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현지기고] "시위대는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앗아간 나쁜 체제와 싸운다"

2021년 04월 19일 17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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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일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 폭거에 저항하는 미얀마 국민이 6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군부는 현지 언론의 취재 보도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습니다. 마치 1980년 5월 한국 광주를 떠올리게 합니다. 목숨을 건 미얀마 국민들의 민주화투쟁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요.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우리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얀마 기자 ‘쏘 얀 나잉(Saw Yan Naing)’과 그 동료들의 특별기고를 싣습니다. 쏘 얀 나잉은 BBC 미얀마 지국장 등을 역임한 베테랑 저널리스트입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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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 얀 나잉(Saw Yan Naing) 
'Z세대'라고 불리는 미얀마의 젊은 시위대가 지난 2월 미얀마 양곤 시내에서 시민 불복종 운동(CDM)으로 알려진 반군부 시위를 시작했다. (사진 = 쏘 얀 나잉 기자)
지난 2월 1일 미얀마 쿠데타 이후, 어린이를 포함해 600명 이상의 미얀마 국민들이 군부의 폭거에 저항하다 사망했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사회 각계에서 모인 시위대는 거리에서 반 쿠데타 시위를 열었고, 버마 민주주의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 등 선출된 지도자들을 석방해달라고 요구했다. 또한 군부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게 권력을 되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폭력 상황이 더 악화될수록 시위대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억류된 정치인과 활동가 석방, 그 이상이 될 것이다. 시위대는 시민들의 권리와 자유, 미래를 앗아가는 미얀마의 나쁜 체제와 싸우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의 극심한 권력 다툼이 미얀마 국민의 꿈과 희망을 파괴하고 있다. 군부 쿠데타 징후는 지난해부터 나타났다.

아웅산 수치와 군부 엘리트의 전쟁

지난해 8월, 미얀마 수도 네피도에서 제4차 연합평화회의(Union Peace Conference)가 열렸다. '21세기 팡롱'이라고도 불린 이 회의는 2019년 전국 평화 프로세스를 무산시킨 정부 대표들과 소수민족 무장 단체들의 갈등을 해결하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평화를 위해 의논하고 상호 존중하는 분위기 대신 말싸움이 회의를 장악했다. 민 아웅 흘라잉 군 사령관은 소수 민족 집단이 이전 중앙정부에 반대했고, 평화 프로세스 참여자들을 향해서도 정직하지 못하다며 비난했다. 
반면 민주주의 리더 아웅산 수지는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군사력에 의존하는 나쁜 정치 문화를 없애야 한다며 군부를 비난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분석가들은 그날 회의가 아웅산 수지와 군부 엘리트들의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연합평화회의에 참석했던 한 학계 인사는 미얀마 최대 권력자 2명이 충돌할 경우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분쟁으로 이어지고 지난 수년간의 평화 구축 과정이 무산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네피도의 정계 인사들은 아웅산 수지와 민 아웅 흘라잉이 지난 몇년 동안 협치를 시도해왔지만 서로를 향한 적대감이 너무 강하다고 판단한다. 두 사람 모두 너무 완고하고, 야망과 자존심이 크다는 말이다. 
안전상의 이유로 익명을 요청한 한 중견 정치인에 따르면 아웅산 수지와 민 아웅 흘라잉은 서로 사이가 나빠 직접 만남은 피한 채 각각 대표자를 선정해서 대화를 진행해왔다고 한다. 
미얀마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실질적 지도자인 아웅산 수지가 권력을 쥐고 있을 당시, 그는 전력에너지부, 교육부, 외무부, 대통령실 등 4개 부처 장관 자리를 할당 받았다. 전력에너지부와 교육부 장관직을 내려놓은 이후에도 아웅산 수지는 여전히 막강한 정치 권력을 행사했다.   
아웅산 수지는 한때 국가평화재건센터(NRPC)와 연합평화대화합동위원회(UPDJC) 의장을 맡기도 했다. 국가고문으로 임명되면서 실질적으로는 총리급 지위를 유지해왔다. 
NLD 내 일부 세력 또한 아웅산 수지의 독단성과 그가 정부 고위직을 여러 개 차지한 것은 과하다고 평가한다.
국가 고문이라는 직위를 새로 만들 때도 큰 논란이 일었다. 군부가 당장 반발하고 나섰다. 한 의원은 국가 고문이라는 직위는 위헌이라며 비판했고 투표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의회는 2016년 4월 투표를 통해 국가고문이라는 자리를 탄생시켰다. 
당시 군부를 대표하던 마웅마웅 소장은 의회 투표 결과를 두고 "군부를 왕따"시키는 행위라며 비난했다. 국가 고문 자리를 고안해 낸 이는 아웅산 수지의 법률 고문 우 코 니(U Ko Ni)라고 알려진다. 우 코 니는 2017년 양곤국제공항에서 저격당했다. 많은 이들이 이 사건의 배후로 군부를 지목한다. 
이렇듯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줄다리기는 폭력과 유혈사태로 이어진 전력이 있다.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는 예측이 결코 과장이 아닌 셈이다.  

민주정부 하에서도 특권 가졌던 군부

미얀마 군부 또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정부에서도 특권을 누렸다. 2008년 군부가 뽑은 변호사들이 작성한 헌법에 따라 그들은 자동적으로 의회 내 25퍼센트의 의석을 차지했다.  
또 해당 헌법은 군대가 국방부와 국경부, 행정자치부 등 3개의 주요 부처를 장악할 수 있도록 보장했고, 군부는 부통령을 임명할 수 있는 특권도 가지고 있었다. 미얀마는 한 명의 대통령과 두 명의 부통령을 두고 있다.
정치력 외에도, 군부와 그들의 친인척과 측근들은 미얀마경제공사(MEC)와 미얀마경제홀딩스 유한회사(MEHL) 등 두 개의 거대한 기업을 소유하고 있다. 두 회사 모두 수입의 상당 부분을 군과 장교들에게 배분한다.
미얀마 군부의 자금을 주로 다루는 ‘미얀마 저스티스(Justice for Muriana)’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얀마경제홀딩스(MEHL)는 광산의 옥과 루비 라이선스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현 군부 지도자인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의 아들과 딸, 며느리 역시 리조트와 건설, 통신, 영화 산업, 의료 공급 사업, 식당 및 고급 체육관 등의 사업체를 소유하고 있다. 

쿠데타 직전, 양측의 팽팽한 줄다리기

2월 1일, 미얀마 군부가 자신들이 운영하는 TV 채널을 통해 쿠데타를 선포하자 미얀마 국민과 국제사회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미 쿠데타의 전조를 느끼고 있었다.  
연방의회 의원들, 외교관 모임과 현지 언론은 NLD와 군부 대표자들이 지난 1월 28일 협상을 위해 만난 바 있다고 전했다. 이때 군부는 2020년 11월 NLD가 압승했던 선거 결과에 의혹을 제기했다. 복수 관계자에 따르면 군부는 간과하기에는 불규칙성이 너무 컸다고 부정선거 의혹을 주장하며 재검표와 재선거를 원했다. 
NLD 또한 양보하지 않았고 대화는 결렬됐다. 그 시점에서 쿠데타는 이미 예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웅산 수지와 NLD 또한 쿠데타가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미얀마 현지 언론 <이라와디>는 아웅산 수지가 1월 28일 자택에서 당원들과 여러 차례 회의를 진행했다고 보도했다. 회의에서는 군부의 요구에 반대할 경우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가 논의되었다.  
군부 채널이 2월 1일 쿠데타를 공식 선언했을 때는 이미 군부가 당일 새벽 아웅산 수지를 포함한 여러 고위 정치인을 구금한 뒤였다. 
군부와 그 측근 정당은 부정선거 의혹이 쿠데타의 원인이었다고 하지만, 다수의 분석가들은 쿠데타를 위한 변명일 뿐이었다고 지적했다. 미얀마 헌법상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없지만 군부는 스스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대통령을 내쫓은 뒤 새 대통령을 임명했다.  

현재까지 600여 명 사망...시위대, 무장 세력 찾아가 훈련

현지 언론과 인권단체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600여 명의 시위 참가자가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은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더 큰 원동력을 제공하는 동시에 국제 사회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미얀마 거리 곳곳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분노한 시민들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현장을 볼 수 있다. 
미얀마 상황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현재 많은 미얀마 시위대들이 소수민족의 무장 세력을 찾아가 훈련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의료 치료 기술, 폭발물 장치 만드는 법, 그리고 다른 전투 기술들을 배우는 것이다. 몇몇은 이미 대도시 돌아와, 반군부 시위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처럼 시위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사회 각계에서 모인 시위대는 거리에서 평화 시위를 열었고, 버마 민주주의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 등 선출된 지도자들을 석방해달라고 요구했다. 또한 군부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게 권력을 되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얀마의 'Z세대' 시위대가 양곤 시내에서 시민 불복종 운동(CDM)을 벌이는 모습 (사진 = 쏘 얀 나잉 기자)
양곤시에서 시위에 참가한 한 시민인 에(Aye) 씨는 "청년들(Z세대)은 군사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싸우고 싶어한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군부가 억류된 정치인들을 풀어주고, 그들과 타협한다고 하더라도 청년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군부가 권력을 쥐는 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에 익숙한 Z세대는 전국적으로 반군 시위를 이끌고 시위대에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양곤시에서 시위에 참여한 코 피요 씨는 "더 이상의 패배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싸움입니다"라며 "지금 물러선다면 우리는 자유와 꿈 그리고 미래를 잃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군부 독재 아래 살고 싶지 않다"며 시민 불복종 운동만이 미얀마 국민들의 희망이라고 덧붙였다. 
"시민 불복종 운동에 참여하는 각계각층의 수많은 시민들은 정치적인 이득을 얻고자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시는 군부 독재 하에 살고 싶지 않다는 순수한 열망 하나로 모이고 있습니다. 이미 군부 치하에서 고통받았고 군사 독재 사회가 어떠한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1962년부터 2010년까지 이어진 군사정권 하에서 민주주의는 크게 좌절해왔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반체제 인사들, 활동가들, 언론 노동자들은 두려움 속에 살았다. 일부는 감옥에 가거나 가택연금을 당하고, 다른 일부는 미얀마를 떠나 이웃 나라 등으로 망명했다. 농촌 지역의 민간인들은 군사 공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피난을 가야 했다. 도시 지역의 민간인들은 공부를 하기 위해, 혹은 이웃 나라에서 이주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나라를 떠났다. 

미얀마의 미래는?

아웅산 수지와 민 아웅 흘라잉 모두 타협의 시기를 놓친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둘 중 하나만 남아야 하는 상황에 치닫고 말았다.
정치 분석가들은 국가행정위원회(SAC)로 알려진 군사 정권이 1년간의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이후 선거를 열어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선포함에 따라 시민들의 반군 활동이 내년 2월까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시위대들은 시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전적으로 군부의 잔혹함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정치권에서는 군부가 선거를 실시할 수 있도록 올해 중순까지는 이 같은 상황을 통제하길 원하겠지만 시위대 역시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시위를 이어나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분석가들은 군부의 국가행정위원회(SAC)가 다음 선거 이후에도 여전히 권력을 유지하려고 할 것으로 내다봤다. 군부와 측근 정당인 연합연대개발당(USDP)은 계속 권력을 쥐고자 할 것이고, 아웅산 수지의 정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NLD)가 집권하기 이전처럼 국가를 통치하길 원하는 게 분명하다. 
2015년 NLD가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기 전까지 미얀마는 군인 출신이자 연합연대개발당의 테인 세인 대통령이 집권했다. 당시 군부의 지원과 함께, 연합연대개발당은 선출되지 않은 군인 의원들이 의회의 25%를 차지하는 등의 방식으로 의회를 장악했다. 군사 정권은 ‘테인 세인의 스타일’이라고 물리는 행정부를 만들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이 신뢰할 만한 대통령을 뽑고, 다음 정권 하에서도 큰 특권을 누리는 겠다는 것이다. 
민 아웅 흘라잉은 패배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반독재 시위가 확산되기 전부터 미얀마 군 지위부는 국가행정위원회를 꾸려 정치적인 기반을 다져왔다.  
국가행정위원회는 민 아웅 흘라잉이 직접 뽑은 각 정당 및 소수민족 대표자 11명으로 구성됐다. 이를 놓고 전문가들은 민 아웅 흘라잉이 새 정부의 포용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카렌민족연합(Karen National Union) 전 지도부의 일원인 만 녜인 마웅은 카렌족 대표 자격으로 국가행정위원회에 참석했다. 민중개척당(People’s Pioneer Party) 셋 셋 카잉 대표는 복지구호재정착부 장관으로 지명됐다.
과거 NLD에 몸담았으나 당의 실적에 불만을 느끼고 떠난 인사들도 국가행정위원회에 들어갔다.
국가행정위원회는 민간인 7명으로 구성된 자문단도 꾸렸다. 여기에는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국 시민권자이기도 응언 쿵 리안 박사도 속했다. 응언 박사는 친(Chin)족으로 지금은 해체된 미얀마평화센터의 법률고문을 역임한 바 있다.
쿠데타가 공식 선포된 날 국가행정위원회는 미얀마가 앞으로 1년 동안 국가 비상사태에 돌입할 것이라고 발표하고, 선거는 그 후에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군부는 누구든 상관없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이에게 기꺼이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분석가나 활동가들은 그 때가 되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늦어버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미 민 아웅 흘라잉의 입맛에 맞는 인사들로 채워질 것이기 때문에 민 아웅 흘라잉에게 불리할 리가 없다는 뜻이다. 대통령 자리에는 민 아웅 흘라잉이 직접 앉거나 또는 그의 최측근을 앉힐 가능성이 크다. 
“독재자들은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지 않는 한 절대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겁니다.” 
한 분석가는 민 아웅 흘라잉이 최고사령관 자리에서 자진 사퇴하기 전에 자신의 안전을 최대한 확보해둘 것이라고 전망했다.
제작진
정리 강혜인 기자
번역강혜인, 이명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