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처럼 '혼동, 혼재' 반복한 정종범 부사령관

2024년 07월 23일 18시 41분

채해병 사망 원인 '수사 외압' 의혹과 관련 당시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직접 받았던 정종범 전 해병대 부사령관(현 해병대 2사단장)이 23일 군사법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정 전 부사령관은 수사 외압 및 항명 의혹 사건의 핵심 증거인 '장관 지시 사항 메모'의 작성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누가 지시했냐'는 질문에는 "기억이 안 난다"며 시종일관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날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는 항명 및 상관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에 대한 6차 공판이 진행됐다. 정 전 부사령관은 앞서 두 차례의 공판에 불출석해 군사법원으로부터 300만 원의 과태료 처분을 받고 나서야 법정에 나왔다. 본격 증인 신문에 앞서 정 전 부사령관은 위중한 안보 상황 등을 언급, "증언을 기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며 재판부에 과태료 처분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정종범, 시종일관 "기억 안 난다"

2023년 7월 31일,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은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 등을 주요 혐의자로 적시한 해병대 수사단의 언론 브리핑 일정을 갑자기 취소한다. 이른바 수사 외압 의혹이 처음으로 외부로 드러난 시점이다. 언론 브리핑은 물론 국회 상임위 보고, 수사 결과 경찰 이첩 등 예정된 절차를 모두 취소시킨 이종섭 장관은 오후 1시 30분, 관련자들을 모아 긴급 회의를 주재한다. 정종범 전 부사령관은 이종섭 국방부 장관이 주재한 긴급 회의에 참석한 유일한 해병대 관계자였다. 
정 전 부사령관은 당초 계획됐던 국회 보고를 위해 서울 여의도에 있었기 때문에 용산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해병대 최고위직 간부로서,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을 대신해 국방부 회의에 참석하게 됐다. 
그리고 정 전 부사령관은 당시 회의 석상에서 언급된 장관의 지시 사항을 ‘메모’로 남긴다. 정 전 부사령관의 메모는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의 항명혐의를 수사한 국방부 검찰단 또한 주요 증거물로 판단했는데, 정 전 부사령관은 국방부 검찰단 1회 조사에서 메모 내용이 모두 장관의 지시라는 취지로 진술했다. 
10가지 지시 사항은 ①최종 정리(법무), ②원래 수사는 수사 결과가 나오면 언론 함(이하 생략), ③장관, ‘8월 9일’ 보고, ④유가족, 민간경찰 오해 받으시지 않으면, ⑤ 누구누구 수사 언동하면 안됨, ⑥휴가처리 난 후 공식적 휴가 조치, ⑦사람에 대해 조치 혐의는 안됨, ⑧언론보도 관련 경찰의 공정한 수사에 영향을 줄 수 있음,  ⑨경찰에 필요한 수사 자료만 주면 됨, ⑩ 법무관리관이 수사단장에게 전화/ 검토 등이다.
사진 : 정종범 전 부사령관 메모
정 부사령관의 메모가 중요한 이유는 이 메모를 통해 지난해 7월 31일 돌연 이첩 보류 직후 이종섭 장관이 해병대 측에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전 부사령관은 국방부 검찰단의 추가 조사에서는 ‘누구누구 수사 언동하면 안됨’ 등 논란이 된 일부 메모 내용이 장관의 지시사항이 아니라며 진술을 번복했다. 정 전 부사령관 메모가 언론에 알려지면서, ‘이종섭 장관이 해병대 수사단의 수사에 부당하게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이후였다. 
정 전 부사령관은 장관 지시사항을 직접 들은 장본인이기에, 박정훈 대령의 6차 공판에서도 해당 메모를 작성하게 된 경위가 주요 쟁점이 됐다. 그러나 정 전 부사령관은 총 10가지 지시 내용 중 어떤 것이 장관의 지시고, 어떤 것이 당시 동석한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의 지시였는지 정확하게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는 "기억이 혼동된다", "혼재되어 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박 대령의 변호인이 "최종적으로는 장관이 지시한 게 맞지 않냐"고 물었지만 "지시한 것도 있고 설명한 것도 있다"는 식으로 즉답을 회피했다. 변호인 측에서 "결국은 장관이 법무관리관이랑 상의를 했든 어쨌든 간에, (장관이) 지시를 한 건 맞지 않냐", "법무관리관의 지시를 메모한 건 아니지 않냐"는 질문이 이어졌지만 계속해서 법무관리관의 부연한 내용이 메모에 포함됐다는 취지로 말했다. 
국방부 검찰단에서 진술한 내용을 번복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정 전 부사령관은 명확하게 해명하지 못했다. 박 대령 측 변호인이 정 전 부사령관에게 국방부 검찰단에서 한 1, 2차 조사와 이날 재판에서의 진술이 내용이 서로 다르다고 지적하자 그는 "저도 갑갑하게 생각한다", "장관과 법무관리관이 대화하는 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여전히 혼동된다", "당시 들리는 대로 메모를 써버려서 (발화자가) 누군지 정확히 인식이 안 된다. 여전히 헷갈린다","지금도 혼동이 있다"고 말했다. 
재판부 또한 정 전 부사령관에게 10가지 지시사항 중 발화자가 장관인 것을 명확하게 짚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정 전 부사령관은 1번(최종 정리(법무))과 3번(8월 9일 보고), 6번(휴가처리 난후 공식적 휴가 조치)은 명확히 장관의 지시 사항이었고 나머지는 장관과 유재은 법무관리관 간 대화여서 불분명하다고만 답했다. 
정 전 부사령관은 앞서 지난 19일 국회 법사위에 출석해서도 자신이 작성한 메모 내용과 관련해 "장관의 지시한 내용도 있고 어떤 부분은 토의 와중에 적은 것도 있다"고 밝혔다. '누구누구 수사 언급하면 안됨'이라는 대목과 관련해 임성근 사단장을 혐의자에서 빼라는 장관의 지시를 적은 게 아니냐는 국회의원의 질의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강하게 부인한 바 있다. 

"임성근 분리파견 취소, 누가 지시했는지 몰라"

10가지 지시사항 중 6번, '공식적 휴가 조치'라는 대목도 논란이 됐다. 문맥 상으로는 임성근 당시 1사단장에 대한 휴가 조치를 장관이 지시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임성근 사단장에 대해서는 채수근 해병의 사망에 대한 문책성 조치로 보직에서 물러나게 한 뒤 분리 파견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장관의 이첩 보류 지시와 함께 파견 명령 또한 취소됐고 실제로 임 사단장은 보직을 유지한 채 휴가 상태로 전환됐다.
사단장 분리 파견 '취소' 명령을 장관이 내렸다면 처음부터 임성근 사단장을 혐의자에서 빼기 위해 장관이 사건의 이첩을 보류시킨 게 아니냐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이종섭 전 장관은 자신이 이첩 보류 명령을 내린 이유는 해병대 수사단의 수사 결과에 다른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뿐, 임성근 사단장을 혐의자에서 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강변하고 있다. 
하지만 정 전 부사령관은 이런 취지의 변호인단의 신문에 "장관이 (사단장에 대한) 공식적 휴가 조치를 언급했다"면서도 "파견 취소 명령은 누가 내렸는지 모른다", "장관이 지시한 바는 없다"고 말했다.

"8월 9일, 무슨 의미인지 몰라"

이날 재판의 또 다른 쟁점은 10가지 지시 사항 중 3번, '이첩을 8월 9일 이후로 미루라'는 것이었다. 8월 9일은 윤석열 대통령이 여름 휴가에서 복귀하는 날이어서, 이첩 보류에 윤 대통령이 관여되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이 지시가 내려졌을 때는 7월 31일이라, 8월 9일은 회의 날짜로부터 열흘이나 뒤였다. 
사건 경찰 이첩을 며칠 씩이나 뒤로 미루는 것에 대해서는 정 전 부사령관도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8월 9일'이 적힌 메모 옆에는 정 전 부사령관이 물음표 세 개를 덧붙인 흔적이 있다. 
이에 대해 정 전 부사령관은 "날짜가 (회의 당일로부터) 너무 멀어서, '왜 이렇게 (이첩을) 멀리 하지?' 해서 물음표를 쳤다. 가까이 하지 않고(이첩을 가까운 날짜로 미루지 않고)..."라고 말했다. 메모 자체는 "장관님께서 9일 정도에 (수사 결과를 다시) 보고 받길 원하신다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8월 9일이라는 날짜의 의미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대통령 격노설에 대해서도 들은 바 없고, 전혀 모른다는 입장이었다. 

"사령관이 이첩보류, 명령했는지 기억 안 나"

박정훈 대령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도 있었다. 정 전 부사령관이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의 '이첩 보류 지시'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한 것이다. 항명죄로 기소된 박정훈 대령은 자신의 상관인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 이첩 보류를 명확하게 지시한 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부의 외압을 받은 해병대 사령관이 해병대 수사단장인 자신에게 명확하게 이첩 보류를 지시하지 않은 채 고민을 반복했고, 이에 박 대령 자신은 원래 계획대로 경찰에 사건을 이첩한 것이므로 항명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정 전 부사령관은 재판 초기에는 변호인들의 신문에 김계환 사령관이 정확하게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재판이 후반부로 접어들고 재판부에서 '사령관이 정확하게 어떻게 박정훈 대령 등에게 지시했냐'는 취지로 재차 "'이첩 보류를 하자'라고 사령관이 이야기 했던 것 같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고 했다. 
정 전 부사령관은 "이첩 보류를 하라는 명시적 명령은 8월 2일 아침에 들은 적이 있다"고 했고, 이에 재판부가 "그 이전에는 듣지 못했냐"고 묻자 "기억이 안 난다. (사령관이) 명령조로 했었는지, 대화식으로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이날 출석 예정이었던 박진희 당시 국방부장관 보좌관은 재판에 불출석했다. 재판부는 “(불출석에) 정당한 이유가 보여지지 않는다”며 “다음에도 불출석하면 법에서 정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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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강혜인 조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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