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개혁 프로젝트] 헌법재판관 사건 뭉개기를 막아라 ②

2022년 12월 14일 14시 00분

정치가 토론하고 타협하는 과정인 것과 달리, 사법은 분석하고 평가해서 나오는 결론이다. 공동체 의사를 정하는 정치가 사법화하는 것이 최선일 수 없는 이유다. 문제는 ‘정치의 사법화’가 21세기 현대 국가의 보편적인 현상이란 데 있다. 거부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 정의로운 제도가 되도록 해야 한다. 사법은 우리 공동체의 운명과 개인의 행복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뉴스타파는 한국 사법제도에 박힌 반헌법적이고 비민주적인 제도를 밝혀내어 바로잡는 <사법개혁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주심 재판관의 사건 미루기는 전략적이고 정치적인 작업이다. 언론과 시민이 다 아는 유명한 사건은 미루기도 어렵고, 미룬다 해도 비난받기 쉽다. 오히려 위헌적인 입법부의 법률과 행정부의 처분에 아무런 입장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미루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헌법재판소장 인선 등 대통령과 국회가 행사하는 인사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사법 분야 전문가들 설명이다. 이렇게 해서 위헌 상태를 방치하고, 소수자 보호라는 사법의 임무를 다수자 추종이라는 입법과 행정의 이익에 희생시킨다. 구체적인 헌법재판소 사건 미루기 사례를 제2회에서 살펴본다.

1. 미루고 미루다, 사건이 자연 소멸하면 각하 결정

헌법재판관 임기는 6년이다. 대통령(5년), 국회의원(4년)보다 길다. 그래서 헌법재판관 임기 초‧중반에 주심을 맡은 사건은 쥐고 버티는 방법을 쓴다. 그 사이 국회가 바뀌어 법률이 폐기되거나, 새로운 정부가 견해를 뒤집기도 한다. 심지어 청구인이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이렇게 사건이 소멸하면 그제야 주심 재판관이 심리에 부치고, 헌법재판소는 재판의 실익이 없다며 각하로 결론을 낸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내 거주 재외국민 자녀 보육료 배제 사건이다.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한국에 살면서 아이를 기르는 한국 국적 재일교포 여성들이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5년 11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다문화가정에도 주어지는 보육료를 자신들의 아이만 받지 못한다고 했다. 실제로 외국인 결혼 이민자의 자녀들은 다문화가족지원법에 따라 보육료를 받고 있었다. 난민도 예외적으로 보육료 혜택이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재일교포 엄마들이 일본 특별영주권을 포기해야만 보육료를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특별영주권은 눈물과 투쟁의 결과이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은 조선인이 일본에 거주할 권리도 빼앗았다. 이들은 추방의 불안에서만이라도 벗어나야겠다며 영주권 투쟁을 벌였다. 길고 긴 투쟁 끝에 1991년에야 받아낸 것이 각종 제한이 붙은 특별영주권이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사건을 쥐고만 있었다. 헌법재판소법 제38조가 정한 180일은 물론 200일, 300일, 400일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 사이 청구인의 아이들은 보육료를 받는 나이를 지나고 있었다. 이유를 두고 2017년 2월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 예정인 차기 헌법재판소장 자리를 노리고, 주심 재판관이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돌았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2016년 12월 국회에서 탄핵소추되면서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사건 당사자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차기 헌법재판관 임명은 없던 일이 됐다.
이후 국내 거주 재외국민 자녀 보육료 배제 정책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9월 폐지됐다. 헌법재판소가 사건을 쥐고 있는 사이 행정부가 정책을 바꾼 것이다. 그러자 사건 뭉개기를 감추기 위해 헌법재판소가 사건을 각하 결정한 것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일부 언론의 강력한 비판이 있었고, 헌법재판소는 800일을 넘긴 2018년 1월에야 이미 폐지된 정책에 위헌을 선고했다. 반대의견 없는 재판관 전원일치였다. 주심 재판관이 사건을 고의로 뭉개고 있었다는 방증이었다. 아직도 이 사건 주심 재판관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헌법재판소 홈페이지에 실린 현직 헌법재판관 8명 이름과 사진. 헌법재판관은 헌법재판소장을 포함해 9명이지만, 헌법재판소장은 특정 사건의 진행을 혼자서 담당하는 주심 재판관을 맡지 않는다.

2. 적당히 미루다, 후임 재판관에게 넘기고 퇴임

차기 헌법재판소장은 2023년 11월 윤석열 대통령이 임명한다. 전직 혹은 현직 헌법재판관이 헌법재판소장으로 임명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2017년 9월 김이수 헌법재판관이 헌법재판소장에 내정됐지만, 국회 동의가 부결되면서 임명되지 못한 사례가 있다. 이 때문에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둔 2021년 3월 무렵부터 일부 헌법재판관들이 국회 입법 사건을 뭉개기 시작한다는 얘기가 돌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당 가입 경력자 법관 배제 법률이다.
대법원은 2021년 신임 법관 임용시험 원서에 3년 이내에 정당 가입 사실이 없음을 확인하는 서약서를 요구해 논란이 됐다. 앞서 국회가 법원조직법에 정당 가입 이력을 법관 결격사유로 추가했는데, 이 조항이 처음 본격 적용된 것이다. 이 조항에 대해서는 위헌이라는 의견이 처음부터 많았다. 입법 과정에서 법원행정처는 “헌법상 직업 선택의 자유 또는 공무담임권에 중대한 제약으로 작용할 가능성에 관해 검토가 필요하다”라고 국회에 밝혔다. 법무부도 “국가공무원법 등 관련 법률에서 임용 전 정치활동을 결격사유로 규정하고 있지 아니하므로 이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라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국회는 국민 가운데 당원이 얼마 안 되니 이들을 빼고 법관으로 뽑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김도읍 의원은 “5000만 국민 중에 정당 가입을 했거나 정당원이거나 하는 인구가 얼마 정도 될 것 같아요? 얼마 안 돼요. 다 해봐야 200만~300만명 정도 될 거예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입법 시점이던 2019년 12월 현재 당원은 865만여 명이다. 정당 가입이 가능한 선거권자를 기준으로 하면 국민의 20%가 당원이며, 정당 가입이 금지된 공무원·교원을 분모에서 빼면 실질적인 당원 비율은 더 높다.
새로운 법원조직법에 따라 대법원이 서약서 제출을 요구하자, 법관 시험에 응시한 변호사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법원조직법에 대해 2021년 4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때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헌법재판관들이 사건을 뭉개기 시작한 무렵이다. 실제로 이 사건 역시 180일은 물론 600일이 지나도록 결론이 나오지 않고 있다. 사법분야 전문가들은 “만에 하나 퇴임을 앞둔 재판관이 후임 재판관에게 주심을 넘기고 나가려는 것이라면, 그 의도를 심각하게 의심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사건의 주심 재판관이 누구인지 역시 헌법재판소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제작진
취재이범준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