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번에도 많은 언론들이 전경련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 수십 건의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 전경련 보도자료를 인용한 기사들
이 기사들만 보면 일이 많을 때 몰아서 하고, 추가로 일한 시간만큼 나중에 몰아서 쉬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선진국에 비해 휴가가 많지 않고 그나마 길게 이어서 쓰기 힘든 우리나라 직장인의 입장에선 꽤나 달콤하게 들리는 제도입니다.
전경련이 말하지 않은 몇 가지
그런데 전경련이 G5 국가와 비교하면서 빠뜨린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총 노동시간입니다.
▲ 한국 노동자는 1년에 미국보다 126시간, 독일보다는 무려 622시간 더 일한다. 자료 : OECD, 「https://stats.oecd.org, Average annual hours actually worked per worker」(2022.6)
많은 분들이 예상했다시피,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G5 국가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가장 적은 독일과는 622시간 차이가 납니다. 한국 노동자는 독일 노동자보다 1년에 78일을 더 일하고 있는 셈입니다.
범위를 OECD 국가 38개국으로 넓혀도 한국보다 노동시간이 많은 곳은 멕시코(2,328시간), 코스타리카(2,187시간), 칠레(1,990시간) 3곳뿐입니다. OECD 평균 노동시간은 1,706시간으로 한국과 222시간(28일) 차이가 납니다.
전경련이 언급하지 않은 게 또 있습니다. 바로 노동자들의 수입 즉, 임금입니다.
▲ G5 국가 노동자들이 1년에 받는 임금.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보다 높다. 자료 :OECD https://data.oecd.org/earnwage/average-wages.htm Average annual wages, US dollars, 2021 or latest available
노동자들은 G5 국가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일하면서도 더 적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만큼 저임금 노동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조혁진 연구위원은 "다른 OECD 국가들과 비교할 때 압도적으로 긴 노동시간이나 성별 임금격차 같은 것들은 쏙 빼놓은 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데이터만 가져다 비교해 왜곡하는 것은 연구자의 입장에서 볼 때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다"라면서 "해외에서 그런 제도를 도입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느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국내 기업들이 G5 국가들의 제도를 부러워하는 이유
이런 제도를 도입하게 되면 기업들은 필요할 때 노동자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면서 비용은 절감할 수 있습니다. 비정기적으로 발생하는 단기적인 수요나 계절적인 수요, 또는 경기 사이클에 따라 발생하는 수요에 노동력을 집중 투입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반면 이로 인해 발생하는 연장근로에 대한 수당은 휴가로 대체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제도 자체만 놓고서 노동자에게 무조건 불리하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일이 많을 때 조금 더 일하고 그만큼 휴가를 쓸 수 있기를 바라는 노동자도 있을 테니까요. 독일에서도 근로시간 저축제도를 도입한 곳이 2018년 기준 500인 이상 사업장에서 85%나 된다고 합니다.
문제는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와 한국의 노동환경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나친 노동시간으로 인한 과로사나 산업재해가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데 특정 기간에 노동시간이 지금보다 더 집중될 경우,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에 더 큰 위험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이 2020년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OECD 국가 가운데 한국의 근로자 10만 명당 사고 사망자 수는 2017년 기준 3.61명으로 독일 1.03명, 영국 0.88명, 프랑스 2.18명, 일본 1.50명보다 훨씬 높았고 3.36명인 미국보다도 높았습니다.
상대적으로 낮은 기본급 구조로 인해 연장근로를 해야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이 보전되는 우리나라의 임금구조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박용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기본급으로 일정 정도 수입이 보장되는 유럽 노동자들에 비해 연장근로 임금이 전체 수입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우리나라 노동자의 경우 근로시간 저축 제도가 도입되면 유럽 노동자에 비해 임금 감소에 있어서 더 큰 타격이 있을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단순히 제도 자체만 놓고 G5 국가와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민주노총의 한상진 대변인도 "우리나라처럼 원청에서 하청 다시 재하청으로 수직계열화되어 있는 산업구조 속에서 밑으로 내려갈수록 노동자들이 근로 시간 조건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에 사측과 동등하게 교섭하기 힘든 조건"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전체 노동자의 노조 조직률이 14%에 불과하고 비정규직이 절반이 넘기 때문에 근로시간 유연화는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 1호가 근로시간 유연화
문제는 윤석열 정부의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노동정책이 이런 전경련의 숙원사업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지난 6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발표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향'을 보면 전경련의 보도자료와 똑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장관은 7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도 같은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했습니다.
▲ 지난 7월 15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대통령 업무보고.
'주' 단위로 돼 있는 연장근로시간 기준을 '월' 단위로 바꾸고 근로시간 저축 계좌제를 도입하고 1개월로 돼 있는 선택적 근로시간을 확대하겠다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고용노동부는 이를 위해 교수들로 구성된 전문가 논의기구인 '미래노동시장 연구회'를 발족시켰습니다. 노동시간과 임금체계 개편 방향을 논의해 오는 10월에 최종 권고안을 낼 예정인데 고용노동부는 권고안을 대통령 소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올려 논의를 이어갈 계획입니다.
하지만 현재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민주노총은 탈퇴한 상태이고 한국노총도 민주노총과 마찬가지로 정부안에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노동계의 타협을 이끌어내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게다가 '주'단위로 돼 있는 연장근로시간 기준을 '월'단위로 바꾸기 위해서는 근로기준법 개정이 필요한데 지금 같은 여야 의석 수로는 개정안이 통과되기도 힘듭니다.
박용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이에 대해 "대우조선 사태에서 확인된 원하청 간의 구조적이고 본질적인 문제 같은 중요한 현안이 노동계에 수두룩하게 많은데 어떻게 보면 노사 간에 부차적인 이런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제1의 노동개혁 과제로 내세워 노사 간에 소모적인 대립을 부추긴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한심스럽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현재 연장근로 수당 체불은 말할 것도 없고 기본적인 임금 체불도 너무 많아서 근로감독관 업무의 80%가 체불임금 관련된 것일 정도로 기본적인 노동자의 권리도 지켜지고 있지 않은데 근로시간 저축 계좌제도가 지켜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이해관계자들의 참여 없이 논의가 이뤄지는 데 대한 지적도 많습니다. 조혁진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근로시간의 제도를 바꾼다는 것은 일터의 규칙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이해 당사자들이 참여하지 않고 정부가 밀어붙이기 식으로 하게 되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라고 우려했습니다.
2010년 9월 당시 노사정 대표들은 대타협을 이뤄내면서 2020년까지 연간 노동시간을 1,800시간 이내로 줄이기로 합의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2018년 근로기준법에서 주 52시간을 법제화하면서 조금씩 감소하긴 했지만 여전히 2021년 노동시간은 1,928시간이나 됩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앞장서고 대기업 대표단체인 전경련이 수시로 여론몰이를 펼치는 이런 움직임이, 현재의 이 지독한 '과로 사회'를 또 어떤 방향으로 이끌게 될지 지켜봐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