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잠든 캄캄한 새벽, 완순 할머니는 그림을 그린다. 뾰족하게 깎은 색연필로 70여 년 전의 기억을 꾹꾹 눌러 담는다. 헬기를 타고 온 미군, 몽둥이를 들고 있는 군인 그리고 해변에 굴러다니는 해골로 도화지가 채워진다. 그림을 그릴수록 할머니는 그때의 기억이 점점 또렷해진다. 군인들이 입었던 단추의 색깔과 손바닥에 묻었던 혈흔이 다시금 떠오른다. 죽은 사람들의 피가 흙에 스며들어 햇빛에 반짝이던 그 광경을 잊을 수 없다. 완순 할머니는 그렇게 그림으로 증언한다.
▲그림을 그리는 완순 할머니
우리에겐 관광지로 익숙한 제주, 70여년 전 이곳은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4·3 사건이라는 국가폭력으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섬 전체 인구 10명 중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완순 할머니는 얼마남지 않은 4·3 생존자다. 당시 완순은 동생의 죽음을 바로 옆에서 목격했다. 아홉 살 소녀가 평생에 걸쳐 짊어지고 온 죄책감의 근원이다.
▲4·3 희생자 추념식에 찾아온 서북청년단
완순 할머니는 걱정이다. 지난 2023년 75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 서북청년단이 찾아왔다. 평화공원 한쪽에선 유족들의 추념식이 거행되고 다른 한쪽에선 성난 유족들과 서북청년단이 충돌했다. 2022년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4·3이 빠졌다가 2023년 교과서 집필기준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 역사적 비극을 증언해줄 사람이 모두 사라지면 이 기억이 어떻게 남을지 할머니는 우려한다. 미래에 남을 기억의 세대 전승이 완순할머니가 계속 그림으로 증언하는 이유다.
▲ 완순 할머니가 그린 옴팡밭 그림증언
본 다큐멘터리는 완순 할머니의 그림을 바탕으로 애니메이션화 한 후 영화로 제작, 2025년 개봉할 예정이다