의 이익을 현저하게 해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
2. 범죄의 수사를 위하여 그 출국이 부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
②출입국관리공무원은 출국심사를 함에 있어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출국이 금지된 자를 출국시켜서는 아니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바로 ①항의 1. ‘대한민국의 이익을 현저하게 해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 출국을 금지’한다는 조항이다. 이 조항은 고무줄이나 다름없었다. ‘해할 염려’, 즉 예측만으로 누구든 출국을 금지할 수 있어 ‘도깨비 방망이’나 다름없었다. 용공 이적 표현물을 출판한 혐의로 감옥살이를 한 김영호에게 ‘유학’이나 ‘출국’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던 이유다.
뉴스타파는 김영호와 같은 시기 사회과학출판사를 운영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감옥에 갔거나 출판사 허가 취소 등을 당했던 사람들에게 연락해 당시 상황을 물었다. 모두 전두환 정권 때인 1985~1987년 사이 김영호 후보자와 같은 고초를 당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국가보안법으로 실형을 받은 뒤 오랫동안 해외 출국을 못했고, 여권을 만들 수도, 비자를 받을 수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김영호의 동지’들은 여권도 못 만들었다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기조실장을 지낸 신형식 씨는 1987년 당시 녹두출판사의 전무 겸 편집장이었다. 김영호와 함께 구속됐다. 김영호와 같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였다. 신형식은 같은 해 10월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출판사 대표였던 김영호보다 조금 낮은 형량이었다.
출소 이후 신형식은 김영호와 달리 외국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에게 걸린 출국금지 조치는 199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풀렸다. 신 씨는 최근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199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북페어에 참가하려고 했는데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아 나갈 수 없었다. 1995년에야 국회의원의 도움을 받아 독일에 갈 수 있었다. 그 전에는 출국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출판사로 유명한 동녁 출판사의 이건복 대표도 마찬가지였다. 이건복 대표는 1987년 4월 김영호와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징역 3년, 집행유예 3년에 자격정지 처분도 받았다. 이 대표 역시 출소 후 여권을 만들 수 없었다. 아니 대한민국 정부가 여권을 내 주지 않았다. 여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검찰에 들어가 ‘각서’를 써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도 단수 여권만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이 대표는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검찰에 가서 ‘꼭 귀국하겠다. 과거 범죄를 반성하고 뉘우친다. 북한에 넘어가지 않겠다. 북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겠다. 우리나라에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등이 적힌 각서를 써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단수여권을 내줬습니다. 난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각서는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국 외국에 못 나갔습니다. 1995~1996년이 되서야 그런 게 없어졌습니다.” (이건복 동녁출판사 대표)
이건복 대표는 1980년대 녹두출판사를 운영하던 20대 청년 김영호를 “이론적 근거를 잘 대던 사람, 맹장, 아주 강건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김영호 신임 통일부장관 후보자(왼쪽)와 김홍일 신임 권익위원장 (사진:연합뉴스)

“노재봉이 김영호 신원보증을 섰다는 말이 돌았다”

1987년 9월 29일 동아일보에 “피고는 아끼던 제자”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녹두출판사 대표 김영호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재판을 중계한 기사였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1987년 9월) 28일 오후 서울형사지법 제111호 법정. 스승과 제자가 법정의 증언대와 피고인석에 앉아 마주보고 있었다. 증언대에 나온 스승은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인 김학준 서울대 교수. 증언대 바로 밑 피고인석에는 김교수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파리한 모습의 김영호 피고인(28,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이 앉아 있었다.” (동아일보 / 1987.9.29)
김학준이 속했던 민정당(민주정의당)은 전두환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만든 정당이었다.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를 지낸 김학준은 전두환 정권에서 민정당 국회의원을, 노태우 정권에서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과 대변인을 지냈다. 2000년대 이후엔 동아일보 대표와 회장, 인천대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87년 9월 김학준은 김영호 재판에서 ‘피고인 김영호’의 선처를 요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통일논문 현상모집에 당선된 김 군이 인사를 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 군이 남북관계와 민족의 평화적 통일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음을 알게 된 뒤 졸업때까지 격려해 주며 절친하게 지냈습니다. 김 군은 남북의 평화공존과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강조했었고 저도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학준 법정 증언 / 동아일보, 1987.9.28)
국가보안법 위반자이자 좌경 용공 출판인이었던 김영호가 출소 직후 어떻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는지는 미스터리다. 앞서 소개한 신형식, 이건복 같은 ‘출판계 동지들’은 누리지 못한 혜택을 그는 어떻게 받았을까. 혹시 재판에 나와 선처를 요구해 준 은사, ‘전두환-노태우를 도운 김학준’의 덕이었을까. 하지만 ‘1980년대 출판인 김영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지목했다. 바로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였던 노재봉 전 국무총리다. 노재봉은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보좌관(1988년), 대통령 비서실장(1990년), 국무총리(1990~1991년)를 지냈다. 김영호가 유학을 떠난 건(1989년) 노재봉이 청와대 보좌관을 하던 때였다.
이건복 동녁 대표는 “노재봉 교수가 소개하고, 신원보증을 해 줘서 김영호가 미국에 유학갔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했다. 김영호와 함께 녹두출판사를 운영한 신형식도 “노재봉이 김영호의 은사다. 노재봉이 게런티(신원보증)해서 유학을 간 것이 아닌가, 노재봉으로 인해 (김영호의 사상이) 바뀐 것이 아닌가 싶다. 노재봉 교수가 배후에서 활약을 했을 것 같다”고 했다. 김영호와 비슷한 시기 사회과학출판사 ‘이삭’을 운영해 여러차례 고초를 겪었던 소병훈 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영호가 노재봉의 수제자였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에 ‘노재봉 교수가 김영호를 설득한다, 김영호가 노재봉 교수 주선으로 유학을 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소병훈 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전 출판사 ‘이삭’ 대표)
좌파 용공 소리를 듣던 ‘진보 지식인’, ‘진보 출판인’이 느닷없이 극우 뉴라이트로 변신한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로부터 탄압받아 구속된 전력이 있는 사람이 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에 부역한 교수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다는 증거와 증언이 나오는 것도 역시 기이하다.

“노재봉 선생님께 커다란 지적 영감을 받았다”

김영호와 스승 노재봉의 인연은 깊다. 대학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난 것 외에도 김영호의 생애 전체에 관여돼 있다. 노재봉과 김영호는 책도 여러 권 같이 냈다. ‘’대한민국 건국 60년의 재인식’(2008), ‘정치학적 대화’(2015), ‘한국 자유민주주의와 그 적들’(2018)이다.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면서 동시에 ‘사상적 동지’인 것이다. 김영호는 여러 학자들과 공저한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2015)에서 스승 노재봉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노재봉 선생님으로부터 커다란 지적 영감을 받았다. 항상 격의없는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많은 도움을 주신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또한 저자는 노재봉 선생님과 함께 지난 2년여 전부터 매주 진행하고 있는 ‘다스림 세미나’에서도 이 책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김영호 /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 서문, 2015년)
뉴스타파는 우익 지식인으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노재봉 전 총리에게 전화해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이 있는 김영호는 어떻게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나”, “혹시 김영호의 유학을 도왔나” 등을 물었다. 노재봉은 “다 지난 일이다. 말할 것이 없다”고만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참고로, 노재봉은 2021년 10월 30일 노태우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학살, 이어진 군사독재를 미화하는 듯한 발언을 해 논란이 됐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정규 육사 1기생들에 대해) 국민의 문맹률이 거의 80%에 해당하던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현대 문명을 경험하고 한국에 접목시킨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에게 한국 정치는 국방의식이 전혀 없는 난장판으로 인식됐다. 이것이 그들(육사 1기생)로 하여금 통치기능에 참여하는 계기였다. 이는 이 1기생 장교들의 숙명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을는지도 모르겠다.”(노재봉 '노태우 장례식 추도사' / 2021.10.30)
지난해 대선 전후엔 조선일보,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권을 계승하는 측이 승리하면, 대한민국의 존재 이유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이 좌파 혁명에 대해 투쟁하는 최전선에 스스로 나섰다.”, “대한민국이 제대로 나가기 위해선 (야당 등과) 협치를 하면 안 된다” 같은 주장을 하기도 했다.
국무총리 시절 노재봉 모습 (1991.1.25) (사진:연합뉴스)

‘박근혜 탄핵 부정’ 김영호, ‘박근혜 탄핵 세력’과 손잡다

통일부장관 후보로 지명된 뒤, 김영호의 대북관, 통일관, 역사관은 이미 논란거리로 자리잡았다. ‘흡수통일론’, ‘북한 체제 붕괴론’ 등을 대 놓고 설파해 온 것을 불안해 하는 목소리다. ‘평화통일’이란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주장도 나온다. 뉴스타파는 어제 김영호가 그간 낸 책을 분석해 그의 위험한 대북관과 통일관을 자세히 분석, 보도했다.
김영호의 대북관, 통일관, 역사관은 몇 개의 키워드로 분석된다. 이승만과 박정희, 북한=적(敵), 흡수통일 같은 것들이다. 김영호는 자신이 낸 책에서 “북한은 우리의 실존적 적", "김구는 김일성에 역이용 당해…1948년 민주혁명을 이끈 지도자는 이승만", "남북한, 서로 떨어져 지내는 게 낫다", "박근혜 탄핵은 '국회 독재' 정당화시켜 준 잘못된 판결"이라 주장했다.
아래는 김영호가 자신의 책에서 ‘박근혜 탄핵’를 평가한 내용이다.
“촛불 든 국회의원들의 행위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파괴하고 전체주의에 동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은 '국회 독재'를 정당화 시켜 주는 잘못된 판결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한국 자유민주주의와 그 적들' / 2018년)
김영호의 ‘사상 전향’ 만큼이나 놀라운 건 그가 지난 정부 당시 그토록 비판해 마지않던 ‘탄핵 세력’이 중심이 된 정권에서 장관 후보자가 됐다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에 마중물을 댄 ‘박근혜 특검’의 수사 책임자였고, 그를 떠받쳐 줄 국민의힘과 내각 역시 ‘박근혜 탄핵’에 힘을 보탠 사람들이 현재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한동훈 법무장관(‘박근혜 특검’ 검사), 이진복 대통령실 정무수석(박근혜 탄핵 찬성), 권성동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박근혜 탄핵 찬성), 장제원 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비서실장(박근혜 탄핵 찬성), 이철규 국민의힘 사무총장(박근혜 탄핵 찬성),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박근혜 탄핵 찬성)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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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