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기획재정부가 비공개해 왔던 정부 부처의 예산요구서를 공개해도 업무에 지장이 없으며, 오히려 예산 편성의 투명성을 높인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23개월만에 기획재정부 상대 정부 부처 예산요구서 공개 행정소송 첫 승소
서울행정법원 제1부(재판장 양상윤)는 4월 26일, 뉴스타파와 3개 시민단체가 기재부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거부 취소 행정소송에서 뉴스타파와 시민단체의 전부 승소로 판결했다. 공정한 업무에 지장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예산요구서의 공개를 거부했던 기재부의 주장은 단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뉴스타파가 <세금도둑잡아라>, <투명사회를위한정보공개센터>, <함께하는시민행동> 등 3개 시민단체와 함께 기획재정부를 상대로 정부 부처 예산요구서 공개 행정소송을 제기한 지 23개월 만에 나온 재판 결과다. 정부 예산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를 상대로 정부 부처의 예산요구서 공개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1심 판결에 따라, 기재부는 2021년 5월 31일까지 제출한 ‘보건복지부의 2022년도 예산안에 대한 예산요구서’를 공개해야 한다. 기재부는 지금까지 모든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제출해 온 예산요구서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앞서, 뉴스타파와 3개 시민단체는 2022년 5월, 보건복지부 등 5개 부처가 기재부에 제출한 2022년 예산요구서를 공개해달라고 기재부에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하지만 기재부는 “(정부 부처가 제출하는 예산요구서는) 예산을 편성하기 위한 내부 자료로써 정부의 공식적인 자료가 아니다”, “(예산요구서는 각 부처가) 생산한 자료이므로 정보공개에 대한 결정도 해당 부처에서 최종 판단해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비공개했다.
이에 맞서 그해 5월 31일, 뉴스타파와 시민단체들은 5개 부처의 예산요구서를 공개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냈다. 애초 공개를 요구한 예산요구서는 보건복지부, 국토교통부, 해양수산부 등 5개 부처였다. 그러나 5개 부처의 예산요구서를 모두 비공개 열람 심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등 재판 진행이 더디게 되자, 재판부가 5개에서 1개 부처로 예산요구서의 비공개 열람 심사를 중재했고, 이후 공개 여부 다툼은 보건복지부 예산요구서 1개로 진행됐다.
23개월이 걸린 이번 1심 판결이 나오기까지 재판부가 1번 바뀌었고, 7번의 변론과 1번의 비공개 열람 심사가 있었다. 석 달에 한 번꼴로 변론이 진행됐다.
재판부, “예산요구서 공개는 예산 편성 과정에 국민 참여 보장하고, 공정·객관·투명성 제고”
재판부는 비공개 심사 결과를 바탕으로 기재부의 비공개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재판부는 우선 “기재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예산요구서가) 사전에 유출됨으로써 투기 등이 이루어질 염려가 있는 사업 예정지 정보, 사업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는 정보, 해킹에 노출될 위험이 있는 정보 등은 찾기 어렵다”면서 “사업 추진 등의 공정한 수행에 객관적으로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고도의 개연성을 찾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기재부가 비공개 이유로 주장한 ▲예산요구서의 부실화, ▲보여주기식 무분별한 예산 요구, ▲ 기재부 상대 민원이나 압력의 증가, ▲(예산) 검토 기간의 증가 및 업무 과중 등도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같이 기재부가 주장하는 사정들은 막연한 추측 내지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라며 “예산 편성에 관한 업무 등의 공정한 수행에 객관적으로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고도의 개연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특히 이번 예산요구서의 공개가 무엇보다 예산 편성 과정에 국민 참여를 보장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국가재정법 제16조 4조, 즉, “정부는 예산 과정의 투명성과 예산 과정에의 국민 참여를 제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조항을 들어, “이 사건 정보 공개는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예산 편성에 있어서 국민의 참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데 기여한다”면서 “예산 편성의 공정성, 객관성 및 투명성을 제고하는 순기능이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비공개됐던 정부 부처 예산요구서 처음으로 공개될까?
뉴스타파와 3개 시민단체가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기재부에 제출하는 ‘예산요구서’에 주목한 것은 기재부가 각 부처가 낸 예산요구서를 어떤 방식으로 검토·수정하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특히 각 부처가 제출한 예산요구서를 기재부가 총괄·조정하는 과정에서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숨은 예산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국회에서 통과된 2024년 정부예산은 656조 3,000억 원 규모다. 국가 예산의 확정은 대략 3단계 절차로 이뤄진다. ①모든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는 매년 5월 31일까지 ‘예산요구서’를 작성해 기재부에 제출한다. ②기재부는 매년 9월 3일까지 각 부처 등이 제출한 예산요구서를 검토·조정해 정부예산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한다. ③국회는 매년 연말까지 기재부가 만든 정부예산안을 심의·의결해 확정한다.
이렇게 세 단계로 진행되는 정부 예산안의 프로세스 가운데 유독 첫 번째 단계, 즉, 각 부처가 기재부에 제출한 예산요구서는 비공개돼 왔다. 지금까지 정부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제출한 예산요구서가 기재부로 넘겨진 뒤에, 기재부 관료들이 어떻게 검토하고 수정해 왔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번 판결로 ‘기재부의 손을 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인 정부 부처가 생산한 ‘예산요구서 원본’을 볼 수 있는 길이 처음으로 열렸다.
하승수 변호사(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는 “당연한 판결이다. 그동안 기획재정부가 비밀주의에 빠져서 이런 정보조차 공개하지 않았는데, 관료들의 편의보다는 국민의 알권리가 우선이라는 것을 확인해 준 판결”이라고 말했고, 소송의 원고를 맡았던 채연하 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처장은 “예산이 결정되는 과정에서의 정보를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하고, 이로 인해 행정부가 가지는 편성에 대한 정보 독점권을 국민에게 나눈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1심에서 패소한 기재부가 항소할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항소는 판결문이 송달된 날부터 2주 이내에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