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설문지, 산으로 간 비정규 대책

2015년 01월 09일 22시 41분

비정규직 사용 기한을 2년에서 최대 4년으로 연장하기로 한 정부의 ‘비정규직 종합대책(2014.12.29 발표)’의 근거는 설문조사였다. 비정규직 경험이 있는 천백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82%가 기간 연장을 원했다는 것이다.

같은 설문 문항, 정반대 결과

하지만 같은 날 발표된 한국노총의 설문조사에서는 69%의 비정규직이 기간 연장에 반대한 것으로 발표됐다. 설문조사의 주체가 다르다지만 이렇게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뉴스타파는 양쪽의 설문지를 입수해 어디에서 차이가 생겼는지 검증했다.

아래 링크를 누르면 고용노동부와 한국노총의 설문지 문항과 결과보고서 원문을 볼 수 있다.

고용노동부 비정규직 설문지(PDF)고용노동부 비정규직 설문 결과 보고서(PDF)한국노총 비정규직 설문지(PDF)한국노총 비정규직 설물 결과 보고서(PDF)

‘혼합 설문’의 오류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혼합 설문’이다. 아래는 고용노동부 설문지의 4번 문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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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항은 두 가지 질문이 혼합돼 있다. “1.기간 연장에 찬성하는가”와 “2.금전적 보상에 찬성하는가”이다. 문제는 두 개인데 답은 하나다. 예를 들어 1번에는 반대하지만 2번에 찬성하는 사람이 전체 문항에 찬성이라고 답하면 1번에 반대하는 의견은 사라지게 된다. 고용노동부의 설문조사에서는 비정규직의 82%가 찬성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이 82% 중 실제로 어느 정도 비율이 정확하게 기간 연장에 찬성하는지는 계량할 수 없다.

하지만 노동관련 법률 개정을 관할하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새누리당 간사 권성동 의원은 1월 6일 원내대책회의에서 “비정규직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보면 80% 이상 정도가 2년은 너무 짧다, 기간을 연장해 달라는 것이 비정규직의 의견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한국노총의 문항은 비정규직 기간 연장에 대한 찬반만 물었다. 결과는 69%가 반대했다. 완전히 상반된 결과가 나온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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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는 실제 비정규직들이 이 문항들에 대해서 어떻게 답할지 직접 간략한 설문조사를 해봤다. 19명에게 문제의 두 문항을 모두 물었더니 8명이 두 문항에 각각 다른 응답을 했다. 기간 연장을 묻는 같은 질문에 한 쪽에는 찬성, 한 쪽에는 반대를 한 셈이다. 대부분 한국노총 문항에는 반대, 고용노동부 문항에는 찬성을 응답했다.

현장에는 만난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이경자 씨는 “(고용노동부 설문에서 기간 연장에) 왜 찬성했나하면 어짜피 정규직으로 전환을 안 시켜주면 그 회사에서 짤리는 거잖아요. 그렇게 되면 임금으로라도 다만 얼마라도 보상을 해줘야 맞는 거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이경자 씨는 한국노총 설문에서 기간 연장 문항에는 반대 응답을 했다.

“정규직 전환이 대전제” vs “정규직 전환 불가능이 대전제”

한국노총의 설문에는 시급한 노동정책이 무엇이냐는 문항과 정규직 전환이라는 선택지가 포함돼 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 설문에는 정규직 전환에 대한 문항이 아예 없다. 그러다보니 정부 설문 결과에서는 “비정규직의 53%가 비정규직 기간 제한이 필요없다고 응답했다”고 나온다. 마치 과반이 넘는 비정규직이 계속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것을 희망한 것처럼 들린다.

현장에서 만난 비정규직 경비노동자 박종국 씨는 “(정규직 전환이) 강제 규정도 아니고 (정규직 전환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럴 바에는 기간제라도 오래 근무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라고 밝혔다. 박종국 씨는 고용노동부 설문에서 비정규직 기간 연장에 찬성했다.

고용노동부 설문조사의 책임자인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는 “기간제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과 관련해서는 가이드라인이 이미 제안이 됐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가정을 하고 그 이외의 대상들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간 연장과 금전적 보상이 같은 문항에 혼합된 이유를 묻자 “전체적인 취지를 생각해야지 한 부분만 찍어서 물어보는 취재 방식이라면 설문의 구체적인 내용과 관련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불쾌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김성희 서울노동권익센터장은 고용노동부의 설문방식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김성희 센터장은 “정규직 전환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모두 응답할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가 아니라, 2년 지나서 해고되는 사태를 어떻게 막고, 어떤 방식으로 풀어야 될 것인가에 대한 정책 선택지가 존재하는데 선택지는 보여주고 답을 하는 게 맞다”고 비판했다.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노총은 정부의 설문에 대해 위원회 테이블에서 문제제기를 할 예정이다. 정문주 한국노총 정책본부장은 “공정하게 노동조합, 사용자단체, 정부가 같이 설문문항을 만들어서 공동으로 조사해보자고 제안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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