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다큐] 윤석열의 내란-계엄을 막은 사람들
2024년 12월 22일 19시 50분
이영교 씨는 이곳이 어쩌면 집보다 더 편안합니다. 수많은 억울한 죽음들이 사진으로 걸려있는 집안 벽면 한 켠에 그녀의 남편 인혁당 사형수 하재완이 있습니다.
[이영교] “목욕 간다고 나가더라고요. 목욕 간다고 하면 보통 등산가방 비슷한 데에 옷 다 넣어 나가잖아요 나가는데 그 안에 자기 속옷이 있는지 나는 모르지. 그러니까 밥 하는 아가씨보고, (내가) 젖 먹이고 있으니까, 내 목욕 갔다 올게 아주머니 깨우지 마라, 아주머니 깨우지 마라 하고 나가셨어. 그래가지고 들어올 줄 알았더니 그날부터 안 들어오더라고요.”
남편들은 그렇게 목욕을 가듯이 회사에 출근하기도 했고 친구를 만나러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며칠 후 상상도 못한 내란음모의 주범이 돼 버렸습니다.
[강순희 (80)] 故 우홍선의 부인] “아침에 그이는 출근하고 난 집에 있는데 정부요원들이 딱 달려드는 거예요 난 들어오라고, 다 조사하라고 뭐.. 갈현동 집 있는데 그 위에까지 다 올라가서 다락에 가서 책이고 뭐고 다 보고, 이 집은 뭐 책도 없네 어지간한 집은 가면 책만 좀 이상하면 가져가서 증거다 하는데 책도 없네, 이러고 내려오더라고. 내려오더니 그 라디오, 본인(남편)은 사온 사람은 보지도 못 했어. 내가 아침에 FM 틀어놓고 있는데 그걸 가져가서 그게 (간첩) 증거야.” (북한 방송 청취요?) “예, 들었다 청취했다, 증거예요.”
@ 황산덕 당시 법무부 장관 기자회견 1975년 2월 24일
“황산덕 법무부 장관은 인혁당은 대한민국을 폭력으로 전복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할 목적으로 북한괴뢰의 지령에 따라 조직되고 활동한 반국가단체라고 밝혔습니다.”
스물 한 살에 만났던 국군장교. 3년을 연애하고 결혼 해 1남 3녀를 낳아 기르고 18년을 같이 살았던 사람. 그 남편은 간첩의 오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강순희 (80)] 故 우홍선의 부인] “시신을 찾으러 가야되는데 우리 딸이 열여덟살, 그때 열여덟살 먹은 딸이.. 우리 제부가 가려고 그러는데 그 친척의 친, 그게 아니니까 딸을 데려간 거예요.. 날 데려갈 수가 없어서.. 그 데려가서 찾아가지고 아버지 시신 보고.. 찾아가지고 나왔는데..”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김진생 씨는 운구차를 경찰에 탈취 당하고 화장된 남편의 유골만을 받아야 했습니다.
[김찬수 대구경북 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정부에선 용납을 안 한 거죠. 그래서 정보기관에서 사람을 시켜서 밤에 몰래 이 묘비를 빼가서 부숴서 버려 버렸어요. 20년간 이 자리에 묘비가 없이 다른 묘는 다 묘비가 있는데 묘비가 없이 무명이 묘로 있었죠.”
하루아침에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아내와 아이들. 삶은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악몽같은 현실이 믿기지도 않았습니다. 죽고 싶어도 어린 자식을 두고 차마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강순희 (80)] 故 우홍선의 부인] “석달 정도 집에 누워 있었어요. 집에 누워 있으면서 방문 열어 놓고 4월 9일이니까 그렇게 있다 보니까 날부터 대문이고 방문(이고) 열어놓고 박정희 살인마 천발을 받으라...” (사형 이후에, 돌아가신 이후에 꿈에나 이렇게 보신 적 있으세요?) “아, 그렇죠.. 여기도 이거 아까 쓴 데에도 그 꿈 꾼 거 다 나와요.” (어떤 꿈을 꾸셨어요?) “처음에는, 어후 살아있었네 난 당신 죽은 줄 알았는데 어후 이게 그렇지? 당신 어디.. 숨었다 나온 것 같고 그런 꿈도 꿨어요. 그리고 어떤 때는 그리 나와서 동전도 주고..”
꿈을 깨고 나면 세상은 더 매정하고 혹독했습니다. 제 목숨 무사하기 급급해 인심은 야박했고, 예나 어른이나 상처주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이영교 (77)] 故 하재완의 부인] “어떤 할머니가 날 보고 빨리 나가봐라 이러기에 나가보니까 집 앞에 큰 고목나무 당산나무가 하나 있었어요. 그 동네가 약간 논밭도 있는 개발지구라 그런데 애를 새끼줄에 묶어놓고 총살시키면 얘는 펑 넘어지는거야. 막내가, 고 네 살짜리가.. 그게 재밌다고 지는 웃으면서 당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나중에는 고단하니까 엄마 나는 간첩 안 할래, 간첩 안 할래 이러더라고..”
남편을 대신해 가정을 책임져야했던 아내들. 옷가게를 하고 외판원을 하고. 하지만 잔인한 권력은 그들을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이영교 (77)] 故 하재완의 부인] & [이근행 MBC 해직 PD] (박정희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그리고 79년 말까지, 75년부터 한 4~5년간에는 어머니나 가족들에 대한 감시가 어땠어요?) “붙어서 다녔지 붙어가지고.. 김지어 동네 사람들이 남편 죽고 나서 뭐, 남자 생겼는가보다 할 정도로 둘씩 따라다녔다고.” (형사들 둘이?) “보따리 들고 가면 따라 다녔다고 버스 타면 따라 다니고. (물건 팔러) 그 집에 들어가면 나올 때까지 바깥에 서 있고 너무 늦게 나오면 똥똥, 두드려가지고 들여다 보고 가고.”
“우리 큰 딸은 그 사람들 오면 두부 사가지고 있다가도 저도 모르게 딱 놓고 우리 어머니 그만 괴롭히세요 하고 애가 막 사르르 넘어가고 이랬어요.”
시간은 죽은 아버지를 살려놓지도, 아들의 상처를 아물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처마가 떨어져 나가고, 지붕에 어린 오동이 자라도록 쉰이 넘은 아들은 아버지와 살던 그 오래된 집을 떠나지 못합니다.
[송철환 (53)] 故 송상진의 아들] “그래도 아버지가 계신 곳을, 아버지가 오시면 이걸 비워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죠. 뭐 당연히 살아계시는, 연행되었을 때는 여기로 당연히 올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이고 아파트 같은 곳, 편리하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집을 폐허로 만들어서는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들의 아내입니다. 올해..”
올해 팔순을 맞은 강순희 씨. 남편을 잃은 충격에 시력을 잃기 시작해 지금 왼쪽 눈은 거의 실명 상태입니다.
“이게 이게 우리 아까 했던 우리 공덕희 여사..”
그녀는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30년 넘게 자료를 모으고 꼼꼼히 기록해왔습니다.
@ 당시 인혁당 사형 판결 대법관 “민복기, 이영섭, 임창준, 나길조, 안병수, 주재황, 양병호, 한환진, 민문기, 김영세 이건 죽었네, 홍순엽.” (이렇게 직접 적어놓으셨어요?) “네, 아. 잊어버릴까봐.”
언젠가는 억울함도, 죄도 다 밝혀지리라 믿었습니다.
[이영교 (77)] 故 하재완의 부인] “그건 용서는 안 되지.. 용서가 됩니까 그게?” (누가요?) “내가 박근혜를 사과를 한다해도 아버지 잘못을 사과한다 해도 물론 아버지가 저지른 일이지만도 지금 우리 가슴에 불을 새로 자기가 튕겼잖아요. 두 번 죽였잖아요. 그런데 용서를.. 될까 모르겠어요 나는.. 답이 안 나와요.”
[강순희 (80)] 故 우홍선의 부인] “처음 나와가지고 나올 때부터 그런 반성을, 진자 우리 아버지 일이지만 정말 안 됐고 나는 그때 철도 없고 내가 정치를 하다보니까 그렇다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대로 얘기하면, 뭐 연좌제도 아니고 그 여자를 그렇게 감정적으로야 밉지만 어떻게 우리가 나서가지고 어제같은 대응을 할 수가 없죠. 이제는 안 그러죠.. 이제는 지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해도 그건 거짓이잖아요. 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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